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16화 (216/224)

216. 최상층 (2)

길은 어두웠다.

계속 걸어가도 맨눈으로 뭔가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일행들은 고천수의 안내에 의지해 앞을 걸어갔다.

불온한 정적이 주위를 감싸는 가운데, 양민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형, 정말 이쪽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고천수도 확실한 건 알지 못했다.

다만 채팅창을 사이에 두고 앞을 보자니, 선 하나가 보여서 그걸 따라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근데 진짜 오지게 안 보이긴 하네.

-넘어지면 뚝배기 언박싱.

-조심해. 아직 끝난 거 아님.

계속해서 올라오는 채팅을 봤을 때 아직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최상층에 다다랐다고 해서 그냥 끝은 아닌 듯했다.

"진짜 게임 한 번 끝내기 어렵네요, 형님들."

우여곡절을 거쳐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좀 마음 편하게 걸을 수 있게 해 줘도 되련만, 정말이지 이 장소를 만든 작자는 심보가 못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온리원은 안 보여.’

채팅창에서 온리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탱크를 타고 올라갈 때 미션을 함께 줬다고 추측되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도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맞이할 준비라도 하고 있나?’

뭐가 됐든지 간에 이 게임, 마이 엑시트의 주인은 온리원이었다. 이곳이 마지막 스테이지라고 한다면 그가 직접 대기하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화악.

그때였다.

갑자기 사방이 밝아지며 초원이 나타났다.

"……응?"

고천수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초원?"

초입 구간은 1층과 비슷했지만, 뒤는 달랐다.

발목 높이의 풀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언덕과 과일 나무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언덕과 계곡까지 있는 것을 바라보며 일행들은 숨을 삼켰다.

"여긴……."

"설마."

"낙원인가?"

낙원.

얼핏 보면 그렇게 보이는 곳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면 고천수 또한 이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했을지 몰랐다.

‘아냐.’

멈추지 않으면 계속해서 종말로 가는 세계에 낙원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고천수는 홀로 천천히 걸음을 더 옮겼다.

"계십니까아아아아!"

그리고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일행들이 갑자기 뭐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고천수는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계시냐고!!!"

외침이 메아리처럼 퍼져 나갔다.

고천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도착했는데 환영 인사가 없네."

-ㅋㅋㅋㅋㅋ

-어디 간 거 아니냐?

-누가 전화 좀 걸어 봐.

크아아아.

그때였다.

이런 장소에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나타난 것은.

"……어?"

좀비.

고천수는 전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크아아아아!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좀비는 일행들에게 달려들었다.

타앙!

장서연이 쏜 총을 맞고 좀비는 그대로 풀숲에 널브러졌다.

나머지는 그렇게 쓰러진 좀비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뭐야?"

"여기도 이놈들이 있는 거야?"

"농담하냐고!"

황당한 건 고천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형님들, 여기 최상층 아닙니까?"

-맞지.

-그렇다고 게임이 끝난 건 아니니까.

-여긴 오염된 정원 같은 거랄까.

오염된 정원.

고천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온리원 형님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정원에 있기는 할 거야.

-널 기다리고 있겠지.

-어서 가 봐.

기다리고 있다면서 이런 장난질을 해 놓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고천수는 품에서 도끼를 빼 들었다.

콱!

그리고 또 다시 나타난 다른 좀비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다들 정신 차리고 전진해! 얼마 안 남았어!"

풀에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잘 보니 바닥에 선이 아직 존재하고 있었다. 고천수는 일행들을 이끌고 그 선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왈……!

일행들 덕분에 탱크에서도 빠져나왔던 흑구는 어느새 기운을 차린 상태였다. 온리베어와 함께 주인을 보호하려는 듯 앞에서 움직이는 흑구를 보며 고천수는 헛웃음을 뱉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거의 다 왔으니까."

좀비는 다른 몬스터들에 비해서 상대하기 편한 대상이긴 했지만, 감염을 일으키는 종류의 몬스터라 귀찮은 부분도 존재했다.

끝까지 일행들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켜야 하는 만큼, 고천수는 온리원의 장난질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콰악!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또 한 마리의 좀비를 박살내며 장서연이 물었다.

"야, 천수야. 얼마나 더 가야 하냐?"

그녀의 표정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형, 좀 힘든데요, 이거."

"천수 님, 약간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저도요, 천수 님."

일행들이 점차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천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금방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던 온리원이 나타나지 않는 것에 그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조건이 있나?’

아직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나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게임에서 최종 보스를 나타나게 하는 의식을 치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니까.

"형님들, 혹시 조건이 있습니까?"

직접 묻지 않으면 스포일러 방지 때문에 대답을 못 할까 싶어 고천수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플레이어만.

그러자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보면 별 내용이 없는 것이긴 했지만, 고천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

고천수는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고작 이렇게 끝내려고 데려온 게 아니었다. 고천수는 채팅창에 시선을 돌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형님들? 저만 남아야 된다고요? 여태까지 아무런 얘기도 안 해 놓고!"

-여기까지 와서 네가 직접 묻기 전까진 대답할 수가 없게 되어 있었으니까.

-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했어?

-클리어에 실패해도 이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시청자들은 고천수에게 주고 있는 애정과는 별개로 냉정하게 답했다.

-최악. 최선. 둘 중 하나밖에 없어. 클리어하지 못하면 어차피 네가 원하는 결말은 없어.

모진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놓인 고천수를 조롱하는 건 아니었다.

시청자들은 오히려 선택을 도와주려는 듯 보였다.

고천수의 입장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제기랄."

욕지거리가 새어 나왔다.

차라리 온리원이 직접 나타나서 이런 조건이 있다, 라고 말해 주는 게 속 시원할지도 몰랐다.

크아아아!

좀비들은 시간차를 두고 한도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고천수의 어그로 스킬을 방지하는 것처럼 일부러 조금씩 나타나고 있어서 일행들은 점차 체력만 잃어 갈 뿐이었다.

"고천수!"

장서연이 소리쳤다.

고천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아, 진짜 시발.’

자신의 체력이라도 보존하려면 직접 동료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딴 건 아무리 고천수라도 냅다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천수 님."

그때, 제나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

제나의 얼굴을 보니 고천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걸 그녀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시길.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지.

"흑구야!"

결국 고천수는 그녀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흑구를 불렀다.

왈!

"아직 기운은 있지?"

흑구는 이미 주인을 위해 한 번 희생을 했었다. 또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이 일을 맡길 적임자인 것은 분명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 다 데리고, 우리가 올라왔던 그 길로 뛸 수 있어?"

주변이 무너지기는 했지만, 흑구가 대형화해 멀리 뛸 수만 있다면 다시 그 길을 붙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성공한다고 해도 내려가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일단 고천수는 억지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나만 빼고 다시 내려가야 돼.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거야."

고천수의 말에 흑구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했다.

"……그냥 그럴 수 있는지만 알려 줘 봐."

"천수 님."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제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저희는 천수 님과 함께 목적지로 갈 수 없는 상태입니까?"

역시 제나는 이런 상황에서의 통찰력이 뛰어났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다가 어렵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렇군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탑의 끝에 오르길 바랐던 사람치고는 차분한 태도였다.

"그렇게 된 거군요."

제나의 눈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주춤거렸다.

"뭘 하려는 거지?"

"천수 님, 저는 여기까지 온 걸로 됐습니다."

제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녀가 무언가를 결정한 것만 같아 고천수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대체, 뭘……."

"믿어 주신 덕분에 제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원수로 삼았던 이도 처단할 기회도 주셨죠. 하지만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한심하게도."

순간의 망설임을 가졌던 제나는, 고천수에 대한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체력까지 너무 빠진 탓일까, 그녀는 혼이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저한테 맡겨 주세요. 더 이상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절대로, 다시는."

"뭐? 자, 잠깐!"

"천수 님, 부디 저를 기억에 남겨 주시길."

말릴 틈은 없었다.

제나는 일행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콰악!

그러고 가장 먼저 붙잡은 건 장서연의 목이었다.

"큭……?!"

놀란 장서연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제나!"

고천수가 외치는 사이, 장서연은 반사적으로 제나에게 대항하기 위해 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행동을 결정하고 있던 제나가 더 빨랐다.

그녀는 능력을 통해 시야를 확인하고 장서연을 좀비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좀비는 그대로 장서연을 붙잡았다.

까득!

위협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결과는 극적. 간신히 몸을 돌린 장서연이 좀비가 으득거린 이빨을 간신히 피해낸 것을 보며, 고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

그가 새된 목소리를 뱉는 사이, 제나에게 달려든 건 양민철이었다.

"뭐 하는 거야!"

예상치 못하게 일어난 일에 분노한 양민철이 제나를 붙잡고 바닥에 엎어졌다.

살아난 장서연은 좀비를 발로 차내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아!"

김하령이 그런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장서연의 어깨를 붙잡고 횡설수설했다.

"부상 있어요? 물린 데는? 감염은?"

정말 이게 눈앞에서 벌어진 일일까.

고천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채팅창에 뭐라고 여러 가지 말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는 장서연의 뒤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쪽에서 몸을 다시 일으키고 있는 좀비를 발로 차고 도끼로 머리를 찍어 버렸다.

콰직!

좀비의 머리가 맥없이 터졌다.

그 소리에 이명이 도는 느낌을 겨우 외면하며, 고천수는 고개를 돌렸다.

양민철과 제나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고천수는 둘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서둘러 둘을 붙잡고 떼어냈을 때였다.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크, 헉."

양민철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거기에는 칼이 하나 꽂혀 있었다.

"민철아……?"

고천수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친 듯이 돌아가는 광경에 고천수는 확실히 충격을 받아버렸다.

-아유, 이렇게 될 것 같았다.

-또 버려지느니 과잉 충성으로 치닫는 게 제나 멘탈이긴 하다만.

-차라리 잘됐어.

상황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보며 시청자들이 말했다.

-천수도 이제 종말이 뭔지 알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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