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지독한 놈 (4)
콰악!
고천수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손으로 방찬혁의 멱살을 끌어 잡아 올리는 일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해야 할 것부터 할게."
콱! 콰직! 콰악!
고천수는 남은 손으로 방찬혁의 몸통을 후려쳤다.
"크윽?!"
"아프냐?"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주먹에 모양까지 만들어서 방찬혁을 계속 후드려 팼다.
퍽! 퍼억! 팍!
맞는 동안 방찬혁은 계속 신음만 뱉어냈다. 비명까지는 내지르지 않는 그를 보면서 고천수는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독한 새끼!"
쾅!
멱살을 놓은 고천수가 곧바로 방찬혁의 어깨를 후려쳐 버렸다.
어그로 5 - 09:58
그새 어그로 스킬이 꺼지고 새로 켜졌다. 철창에 붙어 있는 몬스터들 덕분에 잡힌 수치가 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높았던 수치와 비할 바는 아니었다.
"후."
어그로 스킬이 꺼지고 새로 켜지기 전에 일단 방찬혁은 무력화시켜 놨다.
고천수는 몸을 늘어뜨리고 있는 그 앞에 다가가 쭈그려 앉았다.
"방찬혁."
그는 정장을 입고 가면을 쓰고 있었다. 정말 아포칼립스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투둑.
고천수는 그의 가면에 손을 댔다.
아직까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미 금이 가 있던 가면은 고천수의 손아귀 힘을 받아 천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콰작.
가면이 마침내 조각나자 방찬혁의 얼굴이 고천수의 눈에 들어왔다.
"……?"
짙은 눈썹에 예리한 눈매.
인상은 까칠하지만 전형적인 미남자라고 볼 법한 얼굴이었다.
"뭐야, 이거."
광적으로 미친 듯 굴길래 좀 더 특색 있는 얼굴일 줄 알았건만 오히려 멀끔하게 생긴 것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얼굴로 신도 모은 놈이었나."
하지만 농담이나 나누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그렇게나 맞았는데도 방찬혁의 두 눈은 또렷한 상태였다.
물론 정상은 아니었지만, 의식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은 분명했다.
"턱도 망가졌냐?"
고천수는 방찬혁의 멱살을 끌어당기며 물었다.
"너, 뭐 하는 놈이야?"
"……."
원래 잘만 말하던 놈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뭐라도 말하면 정보를 넘겨준다고 여기는 것일까.
"야."
"고천수."
그제야 방찬혁은 고천수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넌 여기서 끝이다."
"끝?"
고천수는 또다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엿 같은 소리 하네."
끝나긴 누가 끝난단 말인가.
동귀어진이나 하자고 여기에 이렇게 몸을 피신한 게 아니었다.
"다 각 재고 들어온 거야, 찬혁아."
시청자들은 이런 상황을 만든 고천수에게 무리수를 던졌다고 할지 모르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는 계획한 게 생기면 과감하게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싱크홀에 빠지며 잠시 당황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이 장소의 이 위치에 서 있는 건 고천수가 통찰력을 발휘해 결정을 내린 사항이었다.
"너야말로 여기서 끝이지."
팔을 다 망가뜨렸다. 바로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정도는 지켰다. 하지만 방찬혁이 반항하지는 못하도록 확실하게 신체의 중요 기능을 상실시킨 것이었다.
"유언이나 들으려고 이렇게 남긴 거야. 계속 날 방해했는데 쉽게 끝낼 순 없잖아?"
"……."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게 있으면 말해 봐."
방찬혁도 자신만의 시스템창을 갖고 있었다. 분명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있을 테니, 혹시라도 얻어낼 수 있는 게 있을지 몰랐다.
고천수는 방찬혁이 딜을 제안해 오기를 바랐다.
"이 상태로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말해. 나 바쁘니까."
"……말하지 않는다면?"
"그럼 그냥 죽는 거지."
잠시 정적이 있었다.
방찬혁은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고천수도 지지 않고 그를 쳐다봤다.
"아 씨, 눈싸움하냐? 어?"
"왜 너 같은 놈인지 모르겠군."
방찬혁은 한숨을 쉬듯 말했다.
"이해를 할 수가 없어."
"뭔 말을 하는 거야?"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주위로는 몬스터의 괴성들이 더욱 많아졌다.
열려있는 다른 문들에서, 몬스터들이 몰려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쾅! 콰앙!
몬스터들은 철창을 마구 두드려댔다.
하지만 방찬혁과 고천수, 둘 다 거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툭.
고천수는 의연한 태도를 보이는 방찬혁을 끌어당겨 몸을 뒤졌다.
지갑 하나가 나왔다.
그 안을 살펴본 고천수는 명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명상사 대리 방찬혁?"
너무 소시민적인 명함에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 하는 놈이야, 너 대체."
옷차림까지 보면 방찬혁은 그냥 회사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교주 노릇을 하고 있는데다가 수상한 가면까지 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온리원이 부여한 기믹이라기엔 조금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었다.
"그게 너랑 내가 다른 부분이다, 고천수."
다시 입을 연 방찬혁이 천천히 말했다.
"난 적어도 너보다 더 많은 과거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끼기긱.
쇠창살 문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움직이지 말아야 할 문이.
"아, 시발!"
레버를 위로 들어 올리면 문이 아주 천천히 감겨 올라가게 된다. 시간이 없다는 걸 알아챈 고천수가 재빠르게 창살 앞에서 소리쳤다.
"이쪽이다아아아아아! 이 새끼들아아아아!"
어그로는 몬스터들에게 노려지기만 하면 수치가 갱신되는 스킬이었다. 즉, 코앞에 있지 않아도 몬스터들에게 자신을 인식시키기만 하면 고천수는 어그로 스킬을 갱신할 수 있었다.
어그로 131 - 10:00
마침 시간이 다 지나며 어그로 스킬이 새로 켜졌다.
아까 전보다 수치가 높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적은 수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밖에 있는 크롤러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몇 마리의 크롤러가 달라붙으면 승부가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이쪽은?’
고천수는 쇠창살 문과 반대쪽에 있는 크롤러의 사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둘 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
다시 싱크홀 한가운데로 이동하거나 이 안쪽의 통로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잠깐.’
방법이라면 하나가 더 있었다.
덥석!
고천수는 내려놓았던 방찬혁을 다시 잡으며 말했다.
"너 시스템창 켤 수 있지."
"……?"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 있으면 빨리 대."
하지만 방찬혁은 그런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와, 진짜 그레이트한 새끼네."
죽을 위기가 코앞에 있는데도 방찬혁은 의연했다. 아무리 고천수가 줘패 버려서 의지가 꺾였다고 해도, 이건 보통내기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미안하지만 네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안 끝난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방찬혁은 둘 다 죽는 결말을 예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천수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이미 계획을 짜 두고 있었다.
월 트랩에서는 한곳의 통로를 막아 두면 그 통로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게 돼 있었다. 좀 더 정확히는 몬스터들이 다른 통로를 대신 이용하는 것이었다.
즉, 지금 이 통로를 막고 있는 크롤러의 사체 뒤로는 몬스터들이 쌓여 있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사체를 뚫고 얼른 퇴로로 향하면 몬스터에게 둘러싸일 일 없이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따라와."
두고 갈 수도 있었지만 듣고 싶은 내용이 있었다.
고천수는 크롤러의 사체를 끌어서 간신히 사람 둘이 지나갈 공간을 확보한 뒤, 방찬혁의 뒷덜미를 잡았다.
"스스로 서."
다리는 일부러 부러뜨리지 않았다.
고천수는 방찬혁을 위해 필요 이상의 수고를 할 생각이 없었다.
방찬혁은 비틀거리며 몸을 세웠다.
굴욕적인 상황일 텐데도, 방찬혁은 이곳에 남지는 않으려는 듯 보였다.
‘포기는 안 했다는 소리네.’
다른 신도들 없이 혼자서도 이러는 걸 보면 어떻게든 탑의 꼭대기에 오르고 싶어 하는 것이 확실했다.
고천수는 방찬혁이 그러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물론 자신보다 과거를 더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묻고자 하는 게 더 크긴 했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고천수는 세계가 이렇게 된 이후의 기억밖에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부모님과의 기억이 있기는 했다. 플레이해 왔던 여러 게임들에 대해서나 자취방에 관련된 내용도 여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 외의 것에는 기억이 없었다.
캐릭터의 근간을 이루는 필수적인 기억만 남은 것처럼.
‘……뭐냐고.’
온리원이 기억을 바꿔 놓은 것은 여기까지 오면서 다 알게 됐다.
그렇지만 이건 조금 논외의 얘기였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이 정교하게 조정돼 있었다.
그걸 방금 방찬혁의 말을 통해서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웃기게도 채팅창이 없어졌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채팅창이 다시 나타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이 찝찝함을 없애려면 반드시 방찬혁을 데려가야만 했다.
"가! 걸어!"
고천수는 윽박지르듯이 방찬혁에게 소리쳤다.
방찬혁은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비틀비틀 작은 틈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방찬혁이 먼저 통과하고 나서 고천수도 걸음을 옮길 때였다.
크, 크아아아아!
드디어 공간이 벌어진 문 아래로 좀비들이 기어 들어왔다. 고천수는 그 좀비들을 돌아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녀석들도 무사해야 할 텐데.’
위에 있는 일행들이 어떻게 있을지는 알지 못한 채, 고천수는 틈을 통과해 사체로 다시 길을 막았다.
***
"어떻게 된 거야?"
싱크홀 위.
이제는 철판으로 닫혀 버린 그곳의 근처에서, 마키나 일행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천수가 이쪽으로 들어갔다고?"
장서연의 물음에 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보지는 못했는데, 그런 것 같습니다."
"아 씨."
장서연은 발로 철판을 두드려 보면서 표정을 팍 구겼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떡하라는 거냐고."
안내자는 고천수였다.
그가 없으면 일행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 당황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양민철은 이런 경험이 한두 번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형이 계속 저희를 데려가던 방향은 있잖아요. 거기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아니, 그게 걔가 없으면 쉽냐고."
"괜찮을 거예요."
받아치는 장서연의 우려에 김하령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건 운명이니까요. 천수 님과는 끈끈한 뭔가로 연결돼 있는 거라고요."
"아이 씨."
장서연이 그 말에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면서도 장서연은 내심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운명은 아니어도 살아 있으면 서로 만나게 되긴 할 텐데.’
어디에 떨어졌든 고천수가 살아나오지 못하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서로를 믿어야 했다.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없는 상황이면 원래 가던 방향으로 가다가 재회를 노려야 했다.
괜히 여기서 기다리다가 재난에 휩쓸리면 답이 없을 수도 있었다.
"좋아."
장서연은 제나에게 말했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 말입니까?"
그녀는 싱크홀을 막아 놓은 철판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여기서는 방법이 없어 보이니 이동하면서 천수 님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좋은 생각이야."
장서연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차피 다들 공통적인 목표는 같잖아. 천수를 찾으면서 여기서 빠져나가는 거."
그 말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다 같이 가 보자고. 천수한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으면 찾아보면서."
"근데……."
그때였다.
양민철이 말했다.
"왜 얘만 있죠?"
양민철이 바라보는 곳에는 흑구만 있고 온리베어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