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설문 (1)
쿠구구.
방찬혁을 데리고 온 온리베어와 함께 고천수는 마트 건물의 잔해로 향했다.
쿠구구구.
마트 건물은 곧 무너질 것처럼 진동하고 있었다.
"여기, 들어가도 되는 건가?"
방찬혁의 물음에 고천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비게이션이 나한테 그걸 물으면 되나? 걱정 마."
고천수는 마트 건물 잔해의 수명을 보고 있었다.
남은 시간 - 35:47
아직은 무너질 일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가자고."
"나도 가나?"
"가는 게 좋을걸."
방찬혁은 부상 정도가 심했다. 애초에 고천수가 그를 계속 살려 둘 생각까지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깐의 시간이기는 하지만 함께 가려면 응급 처치 정도는 필요했다. 그리고 이 마트 안에는 그걸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내가 데리고 있던 녀석 중에 널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 꼴로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죽으면 내가 손해니까. 알겠으면 따라와."
고천수가 먼저 들어가자 작아진 온리베어와 방찬혁이 천천히 뒤를 쫓아왔다. 고천수는 천천히 내부를 살펴보았다.
‘이쪽으로 갔나.’
발자국이 이곳에도 있었다. 고천수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식료품 코너였다.
콰당탕!
아직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고천수는 살짝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
누구 있냐고 외쳐 묻지는 않았다.
눈치는 있는지 방찬혁과 온리베어도 조용히 서 있는 상태였다.
쿠당탕! 쿠당!
주변 진열장이 요란하게 넘어갔다.
아무리 봐도 일행들이 저지를 만한 일은 아니었다.
"후."
고천수는 가지고 있던 도끼를 치켜들었다. 총알을 다 소모하고 기능 고장까지 걸린 총은 그냥 버리고 왔다. 이제 남은 무기는 이것뿐이었다.
스윽.
그렇게 고천수가 조심스레 진열장이 넘어진 쪽을 바라봤을 때였다.
‘……?’
웬 남자 한 명이 진열장에서 떨어진 과자 봉투를 열고 내용물을 마구 끄집어 먹고 있었다.
‘뭐지?’
고천수는 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행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란 걸 알아챈 고천수가 숨을 삼켰다.
‘페이크맨……!’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는 마치 걸신이 들린 듯 보였다.
"뭐지?"
"쉿."
다가와 묻는 방찬혁에게 고천수는 검지를 들어 보였다.
‘여기, 평범한 마트는 아니야.’
저주 걸린 마트.
안에 있는 음식을 한 번 먹고 30분 뒤 소화가 완료되면 걸신이 들려 버린다는 설정의 게임이었다. 어쩌다 이곳의 음식을 먹은 페이크맨도 그 설정에 구속되어 버린 듯했다.
‘좀 짜증나게 됐네.’
안 그래도 페이크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귀찮은데, 그 페이크맨이 걸신까지 들리게 됐다. 걸신이 들리면 뭔가를 뜯어먹는 능력이 급상승하기 때문에 사실상 좀비보다 위험하다고 할 수 있었다.
걸신들린 페이크맨은 못 먹는 게 없는 미친 좀비나 다름없었다.
툭.
방찬혁이 고천수의 어깨를 살짝 치며 바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입구에서부터 이어진 발자국이 더 있었다.
일행들은 이곳을 지나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간 듯했다.
‘오케이.’
고천수는 눈짓하며 방찬혁, 온리베어와 함께 조심스레 앞으로 움직였다.
콰당탕! 쾅!
주변에는 진열장이 넘어지는 소리가 여럿 들렸다. 페이크맨이 이미 상당수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계속해서 조용히 이동해야 했지만, 고천수는 몸을 흠칫하며 멈춰 섰다.
눈앞에 잔뜩 뜯어진 시체 한 구가 놓여 있었다.
‘소지영?’
거의 뼈밖에 없어서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군복 이름표가 남아 있었다.
일행은 확실히 이곳을 지나갔다.
고천수는 숨을 삼키며 계속 걸어갔다.
덥썩!
그리고 이내 일행들과 만날 수 있었다.
"형."
고천수를 잡아서 비상구 쪽으로 끌어당긴 이는, 다름 아닌 양민철이었다.
"무사했네요."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 양민철은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올라가서 설명할게요. 일단 위로……."
말을 하던 양민철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시선은 고천수를 따라 나타난 방찬혁에게 가 있었다.
탁!
순간 반사적으로 방찬혁에게 달려들려는 양민철을 고천수가 붙잡았다.
"기다려. 나도 위에서 설명해 줄 테니까."
***
위로 올라가자 대기 중이던 다른 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천수 님!"
제나가 가까이 다가오며 외쳤다.
"오셨군요!"
그녀 외에도 다들 옆으로 다가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살아 있을 줄 알았지."
"좀 더 늦게 만날 줄 알았는데, 다행이에요."
"천수 님, 저희 한 명이 당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고천수는 먼저 이 질문부터 던져야 했다.
"인사도 좋지만 이것부터 묻죠. 혹시 여기에 있는 음식을 먹은 사람 있습니까?"
"음식, 말입니까? 먹지는 않았는데 여기 몇 개 가지고는……."
타악!
심하문 일병이 들어 올린 통조림 캔들을 빼앗은 고천수가, 그걸 그대로 다른 곳에 던져 버렸다.
"먹지 마세요. 여기에 있는 건 위험하니까, 원래 들고 있던 것만 드세요."
"아, 제기랄."
그러자 장서연이 목을 부여잡으며 사색이 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방금 전에 먹은 거 하나 있는데."
"예?"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먹었는데요."
"젤리 1개. 먹어보니 맛없어서 더 안 먹긴 했는데……."
"토하세요."
더 들을 것도 없었다.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멀쩡한 걸 보니 괜찮아요. 더 늦기 전에 뱉어내세요."
"아니, 어떻게…… 웨엑!"
그때였다. 지켜보고 있던 김하령이 나무 막대 같은 것을 순간 장서연의 목 안으로 집어넣었다가 뺐다.
그게 효과를 본 것일까. 구역질을 시작한 장서연의 목을 김하령이 한 번 더 자극했다.
"우웩! 우웨엑!"
차마 눈 뜨고 보고 있을 수 없는 광경에 다들 눈을 돌리던 때였다.
온리베어와 함께 나타난 방찬혁이,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뭣……!"
갑작스러운 디엔드 교주의 등장에 심하문 일병이 총구부터 들어 올렸다.
"잠깐!"
고천수는 바로 그 총을 붙잡아 내렸다.
"쏘지 마세요."
"천수 님?"
제나가 주춤하며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일행들은 방찬혁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썩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군."
방찬혁은 일행들 앞으로 천천히 다가서며 말했다.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들 긴장할 건 전혀 없다."
그러면서 방찬혁은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미 고천수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은 할 수 없지."
그의 망가진 두 팔을 바라보면서도 일행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결국 분위기를 푸는 것 또한 고천수의 몫이었다.
"그 말대로다."
고천수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방찬혁은 필요에 의해서 내가 데려온 것뿐이다. 그렇게 날 서게 반응할 필요는 없어."
"하, 하지만……."
"제나."
고천수는 걱정하는 표정을 짓는 제나를 안심시켰다.
"언제 내가 쓸모없는 짓을 한 적이 있나?"
그 말에 제나는 입을 다물었다.
제나가 가만히 있자 다른 이들도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경계하는 표정은 남아 있었기에,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관리는 온리베어가 해 줄 겁니다. 이쪽 얘기부터 전해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음."
"방찬혁은 포로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좀 편할 겁니다."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그 말에 조금 납득이 된 것인지 심하문 일병이 먼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그럼 천수 님, 보고 드리겠습니다. 혹시 올라오시면서 소지영 일병의 시체를 보셨습니까?"
"봤습니다."
"페이크맨에게 당했습니다."
그 상황을 다시 생각하기 고통스럽다는 듯 심하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위험한 곳이란 건 알았지만, 그대로 나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유라도 있습니까?"
"주차장 때문이었습니다."
심하문은 예전에 고천수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천수 님께서 특정한 공간에 움직일 수 있는 차가 있다고 하셨던 게 기억났습니다. 마침 밖에서 보니까 이 건물에 주차장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 말대로였다.
이 건물은 외부에 노출된 주차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거기에 주차돼 있는 차도 있었다.
"마트에서 쓰는 차도 있으니까, 혹시 차 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걸어서 이동할 수는 없어서 여기서 찾기로 한 겁니다."
"그랬군요."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다음 지대까지의 거리가 가깝지 않을 경우, 어딘가에 탈 수 있는 이동 수단이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이 마트 건물에서 보이는 폐허가 된 시가지는 꽤 먼 곳에 있었다. 방찬혁도 아직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건, 그 시가지까지는 뭔가를 타고 가야만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방찬혁. 밖에서 봤던 그 시가지에 가면 안내할 수 있는 길이 있나?"
"있긴 있지."
질문하자 방찬혁이 짧게 단답했다.
고천수는 다시 질문했다.
"차가 있다면 길이 달라지나?"
"그래. 더 안전하게 갈 수 있다."
그렇다면 정해졌다.
고천수는 젤리를 게워낸 장서연의 등을 두드려 주고 있는 김하령에게 향했다.
"하령아, 부탁 하나만 하자."
"아, 네. 말씀만 하세요, 천수 님. 그리고 여기 젤리 확실히 나왔어요. 소화가 전혀 안 됐는지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데 한번 보시……."
"그건 됐고."
고천수는 김하령을 만류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에 있는 저 녀석, 당장은 문제없을 정도로만 응급조치해 줘."
그 말에 김하령이 방찬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
"알아. 솔직히 별로 반갑지는 않을 놈을 데려왔지."
하지만 방찬혁은 플레이어인 고천수의 입장에서만 더 받아들이기 쉬운 존재였다.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이 건물만 해도 채 30분 남짓한 시간만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세계는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능한 빨리 움직이는 것만이 답이었다.
"그래도 네가 내 말대로 해 주면 내 입장에서는 고마울 거야. 필요한 놈이니까."
다행히도 김하령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논리적인 설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고천수의 말에 김하령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바로 방찬혁에게 향했다. 다만 제나는 그렇지 못한지 고천수의 곁에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
"천수 님, 잠시 얘기를……."
고천수는 그녀를 붙잡고 둘만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랑 한 약속은 지킬 거다. 저 녀석이 아군이 아니란 것도 알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난 필요한 거래를 한 거야."
"거래,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을 진행하면 끝은 확실히 낼 거다. 제나, 그때까지 우리끼리 잡음은 없어야 돼."
고천수는 제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거라 믿어도 될까?"
강력한 의사 표시.
고천수의 결정에 제나는 거부를 표할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예상한 전개였다. 고천수는 그녀를 보며 속으로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진행하면 된다.’
설문은 필요 없었다.
여기서는 다들 고천수의 결정에 따라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스으으으.
모든 걸 다 정리했다고 생각한 순간, 고천수는 품 안에서 뜨끈한 열이 느껴지는 것을 알아챘다.
‘뭐지?’
갑작스러운 열에 놀란 고천수가 품 안을 확인해 집어든 것은, 다름 아닌 보급함에서 꺼냈던 종이였다.
"어?"
그리고 이게 어찌 된 것일까.
마치 인쇄가 된 것처럼, 종이에는 어느새 설문 결과지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