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지독한 놈 (3)
"하나만 미리 말해 두자."
고천수는 넘어져 있는 방찬혁을 내다보며 말했다.
"넌 진짜 지독한 놈이다."
일반적인 캐릭터면 고천수가 아래에 떨어뜨리고 왔을 때 그대로 낙오됐어야 정상이었다. 심지어 휴까지 남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기어코 기어올라 하는 짓이 먼저 가는 것도 아니고 복수라니, 참으로 대단한 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네가 이렇게 나와 준 덕분에 나는 참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어."
우연히 지금 올라온 건지 아니면 다시 만날 때를 기다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찌 됐든 방찬혁이 고천수를 앞질러 가지는 못하게 된 것이었다.
터벅터벅.
고천수가 가까이 걸음을 옮기는 사이 방찬혁은 기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대긴 했지만 상당한 충격을 입었을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에 고천수가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방찬혁이 근처에 있던 뭔가를 잡아당겼다.
"……!"
순간 고천수는 앞으로 점프했다.
아래에는 싱크홀이 생겨났다. 발이 좀 미끄러지긴 했지만, 고천수는 충분히 그 싱크홀을 피할 수 있었다.
삐끗-.
아니, 피할 수 없었다.
방찬혁의 코앞에 착지하자마자 그곳까지 무너져내렸다. 결국 몸이 기우뚱거리며 추락을 피할 수 없다고 느낀 순간, 고천수는 방찬혁의 뒷멀미를 낚아챘다.
콰아아아!
주변에 있던 모래가 쏟아져 내리며 두 사람은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풀썩!
몇 미터는 되는 높이였지만, 아래에 모래 더미가 있어서 충격을 완화할 수 있었다.
고천수는 타격을 금방 상쇄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새끼……!’
방찬혁은 따로 떨어져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다. 고천수는 바로 방찬혁이 있는 곳으로 가려다가 걸음을 멈칫했다.
‘음?’
떨어진 곳은 어두운 공간이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비치는 빛 덕분에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 빛이, 360도 원형으로 둘러쳐진 벽들 사이사이마다 있는 8개의 음산한 통로 안쪽에서 비쳐 왔다는 것이었다.
크아…….
크아아…….
그리고 거기에서는 좀비들의 괴성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고천수는 빠르게 달려가 통로들을 살폈다.
"이런 망할."
닫을 수 있는 문이 있기는 했다. 통로 천장에 달려 있는 쇠창살 문으로, 셔터식으로 잡아당겨 내리는 방식이었다.
콱!
고천수는 바로 점프해 쇠창살 문을 붙잡아 끌어내리려고 했다.
"끄응!"
하지만 1920%의 신체로도 문을 끌어내릴 수 없었다. 붕 떠 있는 두 발을 옆의 벽에 대고 무게중심을 잡아 다시 문을 잡은 손에 힘을 줬지만 삐걱 하는 소리만 날 뿐이었다.
‘못 내리게 해 놓은 문이잖아, 이거……!’
고대 유적에 관련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웬만한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설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애초에 이쯤 되니 고천수도 이게 무슨 게임에 나오는 설정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몬스터 트랩.
각종 몬스터가 들어있는 함정을 타파하며 나가야 하는 게임으로, 주로 좀비가 많이 등장하는 방식이었다.
뭔지 알았으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고천수는 다시 모래 더미로 돌아갔다.
위는 이미 두터운 철문으로 막혀 버렸다. 남은 것은 8개의 통로 한가운데 있는 이 모래 더미뿐이었다.
고천수가 기억하기로 트랩을 벗어날 수 있는 장치는 바로 여기에 있기 마련이었다.
그는 모래를 파헤치며, 숨겨진 레버가 있는지를 찾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그때였다.
좀비 한 마리가 나타나 고천수를 노려보았다.
"하, 참."
고천수가 혀를 차는 사이 좀비는 달려와 이빨을 들이밀었다.
콰직!
고천수는 그런 좀비의 목을 도끼로 찍어 날려 버렸다.
"바쁘니까 좀 꺼져."
어그로 183 - 04:25
남아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차라리 처음부터 좀비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모를까, 이렇게 생긴 함정은 순차적으로 좀비의 숫자를 늘려가게 되어 있었다.
즉, 지금 활성화된 어그로 스킬이 꺼지면 신체는 낮은 비율로만 강화되고 말기를 반복하고, 그러다 체력이 떨어지면 끝장이 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크아아아!
크아아아!
크아……!
그 와중에 좀비들의 괴성이 더 들려왔다.
고천수는 레버를 찾다가 마침내 방찬혁이 있는 자리까지 도달했다.
"으, 음."
방찬혁은 이제 깨어난 듯 신음소리를 흘렸다.
고천수는 그런 방찬혁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솔직히 물을 게 많기는 한데, 바쁘니까 참을게."
그러고는 지금 이 공간에 들어온 좀비들을 향해 방찬혁을 내던졌다.
"컥……?!"
내던져진 방찬혁이 바닥을 구르고 멈춰 섰다.
크아아아!
하지만 방찬혁은 미처 고통을 삭일 새가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좀비 세 마리를 보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뛰기 시작했다.
"그래, 잘 좀 하고 있어."
고천수는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고는 모래를 계속 뒤적거렸다. 하지만 레버는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 트랩이 아닌가?’
수많은 게임의 세계가 섞여 있는 만큼, 레버가 있을 만한 곳에 보이지 않으면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애초에 이 모래는 치우기도 힘들어.’
일반적인 게임은 불가능한 상황에 플레이어를 몰아넣지는 않는다.
난이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반드시 해결이 가능한 문제를 던져 주기 마련이었다.
‘방찬혁…….’
그는 다시 나타나고부터 계속 벽면에 있던 레버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몬스터 트랩이 아니라 월 트랩이라는 자매 게임의 세계관이었다.
둘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돌아가지만 약간씩은 특징이 다른 게임이었다. 가장 쉬운 일례를 들자면 이런 것이었다.
"역시."
통로 바로 옆의 벽을 두드리자 레버가 하나 기어 나왔다.
그렇다는 얘기는 다른 레버들도 통로 옆에 있다는 소리였다.
타악!
일단 첫 번째 레버를 붙잡은 고천수는 천천히 레버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고천수가 힘을 주고 있는데도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마치 그렇게 강제돼 있는 것처럼.
대략 20초.
통로 하나를 닫는 데 들어간 시간이었다. 그것도 레버를 다 내려고 나서야 꿈쩍도 안 하던 문이 길로틴처럼 바로 추락해 닫히는 방식이었다.
"자, 다음."
고천수가 다른 레버를 내리고 있는 사이에 방찬혁은 어디서 주워든 철근으로 좀비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위에서 같이 떨어져 내렸던 물건인 듯했다.
이 상황에서 웃기긴 하지만 방찬혁은 제법 전투 능력이 좋았다.
그는 순차적으로 나타나는 좀비들의 머리를 정확히 때려 저세상으로 보내 주고 있었다.
‘빨리 닫아야겠네.’
통로들을 다 닫는다고 치면, 문 닫는 순수 시간으로만 2분 40초가 걸렸다. 살짝 옮기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방찬혁을 때려눕히는 게 1분 남짓일 거라 아슬아슬했다.
네 번째.
하지만 문제는 고천수가 네 번째 문을 내리고 있을 때 발생했다.
크르르르르르.
좀비의 소리가 아니었다. 고천수는 순간 귀를 기울였다.
"설마, 이거……."
그 설마였다.
크르르르르르!
나타난 건 크롤러였다.
사족 보행하는 거대한 몬스터가 혀를 내밀며 다가왔다.
"아, 쉬트!"
어그로 184 - 02:58
마침 내리고 있던 문을 내리고 있던 쪽으로 온 크롤러가 곧장 고천수에게 달려들었다.
콰드드드!
고천수가 몸을 던지며 피하자 크롤러가 모래 더미로 가 몸을 박았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간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새꺄."
여태 크롤러와 직접 상대한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크롤러는 생긴 것부터 혐오스러운 데다가 일반 좀비랑은 격이 다를 정도의 강한 면을 가지고 있으니까.
다만, 지금 등장한 건 크롤러의 실수였다.
크아아아!
달려드는 크롤러에게 고천수도 그대로 달려들었다.
콰앙!
작렬하는 충돌음.
고천수는 크롤러의 두 앞다리를 붙잡고 밀어붙였다.
크아아……!
크롤러가 발버둥 쳤다.
고천수는 비틀거리면서도 크롤러를 벽으로 밀어냈다.
쾅!
벽에 부딪힌 크롤러가 괴성을 질러댔다.
그런 크롤러를 고천수는 몇 번이나 벽에 충돌시켰다. 크롤러는 고천수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했지만, 고천수가 번번이 다시 붙잡아 밀어붙였다.
단순했지만 파괴적인 공격이었다.
크어아.
그 충격에 크롤러가 정신을 못 차릴 때, 고천수는 크롤러의 다리를 붙잡고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마치 레슬링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기술처럼.
크아! 크아아아!
크롤러가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회전력은 붙었다.
콰아앙!
놓자마자 날아갔다.
크롤러는 아직 닫히지 않은 네 번째 통로로 도로 날아가 그 안에 처박혔다.
고천수는 신음하고 있는 크롤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빠르게 주먹을 내뻗었다.
연속되는 펀치.
언뜻 보면 되는대로 주먹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고천수는 자세가 뒤틀려있는 크롤러의 몸을 교정하듯 특정 부위를 때리고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고 크롤러가 통로를 완전히 틀어막게 된 다음에는 머리를 집중적으로 타격해서 치명타를 입혔다. 그렇게 크롤러가 생명력을 잃고 완전히 늘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고천수는 마침내 손을 늘어뜨렸다.
"후. 드디어 맞췄네."
크아아아!
그사이 다른 열린 문 쪽에서는 계속해서 좀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고천수는 어그로가 꺼지기 전에 네 번째 문의 레버를 다시 붙잡았다.
어그로 191 - 00:57
시간을 너무 많이 써 버렸다. 이제는 통로의 모든 문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정석적인 방법은 포기해야 했다. 사실 크롤러를 맞닥뜨린 순간 이미 포기한 상태이기도 했다.
다른 길을 찾기로 한 고천수는 이제 죽기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는 방찬혁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새꺄!"
외침이 퍼지자 방찬혁이 놀란 듯 힐끔 시선을 향했다.
"그대로 그냥 뒤지고 싶지 않으면 당장 튀어와, 여기로!"
방찬혁은 고천수를 빤히 쳐다보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고천수는 적이었다. 방찬혁이 그의 말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탁탁탁!
아니,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방찬혁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 고천수에게 달려왔다. 고천수는 그가 오자마자 발로 차서 네 번째 통로에 넣어버렸다.
"거기 얌전히 있어."
네 번째 통로는 크롤러의 몸뚱이로 막혀있었다. 그 덕분에 다른 몬스터가 넘어오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차피 어그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그로가 꺼지고 다른 크롤러까지 나타나면 고천수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선택한 길이었다.
크르르르!
또 다른 크롤러들의 소리.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크르르르르르!
그렇게 다른 크롤러가 나타났을 때였다.
덜컥.
레버가 다 내려갔다.
그리고 순간 고천수는 네 번째 통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크롤러도 그런 고천수를 잡으려고 움직였다.
콰아아앙!
충돌.
찰나의 순간 내려온 쇠창살의 문이 뒤이어 달려온 크롤러의 진입을 막아버렸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크우우우!
고천수는 몬스터들의 괴성을 뒤로 하며 방찬혁을 바라보았다.
아직 십수 초의 어그로 스킬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우리 아직 정산해야 할 게 남아있지?"
고천수는 그냥 살려준 게 아니라는 듯, 주먹을 쥐고 방찬혁의 앞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