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지독한 놈 (1)
헬기 비행 시간 20분.
어느새 헬기는 정해진 수명에 가까운 시간을 날아가고 있었다.
‘아직 멀어.’
일행들은 헬기가 자동으로 날아가고 있는 것에 안심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헬기의 수명을 볼 수 있는 고천수는 그러지 못했다.
‘이 헬기는 추락하게 되어 있는 녀석이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 나오는 헬기들은 종류를 불문하고 목적지까지 제대로 날아가는 게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당장의 재난을 피하는 정도로 사용되고, 나중에는 원치 않는 장소에 사람들을 불시착시키는 정도의 역할만 하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이 헬기는 정말로 그 역할을 위해 존재하고 있었다.
남아 있는 수명은 이제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여러분."
고천수는 잠깐이나마 살았다며 한숨을 돌리고 있는 일행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이 헬기는 추락할 겁니다."
"예?"
"추락이요?"
놀라는 일행들을 보며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적어도 추락할 때 아무도 죽지는 않을 테니까."
타기 전에 본 헬기 몸체에 RT-92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데쓰 워닝(Death warning)이라는 게임에서 주인공 일행이 타고 가는 자동 헬기로, 좀비들이 있는 위험 지대에 불시착하게 되어 있었다.
고천수는 그걸 알면서도 이 헬기를 탔다.
헬기가 거기에 있던 것부터가, 타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일러주는 듯했으니까.
"문제는 추락한 다음입니다. 최대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주변에 좀비들이 많이 나타날 겁니다."
"좀비들 말입니까?"
"네. 좀비 모르시는 분들 없겠죠?"
고천수는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폴링월드에 오래 있던 페이크맨들도 시간이 지나면 좀비화된다. 멸망한 세계가 통째로 이 층에 전이되어 오고 있는 만큼,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수의 좀비 떼와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좀비와는 결전은 고천수에게 일가견이 좀 있었다.
예상을 너무 벗어나는 일만 생기지 않으면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고천수는 그렇게 예측했다.
"그럼 다들 충격에 대비하세요. 방법은 편한 대로."
고천수의 말에 다들 분주히 충격을 줄이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제나만 옆으로 다가와 소곤거리듯 물었다.
"천수 님, 이 층의 끝까지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음?"
"얼마나 데리고 가실 생각인지 솔직히 알고 싶습니다."
제나는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구심을 품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고천수의 의도에 따라 전략이나 방향성을 고려해 두려는 것으로 보였다.
"제나."
하지만 고천수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들어서 그렇게 좋을 게 없을 질문도 있어."
"그럼……."
"하던 대로만 해 줘. 그냥 따라만 주면 돼."
몇 명을 데리고 간다는 건 고천수가 미리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가면서 최악의 상황에 따라 고천수는 스스로만 구제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리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고천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헬기가 뒤흔들릴 때를 기다렸다.
삐삐삐삐.
헬기에서 불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행들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고천수는 숨을 크게 몰아쉬고는 근처에 있던 지지대를 잡았다.
여기서 뭘 더 할 수는 없었다. 나머지는 정해진 대로 흘러가게 놔둘 뿐이었다.
남은 수명 - 00:00
콰아아아아아아!
순식간에 하강한 헬기가 모래 더미에 몸체를 처박고 미끄러졌다.
사방으로 먼지가 퍼지며 헬기 유리창을 모래가 뒤덮었다.
그 와중에 헬기가 구른 탓에 일행들은 붙잡고 있던 것을 놓치고 이리저리 몸을 굴렀다. 안에 있던 짐까지 뒤엉키며 주위는 소음으로 가득찼다.
콰앙!
헬기는 어딘가에 부딪쳤다.
순간 헬기의 몸체가 가던 방향으로 크게 한 번 들리며 일행들이 전부 앞으로 쏠렸다.
"큭!"
"커헉!"
"끄악!"
비명들이 순식간에 중첩됐다. 고천수도 앞으로 쏠리며 전면의 계기판에 머리를 박았다.
구구구구……, 콰앙!
앞으로 가던 관성을 잃은 헬기가 이내 바닥에 내리꽂혔다. 일행들은 그 충격에 튕겨나가 여기저기를 굴렀다.
"끄, 윽……."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쏟아져나오는 가운데,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고천수였다.
‘아, 시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는 걸 아는 고천수는 이마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몸을 일으켰다.
"다들, 괜찮습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당장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씩 자신들의 생존을 알려 오기 시작했다.
"저, 전 여기……."
"괜찮습니다!"
"형, 저희도 괜찮아요!"
역시 추락 시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는 RT-920다웠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고천수는 자신의 몸에 큰 부상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중간중간에 건물 잔해가 늘어선 모래사막이 나타났다.
"후."
헬기가 미끄러질 때 모래가 충격을 완화해 줬다지만, 내려선 지금 상황에선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일단 발이 푹 빠졌다. 못 걸을 정도는 아니지만 이동하는데 불편함이 생기는 건 사실이었다.
‘아직인가.’
아직 좀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엔 건물 잔해들이 많았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천수 님, 준비 다 됐습니다."
일행들이 전부 헬기에서 빠져나오자 제나가 고천수의 옆으로 와 말했다.
고천수는 인원들에게 손짓하며 이동을 재개했다.
쉬지 못하는 강행군.
단시간 내에 이동을 계속하다 보니 일행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헬기에서 가방 안에 있던 걸 꺼내먹고 마셨다지만 제대로 된 휴식을 취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먼 곳을 내다봤다. 출구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높다란 하늘에 떠 있는 대기 유성들만 눈에 들어왔다.
‘겁나 힘드네.’
시청자들의 응답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당장 기댈 수 있는 건 스스로의 능력뿐이었다.
고천수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다가 멈칫했다.
크아아아아.
어디선가 작은 괴성이 들렸다.
고천수만 들은 것은 아닌지 일행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크아아아!
그때였다.
잔해 안에서 좀비 한 마리가 나타나 심하문에게 달려들었다.
"이런……!"
놀란 심하문이 그대로 총을 들어 올렸다.
타앙!
한 발이었다. 달려오던 좀비는 그대로 머리에 총알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
누구 하나 당한 사람은 없었지만 고천수는 숨을 죽인 채 주위를 경계했다.
좀비는 이거 하나로 끝은 아닐 터였다.
"천수 님?"
하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자, 제나가 물었다.
"더 나타나는 겁니까?"
"그러긴 할 텐데 말이지."
연달아서 나오지는 않는 걸 보니 바로 경계할 건 없을 듯했다. 고천수는 살짝 숨을 내쉬고는 다시 손짓했다.
일행들은 다시 이동을 시작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어디에선가 괴성은 계속 들리고 있었다. 눈앞에 직접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뿐이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고천수는 지하철역 근처에서나 볼 법한 실외 엘리베이터를 발견했다.
"……?"
그게 그냥 아무런 반응 없이 있었다면 고천수도 그냥 지나쳤겠지만, 불행히도 일은 그렇게 평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위잉.
엘리베이터는 작동하고 있었다. 아래에서 무언가 올라오고 있는지, 전자 표시기에는 B3부터 위층으로 차례대로 숫자가 변하는 중이었다.
철컥, 척!
고천수가 주먹을 쥔 뒤 엘리베이터를 가리키자 일행들은 각기 가진 무기를 서둘러 치켜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놈이라니 과연 무엇일까.
다들 긴장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마침내 그곳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타났다.
"……어?"
먼저 탄식을 뱉은 건 고천수가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인원들이었다.
"저, 저건!"
익숙한 얼굴이었다.
올라온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타난 건, 이미 저 아래층에서 헤어지고 말았던 또 다른 동료였다.
"휴."
고천수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랬다. 엘리베이터에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휴였다.
하지만 고천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는 좀 달랐다.
그는 온몸에 부상을 입고 있었다. 옷깃은 찢어지고 팔과 다리, 그리고 몸통에 자상이 보였다. 당장 보이지 않는 상처도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치열한 전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고천수."
그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고천수를 바라보더니 살짝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조심해라."
풀썩.
그러더니 휴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쓰러졌다. 마치 장렬했던 전투의 여파를 견뎌내지 못한 것처럼.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행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고천수는 일단 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김하령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휴에게 달려갔다.
고천수는 나머지 일행에게 말했다.
"뭔가 있습니다. 다들 조심하세요."
휴가 한 경고를 그대로 내뱉은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
휴는 방찬혁을 상대한답시고 스스로 다른 층에 남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곳에 등장했다?
그렇다는 얘기는 또 다른 지름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휴가 지름길을 알고 있었을 리는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엘리베이터에 태워 위로 올려보낸 게 분명했다.
덜컹.
그때였다.
주변 건물 잔해 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일행들의 총구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고천수의 시선도 같은 곳을 향했다.
"고천수."
그러자 잔해 내부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하나 있었다.
"정말로 날 두고 그대로 가려고 했나?"
휴와 마찬가지로 그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고천수는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혹시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쉽지는 않을 거라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빠져나왔다는 것인가.
휴까지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고천수. 뭐든지 네 계획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나?"
불온한 목소리가 하는 말에 일행들이 고천수를 쳐다보았다.
다들 예상했던 상황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들은 고천수가 어떻게 할지를,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지독한 놈이네.’
고천수는 경악했으면서도 도리어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감정이 누그러지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디엔드의 교주, 방찬혁.
정체가 확실하고도 남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천수는 건물 잔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방찬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운데, 그곳에서는 계속해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도 났으나 아직 고천수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크아아아.
하지만 이내 괴성들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나서는, 방찬혁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 무슨 짓을……!"
건물 잔해 안에서 뭔가가 열렸다.
괴성은 막혀 있던 벽이라도 넘어선 것처럼, 이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격 준비!"
고천수는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멍하게 서 있던 그들은 괴성들이 가까워지는 상황에 무언가를 직감한 듯 총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일은 오래잖아 일어났다.
수십 마리의 좀비가 거의 동시에 거대한 건물 잔해 밖으로 달려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