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거래 (1)
‘아, 망할.’
지하 어딘가.
방찬혁을 끌고 다니고 있던 고천수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다.
‘어렵게 됐네, 이거.’
위에서 뭐가 추락한 탓에 붕괴가 된 건지는 몰라도, 곳곳의 길이 막혀 있었다. 여러 게임 세계관이 겹쳐 있어서 일어난 일인 듯했다.
"……일이 잘 안 풀리나 보지?"
게다가 앞에서 걷고 있는 방찬혁은 그런 고천수를 약 올리듯 한 마디씩 던지고 있었다.
"말조심해. 뒈지기 싫으면."
다소 격앙된 태도로 받아친 고천수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면서 뒤까지 천장이 무너졌기에 따라오는 몬스터는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가고 있는 길에 새로 유입되는 몬스터도 없었다.
그 말인 즉, 모든 통로가 봉쇄된 상태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후우.’
고천수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대로는 위험해.’
어디로든 나갈 길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게임의 지식을 활용하려고 해도 지반 곳곳이 무너져서 길이 막혀 있는 이상 뭘 해 보기가 어려웠다.
남은 건 방찬혁뿐이었다.
다만 그를 구슬려서 정보를 뽑아내야 했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어렵다는 게 문제긴 했다.
"내 도움을 바라고 있는 건가?"
눈치 빠른 방찬혁이 고개를 돌리며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고천수는 그런 방찬혁을 한 번 걷어차 넘어뜨렸다.
"바라고 있지. 엄청."
"……."
바라는 자의 태도와는 걸맞지 않은 행동에 방찬혁이 잠시 멍한 표정으로 고천수를 바라볼 때였다.
바스락.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렸다.
"뭐지?"
고천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스락.
또다시 들린 소리에 고천수는 살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그로도 꺼졌는데.’
길을 헤매는 동안 이미 10분은 지난 상태였다. 좀비라면 고천수가 쉽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크롤러는 아니었다.
"야, 가 봐."
고천수는 방찬혁을 일으키며 말했다.
"뭐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으니까."
"내가 죽으면 길도 찾지 못할 텐데?"
"쉽게 불 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어차피 길을 알려 줄 것도 아니면 이렇게라도 활용하는 것이 나았다. 뒤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렇게 고천수가 얼른 가 보라는 듯 빤히 바라보자, 방찬혁을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저쪽이다."
방찬혁이 고갯짓으로 가리킨 곳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과 같았다.
"저쪽으로 가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있다. 가 봐."
"너 지금 나랑 농담하냐?"
소리가 난 곳을 확인하라고 했더니 도리어 거기에 길이 있다고 보내려는 꼴이었다.
"길이 있어도 내가 먼저 갈 건 없지. 가라."
고천수는 방찬혁의 몸을 떠밀었다. 그러자 방찬혁은 비틀거리며 고천수를 한 번 쏘아보았다.
하지만 고천수가 눈썹을 치켜뜨며 고갯짓을 하자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겨우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스락.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바스락바스락.
뭔가가 벽을 파고 있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방찬혁과 고천수가 소리가 난 지점을 찾아 확인했을 때였다.
바스…….
길을 막고 있는 잔해를 뚫고 이쪽으로 들어오고 있던 온리베어가 고천수와 얼굴을 마주치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
허무한 만남에 고천수가 탄식을 뱉고 있을 때였다.
"이게, 네가 가진 신의 애완동물인가?"
방찬혁이 먼저 말을 뱉었다.
"개도 가지고 있던데."
흑구를 말하는 것일까.
고천수는 방찬혁의 말을 무시하고 온리베어에게 다가갔다.
"뭐야, 너.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고천수의 물음에 온리베어는 위를 가리켰다. 지반이 무너지면서 함께 들어왔다는 뜻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천수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녀석들은?"
도리도리.
종이와 펜을 잃어버린 온리베어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의사를 표현했다.
"뭐, 일단 알았어."
고천수는 아직 잔해에 끼어 있는 온리베어를 꺼내 주었다.
"근데 이렇게 껴 있으면 그냥 커졌으면 됐잖아. 또 무너질까 봐 걱정이라도 됐던 거냐?"
이번엔 고개를 세로로 젓는 온리베어를 땅에 잘 앉혀 두고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온리베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 난 여기에 갇혔어. 나갈 길이 필요하고."
그렇다면 방찬혁을 활용하는 것 외에 방법은 하나였다.
바로 온리베어가 들어온 곳을 찾아내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네가 들어온 길로 안내해 줘. 덩치 좀 살짝 키워서 길도 터 주고. 여기 위쪽 빼고는 다 단단해서 더 무너질 건 없을 거야."
고천수의 말에 온리베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덩치를 적당히 키워 잔해를 치워내기 시작했다.
"하나 더 데리고 왔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군."
방찬혁의 말에 고천수는 눈썹을 치켜떴다.
"너 뭐 알고 얘기하는 거냐? 한 마리는 뭔데. 고양이?"
"맞아."
"어휴."
방찬혁이 알고 있는 정보는 결코 적지 않았다. 고천수는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하나 더 가져왔으면 널 고문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됐겠지. 고양이가 네 면상부터 갈았을 테니까."
"상당히 폭력적이군."
"내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방찬혁에게 들을 말은 아니었다.
"신도들을 죄다 발판으로 삼아 버린 네가 더 폭력적인 것 같은데. 다 네가 진짜 구원자인 건 모르고 죽었잖아?"
"내가 구원자일지 아닐지는 아직 결정된 게 아니다."
방찬혁은 아직도 야심을 끊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고천수, 네가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
"뭐?"
"7층에 있던 지영배를 기억하나?"
쿵.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천수는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팍 구겨진 기분을 겨우 억누르며 고천수가 물었다.
"네가 지영배를 어떻게 알아? 만났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방찬혁은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중요한 건 내가 그 실패한 후보자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거다."
"후보자라니."
"구원자가 되지 못했으니 그렇게 표현하는 게 맞겠지."
그러면서 방찬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씩 털어놓았다.
"지영배는 이미 탑을 올랐다가 실패한 인간이다. 그 죄로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지."
"……."
"그 말이 뭘 의미하는 건지,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고천수."
그 부분은 고천수도 올라오면서 어느새 고민했던 바였다.
지영배는 이 탑을 등반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과연 어디에서 실패한 것일까. 어디에서 어떻게 실패를 했기에 그런 상태로 존재하게 된 것인가.
전체 룰에 의하면 게임이 정복되지 않았을 경우 세계는 그대로 흘러간다. 즉, 고천수와 지영배가 공존하게 되는 경우는 따로 숨겨진 룰이 있지 않은 이상은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영배가 구하는 데 실패한 세계는 그대로 흘러갔어야만 했고, 그렇다면 고천수가 평화롭게 게임을 하다가 플레이어가 되는 과정이 없었어야 했으니까.
아포칼립스인 상태가 계속 되었어야 하는데, 모순이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고천수. 지영배는 그냥 조형된 인물일까?"
마치 뱀이 혓바닥을 놀리듯 방찬혁이 고천수에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그냥 설정이라고 치부하면 그 말이 맞게 되지 않나.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
"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나는 누군지가 궁금해지겠지."
고천수는 방찬혁을 노려보았다.
‘술수라도 쓰려는 건가?’
방찬혁은 고천수가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해 그 심리를 파고들려고 하고 있었다.
"고천수, 거래하자."
하지만 방찬혁이 꺼낸 말은, 고천수의 예상에서는 살짝 다른 말이었다.
"난 살아남는 게 목적이다."
"……뭐라는 거야, 너."
"난 꼭대기 층으로 갈 거다."
그러면서 방찬혁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너와 같이 가고 싶지는 않지만, 네가 가지고 있는 역량은 잘 확인했다. 어쩔 수 없다면 같이 가는 수밖에 없겠지."
"얀마."
마치 자기가 큰 자비라도 베푸는 듯한 말투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나야. 네가 아니라."
"그러니까 거래를 하자는 거다."
방찬혁은 두 팔을 흐느적 늘어뜨리고 있으면서도 자세만은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해 줄 수 있으니까."
"……."
심리전일까.
고천수는 방찬혁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답을 내지 못했다.
‘시청자들이 없으니까 성가시네.’
이럴 때는 시청자들의 생각을 물으면 좋겠건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에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고천수는 채팅창의 복구를 희망했다. 이 층을 나가면 채팅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리라는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게 약속받은 건 아니었다.
"뭘 말해 줄 수 있는데."
고천수는 결국 있는 자원을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설마 샘플도 없이 나하고 거래를 하자고 제안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묻는 고천수를 본 방찬혁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걱정 마라, 고천수. 너와 내가 처음 본 날에 대해서 말해 줄 테니까."
***
쿠어어!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온리베어는 잔해를 계속 파냈다. 고천수의 말대로 주변의 구조는 꽤 단단했기에 더 이상 뭔가 연쇄적으로 무너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팍! 파악!
게다가 잔해를 다 파낼 건 없었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공간만 확보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리고 방금 막 온리베어는 그 일을 완전히 끝마쳤다.
쿠우.
잔해를 필요한 만큼 파냈지만 고천수는 아직 방찬혁과 서로를 마주 본 상태로 서 있었다. 온리베어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잔해와 반대편으로 이어지는 길 끝에 초록색 상자가 하나 존재했다. 온리베어가 생각하기에 그건 아마 고천수가 얻을 상자로는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쿠우우.
온리베어는 고민이 빠졌다. 원래대로라면 고천수를 저 상자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방찬혁과 얘기를 시작했다는 점에 있었다.
온리베어도 알고 있는 정보가 제한되어 있기에 방찬혁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간단히 생각하면 일단 방찬혁과 고천수는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인물들이었다.
만약 방찬혁이 내뱉는 어떤 말이라도 고천수의 심리를 흔들어 놓는다면, 지금 안내해 줄 상자에 든 것이 괜히 고천수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다.
쿠우…….
천기누설 불가. 온리원의 권속이었을 때부터 남겨진 제약으로 인해 온리베어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느끼더라도 그걸 정확히 고천수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고천수가 열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건 온리베어가 선택할 일은 아니었다.
"온리베어."
그걸 알 리 없는 고천수는 방찬혁과의 대화를 마친 뒤에 온리베어에게 걸어왔다.
"다 열었네. 이제 밖으로 안내해 줘."
하지만 그 말에도 온리베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고천수에게 보여 줄 본분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가만히 서 있……."
그러던 고천수는 온리베어의 얼굴을 보다가 훽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잔해와는 반대편에 있던 초록색의 상자를 발견했다.
"저건?"
상자의 근처까지 걸어간 고천수가 눈을 크게 떴다.
이번 상자도 열려면 가지고 있는 젠의 완전 소모가 필요했다.
쿠우.
온리베어가 한 번 소리를 내보았지만 고천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굳은 얼굴로 상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고천수는 상자를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