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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08화 (208/224)

208. 거래 (2)

"뭐야, 이게."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웬 종이 한 장이었다.

"뭐지?"

고천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종이는 심지어 백지였다. 적힌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팔랑.

그래도 상자 안에서 나온 이상 아이템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한번 팔락거려 보았지만, 변화하는 것은 없었다.

"그건 뭐지?"

뒤따라온 방찬혁이 물었다. 안타깝지만 고천수는 거기에 답해 줄 수 없었다. 자신도 이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나도 아직 모르니까 신경 쓰지 마. 것보다 길 열렸네."

고천수는 종이를 품에 챙겨 넣고는 온리베어가 뚫어 놓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지지부진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얼른 나가자고. 나랑 허송세월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다시 작아진 온리베어가 안내를 시작한 가운데, 고천수는 비틀거리는 방찬혁을 떠밀며 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이 한 말, 사실일까?’

고천수는 방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고?’

방찬혁은 고천수를 처음 본 날에 대해서 얘기했다.

설명에 따르면, 방찬혁은 고천수가 사는 동네를 업무상 주기적으로 지나쳤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나치면서 몇 번이나 비슷한 시각에 연달아서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난 어딜 간 기억이 없는데 말이지.’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사사로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고천수가 그 사사로운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방찬혁이 사실을 말했든 아니든 간에, 고천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확실히 깨달은 바가 있었다.

사사로운 일은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쿠우.

앞서가던 온리베어가 위로 손을 뻗었다.

좀 높기는 했지만 그쪽은 확실하게 길이 뚫려 있었다.

"온리베어. 커져서 기어오를 수 있겠어?"

고천수의 말에 온리베어는 거대화해 위로 점프했다.

쿠웅!

하지만 그렇게 붙잡은 천장이 무너지면서 온리베어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는 안 되겠는데.’

고천수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는 온리베어에게 말했다.

"네가 올라가지 말고 날 던져 줘."

잠시 고개를 갸웃거린 온리베어는 곧 무슨 말인지를 깨달은 듯 고천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천수가 거기에 올라타자, 온리베어는 바로 팔을 당겼다가 위로 뻗었다.

후웅!

날아오른 고천수는 사뿐하게 위로 올라섰다.

쿠구.

주변에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 무너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고천수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방찬혁! 온리베어 위로 던져!"

"……."

"아, 팔 작살 났지! 쏘리!"

정신을 차린 고천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모래에 대부분이 파묻혀 있기는 해도 현재 있는 장소가 원래 빌딩이었다 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완강기가 든 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단단한 철골에 완강기를 설치한 고천수는, 줄을 온리베어와 방찬혁이 있는 쪽으로 내려 보냈다.

"온리베어! 줄 방찬혁한테 묶고, 너는 소형화해서 그냥 잡고 올라와!"

분부대로 하겠다는 듯 온리베어는 곧장 작아져서 방찬혁에게 줄을 묶고 본인은 위로 올라왔다.

그 다음에 할 일은 이제 정해져 있었다.

다시 고천수의 지시를 받은 온리베어는 대형화해 방찬혁을 끌어올렸다.

쿵!

고천수보다 더 크게 날아오른 방찬혁이 위로 올라와 근처 기둥에 충돌했다.

"워후……, 좀 아프겠는데."

고천수는 방찬혁에게 걸어가 상태를 살폈다.

"죽은 건 아니지?"

"……아직."

"그래, 아직은 죽으면 안 되지."

좀 더 들어야 될 것들이 많았다. 아래에서 나눈 대화는 아직 방찬혁이 고천수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온리베어. 너는 주변에 우리 일행들 있는지 좀 살펴봐. 나는 이 녀석하고 잠시 더 대화 좀 나눌 테니까."

함정에서 빠져나왔겠다, 일단은 일행들이 주변에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고천수는 그 틈을 이용하겠다는 듯 방찬혁에게 물었다.

"더 말해 봐. 자주 마주쳐서 날 인식한 게 전부는 아닐 테니까."

"뭐, 그래."

방찬혁은 기둥에 몸을 기댄 채로 천천히 말했다.

"내가 차를 타고 자주 다녔던 길은 호천로 사거리였지. 내가 몸담은 회사가 그 근처인데, 카메라를 들고 그쪽 길거리에서 구르고 있는 너를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

"물론 개인 방송 리액션이든지 뭐든 간에, 그것만으로 너한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지. 그때 나는 스스로에게만 관심이 쏠려있었으니까."

위치를 말해도 거기가 자신이 방송 벌칙이나 일상 기록 때문에 자주 다녔던 곳인지, 고천수는 기억해낼 수 없었다. 다만 원룸에서 도망쳐 나올 때 봤던 표지판의 호천로라는 글자는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것만 보면 일단 방찬혁이 허튼소리를 늘어놓는 건 아닌 듯했다.

"고천수, 넌 혹시 그런 거 본 적 없나?"

방찬혁은 고천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사람을 비추는 빛줄기 말이야."

"빛줄기?"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리자 방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난 한 줄기 빛을 받고 있었지. 스포트라이트처럼."

"그거, 자의식 과잉은 아니고?"

"자의식 과잉은 특별하지 않은 놈들이나 갖게 되는 거지."

방찬혁은 그러면서 자신이 받았던 스포트라이트에 대해서 얘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다. 세계가 이렇게 된 이후에는 계시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계시라."

"문제는……."

방찬혁은 고천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포트라이트가 나만 비춘 건 아니었다는 거지."

"무슨 말이냐."

"나한테 있던 그 빛이 너한테 옮겨 갔으니까."

그게 꽤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방찬혁은 살짝 눈썹을 움찔거렸다.

"이후로 네가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나도 정확히 뭐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몰랐다. 당시엔 아는 게 없었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에 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는 거냐?"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방찬혁이 따로 취한 액션이 없었다.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면 견제를 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나한테 주어진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너에 대해서 딱히 생각해 두진 않았다. 탑에 오르려면 준비를 해야 했으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지. 내가 살던 곳과 다른 장소로 옮겨 가 있기도 했고."

"뭐?"

그 말은 즉, 자신에게 부여된 캐릭터 설정을 인식했다는 소리였다. 고천수는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넌 지금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너를 확실하게 따로 인지할 수 있다는 거냐?"

"새삼스러운데. 지금까지 했던 얘기로 이미 그건 알게 됐던 거 아니었나?"

"대충 알기는 했지."

하지만 방찬혁이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차원이 달랐다. 플레이어나 가능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을 이용한 거고?"

"그걸 질책하기라도 하려는 건가?"

방찬혁은 우스운 얘기를 한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을 이용한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뭐?"

"방향성이 좀 달랐을 뿐이지 않나, 안 그래?"

그 말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뱉으며 말했다.

"어이가 없네. 너랑 나랑은 방향성 차이만 나는 게 아니야. 내가 분명히 얘기했지."

고천수는 방찬혁과 격이 달랐다.

"네가 가진 정보가 어떻든지 간에, 빛줄기가 최종적으로 나한테 비췄다는 건 그런 얘기 아니냐? 내가 마지막으로 선택된 거라고."

방찬혁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주변 인물로 전락한 것이었다.

"넌 나한테 가이드야. 그건 확실히 인지하길 바란다."

"미안하지만 그 말은 그대로 돌려주고 싶군."

방찬혁은 지지 않겠다는 듯 답했다.

"고천수, 너도 날 최상층으로 데려갈 가이드 역할을 하게 될 거다."

"하, 참."

한 마디도 밀리지 않는 그의 태도를 보며 고천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그래. 그건 네 멋대로 생각하고. 이런 얘기를 꺼냈으면 그게 나한테 어떻게 득이 되는지도 얘기해 봐."

방찬혁은 거래를 하자고 했다.

고천수가 그를 최상층으로 함께 데려가 준다면, 방찬혁도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넘겨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이건 그냥 네 자랑이잖아? 네가 나보다 기억하는 게 많다고 해도, 작은 편린에 지나지 않아. 너와 나의 역할이 바뀔 만한 건 아니야. 거래하자며."

거래는 이런 걸로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널 최상층에 데려다줄 기동력은 갖고 있다. 문제가 되는 지역의 수명도 알아채고 피할 수 있고. 넌 뭘 해 줄 수 있지?"

"길."

방찬혁은 마침내 실용적인 대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단순하게 답했다.

"나는 출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알고 있지. 통과하는 데 필요한 것도 몇 가지 알고 있고."

"그거 잘됐네."

스스로 알아볼 수도 있겠지만, 고천수로서도 그런 일을 하는 건 굉장히 번거롭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 그거 불어. 내가 활용해서 데려다줄 테니까."

"……."

"이제 와서 못 믿는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그딴 건 둘 사이에 필요 없었다.

"내비게이션처럼 하나씩 얘기해. 그럼 너도 중간에 버려질 일은 없을 테니까."

얘기는 이걸로 끝이었다. 고천수는 입을 다물고 방찬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방찬혁은 오래잖아 다시 말했다.

"좋다."

"그래, 거래 성립."

고천수는 겨우 얘기를 정리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영악한 새끼.’

방찬혁은 그냥 자기를 특별하게 생각만 하는 게 아니었다. 실행 능력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이 탑에 들어와 고천수를 발견한 그는 빠르게 또 다른 계획을 떠올렸을 터였다. 서로 맞붙게 되는 상황, 그리고 고천수가 예상외의 역량을 가졌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든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방법을 실현하는 계획을.

애초에 신도들을 데리고도 이 층을 통과하기는 어렵다는 판단까지 하고 있었다면, 고천수의 역량을 시험해 미리부터 가이드로 삼고자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굉장한 놈인 건 분명했다.

‘뭐, 그래 봤자지.’

방찬혁이 고천수에게 이렇게 접근하게 된 것 또한 어떻게 보면 게임의 일환일 수 있었다. 힌트를 주기 위한 장치일 수 있는 것이었다.

방찬혁이 기억하고 있는 세상.

그때 이 세상은 평화롭고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지영배가 그저 설정만 전직 플레이어였던 것으로 잡힌 인물이 아니라면, 이 대목에 뭔가 중요한 정보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었다.

쿠우.

고천수가 생각에 잠긴 사이, 온리베어가 돌아왔다.

녀석은 고천수를 데리고 가 밖의 어딘가를 가리켰다.

"발자국……."

모래로 가득한 지면에 일행들이 이동한 흔적이 있었다.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했겠지."

일단은 일행들과 합류하는 게 우선이었다. 아무리 방찬혁이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쓸 수 있는 인원들은 많은 게 좋을 테니까.

"온리베어. 가서 방찬혁 좀 챙겨와. 난 잠깐 필요한 것 좀 챙길 테니까."

지시를 받은 온리베어가 다시 방찬혁이 있는 곳으로 뛰어간 사이, 고천수는 근처를 내다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마트 건물의 잔해가 있었다. 일행들이 그곳에 잠시 들러서 보급품을 확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후. 이제 곧이네."

시선을 들어 올려 고천수는 하늘에 떠 있는 대기 유성들을 확인했다. 다른 종말 세계의 흔적들은 보는 것만으로 위협적일 정도였다.

이파리에 걸린 이슬처럼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빛을 내고 있는 그것들을 보며 고천수는 몸을 풀었다.

이제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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