217. 최상층 (3)
"제나!"
고천수는 제나를 향해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의도는 알았다. 고천수가 혼자만 가야 한다고 하니, 과잉 충성으로 다른 인원들을 제거하려고 한 것이었다.
"전……."
떠밀린 채로 주춤거리는 제나를 놔두고 고천수는 양민철을 살폈다. 팔에 칼이 꽂히긴 했지만 부상이 깊지 않았다. 치명적인 부위는 피해 가서 천만다행이었다.
"하령아! 거기 괜찮으면 여기로 와서 살펴라!"
부름을 받은 김하령은 장서연에게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양민철의 옆으로 다가왔다. 치료를 시작한 그녀와 양민철을 놔두고 고천수는 제나에게 향했다.
"제나."
"……."
"네가 왜 그런 건지 모르지는 않아."
하지만 그건 고천수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신 그러지 마라."
어떻게 생각하면 제나는 고천수가 하기 힘든 일을 대신해 주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고천수는 가슴이 뛰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분명히 이 게임을 깨기 직전까지 왔음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일까.
만약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일행들의 죽음을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가까운 일행 누구도 쉽게 죽게 놔둘 수는 없던 것이다.
‘제기랄.’
다만 말린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이 상황은 답이 없었다. 뭐가 됐든 고천수는 혼자 남아야만 했다.
"잠깐……."
고천수는 순간 몸을 흠칫했다.
"혼자 남아야 한다고?"
애초에 플레이어가 혼자 남는 것이 가능한가.
일행들이 없다고 해도 주위에 좀비들은 계속 존재하고 있으니, 몬스터와는 계속 함께 있는 꼴이었다.
몬스터까지는 이 층에 있는 게 허용된다고 한다면 흑구와 온리베어도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단순하게 플레이어만 남는 걸로 따졌을 때는 의문점이 남았다.
조금 더 상세한 조건을 알아야만 했다.
"형님들, 플레이어만 남는다는 게 물리적으로 혼자 남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그렇다고 인지하는 겁니까?"
-응?
-글쎄.
-혼자 동료들이 안 보이는 곳까지 멀리 떨어져도 소용없기는 했어.
고천수의 물음에 시청자들이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냥 혼자만 살아남으면 이야기가 진행됐던 걸로 아는데.
정확한 조건은 시청자들도 알지 못했다.
"형님들, 그럴 때 다른 일행들은 100% 죽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상태였습니까?"
-응?
-아마도?
-상태가 죽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는디. 공격당해서.
순간 고천수는 숨을 삼켰다.
‘조건 혼란일 수 있다.’
게임을 하다 보면 가끔 있는 일이었다.
분명히 A가 조건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B였던 것. 다만 B가 A로 보일 만한 여지가 충분하기에 플레이어가 제대로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존재했다.
지금은 시청자들조차 조건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걸 시도해 볼 필요는 있었다.
"하령아."
고천수가 부르자 양민철에게서 칼을 빼고 부상을 치료 중이었던 김하령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수면제 가지고 있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김하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신가요?"
"대답부터 해 봐!"
고천수가 쏘아붙이자 김하령은 대답하기 어렵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한 통 가지고 있기는 해요. 주무시려고요?"
"어."
다만 자는 이는 고천수가 아니었다.
"그거 효과가 얼마면 나오는 거야?"
"제가 챙겨서 가지고 있는 건 병원 처방으로만 구할 수 있던 거라 한 10분 내외로 효과가 나와요."
"좋아."
고천수는 바로 김하령에게 요청했다.
"그거 지금 먹어."
그러면서 고천수는 일행들을 전부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인원한테 다 주고."
"네?"
김하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희는 죽은 거나 다름없게 되는데요."
좀비들이 나타나는 상황에서 얌전히 누워서 잔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김하령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자살행위만이 죽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고천수, 너 뭘 하려는 거야?"
제나에게 공격당한 것에 아직도 혼란이 남은 표정으로 장서연이 물었다.
"나 지금 뭐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혼란스러운 거 압니다."
하지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좀비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따라 주시죠. 잠에 들면, 제가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일행들은 잠시 조용해졌다. 한 차례 소란이 있었기에 일행들은 제각각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리고 잠시 뒤,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제나였다.
"제가, 먼저 먹겠습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이었는지 아니면 가장 빨리 나서고 싶었는지는 몰라도, 제나는 김하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하령은 그런 그녀를 슬쩍 보다가 고천수에게 시선을 향했다.
"줘."
제나가 장서연과 양민철을 공격했기 때문에 협조하고 싶지 않은 듯 보이기도 했지만, 김하령은 고천수의 지시를 어기지 않았다.
툭.
김하령이 알약 형태의 수면제를 얹어주자 제나는 물도 없이 그대로 삼켜 버렸다.
"나머지도."
고천수는 김하령을 재촉했다.
가급적 일행들이 같은 시간에 잠드는 게 유리했다. 조건을 빠르게 만족해야 일행들이 살 확률이 더 높을 테니까.
김하령은 수면제를 더 꺼내 나머지 일행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흑구도 포함이었다. 다만 작은 상태의 흑구는 그렇다 치고 고천수는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온리베어도 수면제가 먹히나?’
온리베어는 움직이기는 하지만 원형은 곰 인형이었다. 고민하고 있으려니 온리베어가 다가와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고개를 저었다.
"넌 신경 쓰지 말라고?"
고천수의 물음에 이번엔 온리베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리베어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온리원이 만든 도우미였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을 터였다.
"후."
마지막으로 수면제를 먹은 양민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못 일어나는 건 아니겠죠, 형."
붕대를 감은 팔을 감싸 쥐며 양민철이 힘든 표정을 지었다.
부상을 입은 상태라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고천수도 그 부담을 이해하긴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좀만 기다려."
고천수는 양민철에게 약속했다.
"다시 눈을 뜨면 모든 게 바뀌어 있을 테니까."
약효가 도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면제를 먹은 일행들은 곧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그 와중에도 좀비들은 계속해서 몰려들었다.
일행들을 한 곳에 모은 고천수는 온리베어와 함께 좀비들을 계속 상대해서 물리쳤다.
콱! 콰직! 콰악!
얼마나 좀비들을 깨부쉈을까.
일행들이 마침내, 전부 죽은 듯이 잠들었을 때였다.
화아아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추며 주변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
흑과 백.
마치 주변 배경이 도화지가 된 것처럼 새하얗게 바뀌고, 모든 존재가 검은 펜으로 그린 것처럼 변해 흑백의 대조를 이루었다.
자신이 밑그림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으며 흑과 백으로만 표현된 몸을 내려다보던 고천수가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방금 전까지 함께 싸우던 온리베어가 검은색 연기를 흩뿌리면서 서 있었다.
『축하한다.』
듣자마자 알았다.
처음 들어보는 음성인데도 불구하고.
『드디어 여기까지 올라왔구나, 고천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자 게임을 끝내 줄 마지막 보스.
『반갑다.』
온리원이었다.
"……."
계획은 성공했다.
시청자들이 정보에 혼란을 가지고 있을 거란 추측 하에, 일행들은 전부 잠재웠다.
일행들이 의식을 잃자 페이즈는 다음으로 진행되었다.
자신은 신경 쓰지 말라던 온리베어는 주변이 하얗게 질리자 그대로 다른 좀비들과 함께 활동을 멈추더니, 이렇게 고천수가 다시 만나기를 바라던 인물의 화신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만약 평범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면 고천수는 바로 준비 동작에 들어갔을 터.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그러지 못했다.
-안 죽여도 이렇게 되네.
-와.
-어느새 이렇게…….
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저마다의 감회를 표현했다. 고천수는 잠시 멍하니 화신을 바라보았다.
뭐라도 더 말할 줄 알았건만, 화신도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무표정이다 보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형님."
이곳에 오려고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했다.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됐네요."
『그렇군.』
짧게 대답한 화신은 곧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올라올 수 있을지는 몰랐다. 아무리 네가 플레이어라고 해도, 쉬운 난관은 아니었으니까.』
"네. 덕분에 물을 게 많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지영배를 통해 알게 된 것들, 고천수는 거기에 강력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고천수. 착각은 아직 금물이다.』
그 의문을 정리하려고 하는 와중에, 화신이 말했다.
『난 널 ‘만나서’ 반갑다고는 하지 않았어.』
꾸드드득.
멈춰 있던 것들이 아주 느리게 다시 움직임을 보였다.
방금 전까지 달려들던 좀비들이 일행들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선 것을 보며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형님?"
『너는 아직 나와 대등하게 대화할 만큼의 자격을 얻지 못했다. 지금 네 눈앞에 보이는 이 몸은, 계층 수호자로서의 내 분신일 뿐이지 내가 아니야.』
헛웃음이 나오게 하는 대사였다.
하지만 고천수는 웃지 않았다.
"예. 알고 있습니다."
아직 아이템이 남아 있었다.
그 말인 즉, 이 지긋지긋한 게임이 아직 클리어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이대로 끝날 거라는 어차피 생각도 안 했습니다."
온리베어가 뭔가 다음을 준비하듯 미심쩍은 모습을 보일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고천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떤 게임이든 마지막은 항상 장대한 법이었다.
온리베어가 온리원의 화신이 되어 버리는 것은 의외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끝을 맺기 전에, 한 가지 묻고 가지.』
화신은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일행들을 가리켰다.
『일행들을 포기한다면 네가 좀 유리할 수 있게 해 줄게.』
"형님."
고천수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또 선은 넘지 마십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고천수가 여기까지 오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일행들이었다. 혼자서 사는 것에 익숙한 고천수에게 동료애도 느끼게 해 준 이들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돼서 엮인 것이라고 해도, 그 관계가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온리원이 설정해 둔 극악한 조건 때문에 일행들이 떼로 죽을 뻔했을 때, 고천수는 그 사실을 확실히 가슴에 새겼다.
『천수, 조금 바뀐 것 같네.』
화신은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서 유아독존하는 게, 천수 타입 아니었나?』
"예, 그랬죠."
혼자서 지내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때는 그러했다. 온리원이 그걸 좋아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누구나 상황이 바뀌면 입장도 바뀌기 마련이었다.
"형님한테는 방송 하나 보고 직접 참여도 해 보는 것뿐이겠지만, 저한테는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 가는 사람답게, 매순간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느끼며 싸우는 것이 중요했다.
"반드시 깨겠습니다, 형님."
자존심 같은 건 없었다. 홀로 남아 영광을 누리는 것에도 관심 없었다. 지킬 건 지키고, 자신의 곁에 남기고 싶은 것에 흥미가 생겼을 뿐.
『그래, 좋아.』
화신은 몸을 풀며 말했다.
『네 세계를 지키고 싶다는 의지를, 밑바닥에서부터 확인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