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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10화 (210/224)

210. 설문 (2)

파란색과 빨간색.

원형의 그래프 안에 각기 다른 색으로 나뉘어 표시되어 있는 두 개의 면을 발견하고 고천수는 숨을 삼켰다.

"뭐야, 이거."

그래프 상단에는 ‘고천수를 구할 의지가 있는가?’라는 문구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

고천수는 다시 원형의 그래프를 살폈다.

먼저 파란색 면부터였다.

파란색 면은 작았다. 숫자는 9%로 표시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구할 의지가 있다.’라는 문구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빨간색 면은 어떨까.

표기되어있는 숫자는 91%로, ‘구할 의지가 없다.’라는 문구가 함께 존재했다.

즉, 결론은 이러했다.

9%로만이 고천수를 구할 의지가 있고, 나머지 91%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천수 님?"

얼굴이 굳은 고천수의 곁에서 제나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한테 물은 거야.’

대신 고민에 잠겼다. 설문이 누구를 대상으로 했는지가 결과지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탓이었다.

‘설마…….’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로 따지면 고천수는 절망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천수 님, 무슨 문제라도……."

제나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며 고천수는 일단 종이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내용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지만,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일행을 계속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신경 쓰지 마라, 제나. 별일 아니니까."

"정말이십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라면……."

"없어. 있으면 너한테 말하고 부탁할게."

대화를 일방적으로 정리한 고천수가 팔을 내밀며 다시 입을 열었다.

"흑구, 온리베어. 주차장에 좀 다녀와라."

고천수는 흑구와 온리베어에게 주차장에 쓸 만한 차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먼저 주문했다.

"키가 있거나 키가 여기 있을 법한 차만 보고 오면 돼. 믿고 맡겨도 되겠지?"

두 몬스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평소의 콤비로 돌아갔다. 이내 온리베어를 목에 태운 흑구가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저희는 그동안 소지품 점검을 하도록 하죠."

"고천수, 우리 안에 들어가서 차 키는 안 찾아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장서연의 물음에 고천수는 즉답했다.

"차 키가 필요한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괜히 먼저 수색할 필요는 없습니다. 페이크맨에게 걸릴 위험은 최소화하는 게 좋으니까 잠시만 찾아 주세요."

페이크맨에게 한 명이 처참하게 당해서인지 장서연을 비롯해서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고천수는 손짓을 해 일행들이 가방을 늘어놓게 했다.

바지 주머니까지 뒤져서 내놓은 일행들의 소지품은 탄약과 식량, 물이 대부분이었다.

총알은 60개, 식량은 이 인원으로 이틀 정도 버틸 수 있는 양, 물은 5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각하네.’

이 마트에서 식량과 식수는 채워 넣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도 없었다. 먹어 봤자 식인 페이크맨처럼 변하기나 할 테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소지영이 갑작스럽게 당한 탓에 경황이 없었는지, 장서연이 먹었던 젤리를 제외하고는 일행들이 마트에서 위험한 식료품을 챙기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탄약은 재분배하겠습니다."

고천수는 심하문 일병의 소총을 받았다. 그러고는 총알을 12발씩 돌아가게 해 심하문과 방찬혁을 제외하고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에게 분배하고, 다들 다시 소지품을 챙기도록 했다.

왈!

소지품을 챙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구와 온리베어가 돌아왔다.

흑구는 필요한 차를 발견했다는 듯 위아래로 둠칫거리며 고개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고천수는 총을 장전하며 말했다.

"좋아, 어디에 있는지 안내해."

***

주차장 4층.

흑구와 온리베어가 발견한 차는 승합차였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근처 주차장에 있던 9인승의 승합차는 마트에서 쓰는 차량도 아니었다. 안전벨트를 한 채 운전석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페이크맨을 보며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천수 님, 쏴 버릴까요?"

"잠깐."

고천수는 제나를 말리며 페이크맨을 잠시 살펴보았다.

"민철아, 손전등."

야외 주차장이라고는 해도 승합차의 운전석 쪽은 천장 구조물로 인해 음영이 져 있었다. 양민철은 고천수의 손짓을 따라 손전등으로 그런 운전석을 비춰 보았다.

"형, 이건……!"

그림자가 이상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페이크맨은 그림자가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후."

그걸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러맨이네."

에러맨은 페이크맨의 변형으로, 돌발 행동을 일삼는 녀석이었다. 일반 페이크맨과 다른 신체를 가지고 있어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에 쉽게 건들면 안 됐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냥 건들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다른 차는 없었어?"

고천수의 물음에 흑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온리베어도 두 팔을 들어 엑스자를 그려 보였다.

둘이 다른 차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남은 수명 - 08:25

이 건물에 붙어 있는 수명은 이제 고작 8분 남짓이었다. 다른 차를 찾다가 시간을 많이 소모하게 될 경우 당연히 위험했다.

"형, 어떻게 하죠?"

양민철이 아직 가만히 있는 에러맨을 총구로 가리키며 물었다.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에러맨도 기본형은 페이크맨일 뿐.’

에러맨이 일으키는 일에는 워낙 여러 가지가 있기는 하지만, 뭘 하든 생물체를 쫓아서 잡기 직전이거나 잡은 다음에 저지른다는 특징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생물체에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포함됐다. 흑구와 온리베어도 에러맨에게는 붙잡고 늘어질 대상이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그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에러맨이 저지를 수 있는 일 중에 가장 위험한 짓이 자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대할 때 좀 더 신중을 기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건 고천수가 제격이었다.

"다들 물러나 계시길. 절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고천수는 총을 돌려 메고 운전석에 가까이 갔다. 일행들이 놀라며 다가서려고 했지만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러나라고 또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일행들이 주춤하며 뒤로 멀리 물러섰다. 그사이 고천수는 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에러맨은 페이크맨보다 속도가 빠르다. 한 번에 완벽하게 일을 끝마쳐야만 했다.

딸깍.

고천수가 에러맨의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그러자 일어난 일은, 당연하게도 고천수의 예상대로였다.

"아."

에러맨은 짧게 신음을 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그렇게 두 눈을 부릅뜨자마자 고천수를 노려보았다.

어그로 1 - 10:00

도발이 걸렸다.

고천수는 바로 뒤돌아섰다.

"잠깐만, 잠깐만잠깐만잠깐만."

에러맨이 몸을 일으키며 고천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천수는 그런 에러맨을 피해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나 왜 여기에? 응? 왜 여기에?"

에러맨은 이미 정신이 무너진 존재였다. 눈을 뜨자마자 기괴하게 몸을 비틀며 달려오는 에러맨의 모습을 확인한 고천수는 크게 숨을 삼켰다.

‘겁나 징그럽게 따라붙네!’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에러맨은 색깔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걸 보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시바! 자폭……!’

지이이잉!

에러맨의 몸이 더 빠르게 달아올랐다. 속도 또한 더욱 빨라진 에러맨이 고천수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다.

"형!"

"고천수!"

"천수 님!"

에러맨이 고천수를 붙잡으려는 순간, 일행들이 각기 목소리로 황급하게 외쳤다.

휘익!

하지만 에러맨의 손은 아무것도 없는 곳을 저었다.

고천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던지면서, 따라 뛰었다가 몸뚱어리 전체가 허공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아니야아아아아아아……."

에러맨은 기괴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난간 밖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고천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폭발을 가동하고 멈추지 못한 에러맨이 만든 충격이 허공을 휩쓸었다.

"혀, 혀엉!"

먼지가 주변을 뒤덮는 것을 보고 얼굴을 가리며 양민철이 소리쳤다.

쿠구구구.

진동으로 사방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양민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형! 혀엉!"

먼지가 가라앉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양손을 와이퍼처럼 써서 내저으며 걸음을 옮긴 양민철은 난간을 쳐다봤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손이 있었다.

난간을 붙잡고 있는 손이 있던 것이다.

"형!"

양민철은 빠르게 달려가 난간을 붙잡고 있는 이를 확인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그건 다름 아닌 고천수였다.

"……죽다 살았네. 그치?"

위를 올려다보며 고천수가 하는 말에 양민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 농담이 나와요?"

"왜.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면서."

고천수는 난간을 붙잡고 올라오며 헛웃음을 뱉었다.

"설마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은 안 해도 간 떨어진다고요."

양민철은 뒤따라온 다른 일행들도 가리켰다.

"다들 표정 보이죠? 형은 우리한테 중요한 인물이니까, 좀 더 본인을 소중하게 다뤄 주세요."

"오늘따라 더 뭐라 하는 느낌인데?"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한 번 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고천수를 보고 있는 양민철은 한숨을 흘릴 뿐이었다.

‘하여간에, 이 형은…….’

고천수가 살아남을 거라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고천수는 이런 일로 쉽게 나가떨어질 이는 아니니까.

다만 고천수를 잘 알고 있는 양민철은 잠깐의 불안감을 엿본 것뿐이었다.

고천수의 얼굴에 서려 있는 불안감을.

"차는 확보했으니까 얼른 가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양민철의 어깨를 두드리며, 고천수는 승합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치도 빠르네.’

고천수는 양민철이 자신에게서 뭔가 불안감을 엿본 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천수는 실제로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달려가는 순간 양민철에게 보여서는 안 될 표정을 보였던 것이다.

‘역시 신경 쓰여.’

설문 결과지에 적혀있던 91%의 견해.

고천수를 구할 의지가 없다로 모아진 의견의 수치.

여태까지 잘해 왔다고 생각했건만, 고천수는 솔직히 말해서 그 수치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망할 시청자들 같으니.’

그리고 그런 의견을 낸 게 누구인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천수는 이 설문에 답을 한 것이 시청자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할 존재들도 없었다.

고천수를 구할 의지가 있는 건 9%뿐이었다.

채팅하던 인원들뿐만 아니라 대기 시청자들까지 포함된 수치라면 인원도 얼마 되지 않았다. 후원까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마당에 이런 설문 결과까지 있다면 고천수로서는 과연 무엇을 생각해야만 하겠는가.

"다들 타고, 심하문 일병 님이 운전하세요."

고천수는 방찬혁을 조수석에 태웠다. 그리고 나머지와 함께 뒷자리에 차례대로 탑승했다.

부우우웅.

오래잖아 차가 출발했다.

주차장을 다 내려온 차는 곧바로 모래사장 너머의 황량한 길을 내달렸다.

"저쪽으로."

방찬혁의 안내를 받으며 승합차는 여러 잔해 건물들 사이를 내달렸다. 고천수는 밖을 내다보며 한숨을 흘렸다.

‘어쩔 수 없어.’

팬으로 붙은 시청자들이 별로 없다고 해도, 이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쿠구궁.

이제 곧 대기 유성들이 떠 있는 지역이었다.

고천수는 하늘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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