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12화 (212/224)

212. 9%로 100% (2)

"밥 달라고 이러는 거냐?"

고천수의 말에 흑구는 몸을 멈칫했다.

그러고서는 올려다보는 표정은, 어이가 없는 걸 떠나서 황당하다는 마음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얼른 뛰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니까."

고천수는 흑구의 엉덩이를 밀며 걸음을 옮겼다.

‘자식이, 진짜.’

구덩이로 향하면서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흑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천수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당황했기에 딴짓하듯 반응한 것뿐이었다.

‘아직은 안 돼.’

흑구는 자신의 희생을 바라고 있었다.

주인의 위기를 직감한 것일까. 정체불명의 몬스터들이 사방에서 몰려오는 상황에서 고천수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피난.

그게 고천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천수 님! 어서!"

구덩이 입구 앞에서 제나가 크게 소리쳤다.

고천수는 옆으로 다가온 흑구를 끌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모두가 안에 들어온 것을 확인한 고천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입구를 막을 것이 필요했다.

마침 온리베어가 가리킨 곳에 폐차된 차들이 모여 있었다. 고천수는 온리베어에게 대형화를 명령하고 입구를 막게 했다.

쿵.

입구는 금세 막혔다.

사방이 어두워진 상황에서 몬스터 군단이 몰려오는 소리만이 폭풍 속의 파도처럼 울려 퍼졌다.

"……형, 이거 괜찮을까요?"

소리만으로도 심상찮은 상황이라고 느꼈는지, 양민철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기다려 봐."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던 고천수는 짧게 답변하며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몬스터 군단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곧 뭔가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자 고천수는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쿵!

마침내 군단의 일부가 구덩이를 감싸고 있는 쓰레기 더미에 몸을 박았다.

쿵! 쾅! 콰앙!

쓰레기 더미가 흔들렸다. 손전등을 켜고 옅은 빛에 의지하고 있던 일행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콰콰! 콰아아앙!

충돌이 더욱 거세졌다. 쓰레기 더미의 천장에서는 잔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오래는 못 있을 것 같군."

구석에 있던 방찬혁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천수는 총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총 하나 들었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잔해가 사방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제기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당장 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보급함이 있다면 온리베어가 찾아냈을 텐데, 그런 일도 없었다.

물론 있어도 열 수 있는 젠도 없었다. 고천수는 잔해를 피해 구덩이 안쪽으로 더 걸음을 옮겼다.

쿠구구구.

하지만 쓰레기 더미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쓰레기 더미가 붕괴하면 모두가 매몰될 수 있었다.

꾸욱.

고천수는 품 안에 가지고 있는, 드릴 모양의 젤리 아이템을 떠올렸다.

돈 한 푼 주지 않고 보급함을 열어서 가져왔던 것으로 현재 고천수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었다.

‘물에 불려서 사용하라고 되어 있었지.’

어느 정도의 물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일행들은 먹을 물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사용한다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몰랐다.

‘아니야.’

무자본으로 구한 아이템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탑을 정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젠이 없더라도 습득을 했어야만 했다는 소리니까.

‘그럼…….’

당장 생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천수는 이 탑의 정상까지 올라야만 했다. 잠깐 목숨을 부지하자고 모든 걸 수포로 만드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왈!

흑구가 다가와 짖어 보였다.

천장에서 잔해들이 떨어지는 상황이 심각하게 느껴졌는지, 흑구는 계속해서 짖어대고 있었다.

"흑구야."

고천수는 결국 흑구를 불러 말했다.

"준비는 해야겠다."

몬스터들이 그냥 지나가 주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흑구는 바로 그걸 원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수 님! 무너질 것 같습니다!"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는 없다고 여긴 건지 제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고천수도 계속 일행들에게 머무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젠 여기서 나가야만 했다.

"안 되겠다! 다들 나가야겠어!"

"어디로!"

뛰어가려는 고천수의 어깨를 장서연이 붙잡았다.

"이대로 나가면 바로 죽을지도 몰라!"

"제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일행들이나 챙겨 주세요! 흑구! 온리베어!"

고천수는 두 몬스터를 대동하고 입구로 향했다. 대형화를 마친 두 몬스터는 입구를 막고 있는 것들 치워내기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가 이미 잔뜩 짓눌려 있기에 입구에 있던 것들도 꽉 서로 맞물려 있던 상태였다. 두 몬스터는 쓰레기 더미가 완전히 주저앉기 직전이 되어서야 입구를 열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도마뱀처럼 생긴 3m 가량의 몬스터였다.

콰득!

온리베어가 먼저 손톱으로 그 몬스터를 찍으며 밀고 나갔다. 고천수는 뒤의 일행들을 보며 소리쳤다.

"다들 얼른 나와!"

쿵! 쿠웅!

쓰레기 더미 위에는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있었다.

그 몬스터들의 무게에 짓눌린 것일까, 쓰레기 더미는 그대로 주저앉고 있었다.

쿠우웅!

그리고 마침내 쓰레기 더미가 밑으로 다 꺼진 순간, 고천수 일행들은 구사일생으로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그로 45 - 09:45

쓰레기 더미가 무너진 직후, 고천수는 자신에게 쏠린 어그로 숫자를 확인했다.

"이런, 미친."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온리베어가 고천수의 앞을 가로막고 그 몬스터들을 처치했다.

크아아아!

물론 너무 많은 숫자였다. 자신에게 도달한 도마뱀 모양의 몬스터를 움켜쥐며 고천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무거워!’

이 정도의 어그로를 확보했는데도 밀리고 있었다. 고천수는 뒤로 몸이 밀렸지만, 이내 수십의 어그로를 더 확보하면서 도마뱀을 던져버릴 수 있었다.

크아아아!

쿠우우우우!

크아아아아!

몬스터의 수는 수백이 아니었다. 저 멀리까지 보이는 몬스터들은 어림잡아도 수천은 되어 보였다.

고천수는 어그로에 의지해 몬스터들과 싸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도마뱀 하나만 붙잡아 봐도 알 수 있었다. 한 개체의 파워가 너무 강한 녀석들이었다.

‘수만 퍼센트면 가능할까?’

한 번에 모든 어그로를 끌 수 있다면 상대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당장은 이쪽으로 방향을 잡고 몰려오는 것일 뿐, 자기들끼리 서로 치이고 치이는 상태라 이쪽에서 모두 도발해 버리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도발에 성공한다고 해도 어그로 스킬이 초기화되는 순간이 문제였다.

어그로 수치가 곧바로 높게 잡히지 않는다면, 고천수의 미래는 핏빛으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왈!

그래서 흑구가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미끼를 사용하라고.

"망할."

미끼가 된다고 쳐도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

꾸득.

하지만 이제 고천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광견(狂犬), 으로 교체."

고천수는 흑구의 스킬을 변경했다.

"흑구야, 꼭 살아남길 바란다."

키이이이잉!

변경한 스킬을 발동하자 흑구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고천수는 일행들을 데리고 흑구에게서 떨어졌다.

크르르르르르!

흑구의 털이 가시처럼 치솟았다. 송곳니 또한 잔뜩 벼린 칼날처럼 더욱 날카롭게 자라났다.

크아아아아!

울부짖는 소리는 가히 지평선 너머까지 뻗어나갈 정도였다. 그 때문에 사방에서 몰려오는 몬스터들이 전부 흑구를 주목하게 됐다.

꾸우우우!

끼갸갸갸!

고우우우우!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흑구에게 달려들었다.

흑구는 앞발을 뻗어 가장 먼저 달려온 녀석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주둥이를 벌려 그 다음 녀석의 목을 뜯어 버렸다.

포악해진 흑구는 제자리에서 날뛰며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고천수는 그런 흑구를 잠시 바라본 뒤, 일행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뛰어갔다.

흑구가 미끼가 되어 준 덕분에 몬스터들의 위협은 좀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예 길을 틀 수 있던 건 아니었다. 고천수는 수십씩 따라붙는 몬스터들을 온리베어와 함께 상대하면서 숨을 삼켰다.

‘피할, 장소가……!’

흑구가 이목을 끌어 줘도 피할 곳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고천수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고천수!’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을 터였다.

조금만 침착할 수 있다면, 타개책을 찾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고천수는 쓰레기 더미들마다 붙여져 있는 시간을 확인했다.

"저기로!"

고천수는 일행들을 이끌고 근처에 있는 한 쓰레기 더미로 달려갔다. 몬스터들 또한 그런 그들을 잡으려고 뒤에서 따라왔다.

"빨리빨리!"

고천수는 온리베어에게 일행들을 태울 것을 지시하고 가능한 빠르게 쓰레기 더미를 가로질러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쿠웅!

고천수 일행이 통과하자마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쓰레기 더미가 바닥으로 주저앉아 버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쓰레기 더미는 압축 프레스에 짓눌린 것처럼 구겨져 버렸다.

남은 수명 - 00:00

정크 야드의 세계관에서 쓰레기 더미는 곧 사라질 찌꺼기들이었다.

보이지 않는 프레스들이 쓰레기 더미들을 누르고 돌아다니는 설정이 있는데, 원래는 알기 쉽지 않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천수는 쓰레기 더미들에게 남은 시간을 알 수 있었다.

그게 프레스가 눌리는 시간과 동일할 거라는 걸 깨달은 고천수가 일행들을 데리고 계속 몬스터들을 함정으로 유도했다.

쿵! 콰앙!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원래 이곳을 이런 식으로 벗어나게끔 설계되어 있는 건지는 몰라도 고천수는 차례차례 소멸 예정인 쓰레기 더미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뒤따라오던 몬스터들은 그 쓰레기 더미들과 운명을 함께하며 버려진 캔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헉……!"

고천수는 짓눌린 몬스터들 너머, 혼자서 엄청난 싸움을 지속하고 있는 흑구를 바라보았다.

흑구 덕분에 뒤따라오는 몬스터들의 숫자를 줄일 수 있었지만, 거꾸로 얘기하면 흑구는 지금 엄청난 공세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광견 스킬이 풀린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애초에 한 번 쓰면 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녀석을 도와줄 지시를 내릴 수도 없어서 쓰지 않았던 스킬이었다.

겨우 이렇게 소진시키려고 했던 게 아니건만, 고천수는 자신의 능력 부족이 느껴져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망할……!"

어차피 탑을 다 오르면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만 고천수는 순간 엄습하는 불안감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만약 오르지 못할 경우를 떠올리면 말이다.

"아니야!"

고천수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반드시 해낸다!"

설문 결과.

사라진 시청자들의 겨우 9%만이 고천수를 지지한다고 해도, 고천수는 이대로 꺾일 생각이 없었다.

쿵! 쿠웅!

그런 고천수를 비웃듯 하늘에서 다른 대기 유성들이 추락을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멀리서 흑구의 괴로운 괴성이 울려퍼졌다.

이곳에 있는 일행들은 총과 칼을 들고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발악했다. 방패막이 되어 준 온리베어가 몸에 수많은 부상을 입고 휘청거렸다.

"나!"

고천수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끝까지 간다!"

플레이어가 할 수 있는 일은 좌절이 아니었다. 한순간의 타이밍, 어떻게든 발악했을 때 일어나는 기적, 모든 확률에 기대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버틴 이에게 벌어지는 사건.

모든 지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데도 본분을 다한 자에게 주어지는 영광.

-역시 우리 천수네.

-많이 기다렸나?

-우리도 이제야 준비가 끝났다.

이 남자의 방송이,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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