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02화 (202/224)

202. 이상한 나라의 트럼프 병정 (2)

‘헬기……?’

이곳에 있는 인원은 족히 탈 수 있을 듯한 크기의 헬기였다. 고천수의 시선이 거기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자, 일행들도 모두 고개를 돌렸다가 입을 벌렸다.

"저건……."

"헬기 아닙니까?!"

"멀쩡해 보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에 헬기는 그리 문제가 있지는 않은 듯했다. 고천수의 시선에서 확인되는 외관만큼은 확실히 괜찮았다.

"천수 님?"

제나의 물음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게 있었던가?’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에는 당연히 헬기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판타지여도 세계관 색채는 맞추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층은 여러 개의 세계관이 혼합돼 있는 구조였다. 한 범위 안에 다양한 서로 다른 세계관의 물건이 공존하고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빌딩 자체도 그 증거이지 않은가.

‘아.’

고천수는 뒤적거리듯 여러 게임을 생각하다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형?"

"왜 그래?"

"뭐라도 있습니까?"

일행들이 고천수의 낯빛을 살피며 한 마디씩 물음을 던졌다. 고천수는 빌딩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다시 올려다보았다.

대략 10층의 건물이었다.

"올라갑니다!"

고천수는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얼른!"

일행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둘러 건물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하지만 그대로 길이 일사천리였던 것은 아니었다.

건물은 제법 멀쩡한 편이긴 했지만 곳곳이 방화벽으로 막혀 있었다.

고천수는 먼저 달려가 그중 하나를 붙잡고 힘을 줬다.

"제기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통 방화벽에는 밀면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열리는 공간이 있기 마련이건만, 이건 그렇지도 않았다.

방화벽의 손잡이에는 위아래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딱 봐도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본 고천수가 자신이 서 있는 바닥을 살폈다.

거기에는 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

고천수는 일행들에게 소리쳤다.

"빨리 오세요!"

그 외침을 들은 일행들이 고천수의 곁에 달라붙었다.

고천수는 함께 방화벽을 잡은 인원들이 4명을 넘어가자마자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여는 겁니다! 자, 하나, 둘…… 세엣!"

드르륵!

순간 방화벽이 시원하게 위로 올라갔다.

고천수는 그 상황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래, 인원수다!’

바닥에 적혀 있는 숫자는 바로 인원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계속 앞으로!"

복잡하지는 않은 방법이었다. 고천수는 일행들을 데리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방화벽이 몇 개나 나타났지만, 다행히도 현재 인원수로 불가능한 장벽은 나타나지 않았다.

고천수는 일행들과 비상계단을 찾아 오르면서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이걸로 끝이라고?’

방화벽을 여는 데 필요한 인원은 숫자가 4를 넘기지 않았다. 많지 않은 건 좋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도 함께 남고 있었다.

"천수 님!"

빌딩 6층.

함께 달려가던 단원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앞에……!"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에 열셋의 트럼프 병정들이 서 있었다.

고천수가 미끄러지듯 멈춰 서자, 일행들도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다이아몬드!’

이번엔 다이아몬드 마크가 그려진 병정들이었다. 고천수는 서둘러 품을 뒤적거렸다.

그사이, 다이아몬드 병정들은 창을 든 채로 이쪽으로 달려왔다.

‘기다리고 있었다!’

클럽 병정이 나타났다는 건 근처에 다른 마크를 가진 병정들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렇기에 고천수는 이미 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촤락!

고천수는 품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은행에서 꺼내 와 아직도 남겨 놓고 있던 것이었다.

"……?"

일행들이 제각기 표정에 물음표를 품는 순간, 고천수는 바로 돈다발을 다이아몬드 병정들에게 뿌렸다.

그러자 고천수 외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땡그랑!

다이아몬드 병정들이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놓고 돈을 줍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경 쓰지 말고 그냥 가세요! 돈 다 주울 때까지는 괜찮을 테니까!"

재물을 뜻하는 다이아몬드 병정은 화폐에는 사족을 못 쓰는 설정을 갖고 있었다. 고천수는 다이아몬드 병정 사이를 유유히 달려 나가며 일행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 병정을 따돌렸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계속 달려 8층으로 올라가자 이번에는 다른 마크를 가지고 있는 병정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페이드 병정들.

창 대신 짧은 검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모두 공격 태세를 취했다.

"천수 님, 이번에도……."

"총은 안 됩니다."

고천수는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총으로 공격하지 말고 총검을 쓰세요. 스페이드 병정은 칼만 통합니다."

스페이드는 검을 의미했다. 쓰러뜨리려면 검술로 상대해야 하는데, 둔기보다 더욱 치명적인 무기로 합을 다퉈야 하는 만큼 당연히 클럽 병정들보다 위험했다.

카앙!

전열을 갖출 새도 없었다.

일행은 스페이드 병정들과 빠르게 뒤섞였다.

캉! 카앙!

스페이드 병정들이 가지고 있는 검과 일행들의 총이 이리저리 부딪쳤다.

"큭!"

"끄악!"

"크헉!"

백병전에서는 확실히 스페이드 병정들이 우위였다. 살짝 그인 정도에도 피해는 엄청 났다. 일행들이 하나둘씩 자상을 입고 비명을 질러대는 모습을 보며 고천수는 어느새 부상자들을 내리고 작아져 있는 흑구와 온리베어에게도 칼을 쥐여 줬다.

"둘, 할 수 있지?"

흑구와 온리베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역할은 쉽게 말하면 기마병이었다. 서로 달라붙어서 위태롭게 싸우고 있는 두 진영을 가로지르며 온리베어는 종횡무진 칼을 휘둘러댔다. 입에 칼을 물고 있는 흑구도 스페이드 병정들의 발목을 그으며 달려 나갔다.

덕분에 스페이드 병정들의 시선이 흑구와 온리베어에게 쏠렸다. 하지만 크기도 작아진 흑구와 온리베어를 쫓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틈을 타 일행들은 스페이드 병정들을 하나씩 해치우며 앞으로 전진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고천수의 외침에 의기가 생긴 듯 일행들은 함성을 지르며 스페이드 병정들을 밀어냈다.

콰득! 찌익!

일행들의 칼에 찢긴 스페이드 병정들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흐느적거렸다. 몸통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인 사람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 모습은 꽤나 기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전진!"

쫘아악!

마침내 일행들은 스페이드 병정들을 죄다 찢어 버리고 앞으로 나갔다.

부상을 입고 여기까지 따라왔던 두 명은 이미 스페이드 병정들에게 당해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죽었다. 허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남은 숫자는 열둘! 클럽 병정까지는 열셋!’

아직까지도 괜찮았다.

스페이드 병정들까지 처리하며 나아간 길에도 여전히 방화벽들이 존재했지만, 딱 4라는 숫자만 계속해서 나타났다.

앞으로도 방화벽을 여는 데 4명 이상만 필요하다면, 여기서 일행들이 더 당해도 헬기까지는 충분히 당도할 수 있었다.

"하, 시발!"

"또야!"

"미친!"

9층.

지친 일행들의 앞에 날카로운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하트 병정들이 나타났다. 고천수는 먼저 앞으로 나서며 두 손을 모았다.

하트 병정들은 굉장히 강한 편이지만, 파훼법은 가장 쉬운 편이었다.

마음을 나타내는 그들에게는 통과비로 성의만 표시하면 됐다. 고천수의 신호에 다들 손을 그러모으자 하트 병정들은 그대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고천수는 그들을 지나치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남은 수명 - 05:32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시간상 이 위에 있는 헬기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

하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한 난관은 이내 찾아왔다.

"뭐야, 이거."

10층에서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중간이 끊겨 일행은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장소의 바닥에는 4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방화벽도 없는데.’

고천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설마…….’

한 가지 사실이 떠오른 고천수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자 일행들이 각기 입을 열었다.

"천수 님?"

"위까지 손이 안 닿을 것 같습니다."

"너무 높습니다."

10층에서 옥상까지 향하는 길은 유독 높아 보였다.

"안 되나?"

고천수가 묻자 온리베어는 흑구를 다시 대형화해 계단이 부서진 곳을 넘어가려고 해 보았다.

하지만 흑구는 위로 올라가려다가 깜짝 놀라더니 다시 작아져서 떨어져 내렸다.

깨앵!

고통을 호소하는 흑구를 보며 고천수는 위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컬러 광대가 그려진 카드가 뿅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컬러 조커!’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카드 병정들 중에 가장 성가신 놈들 중 하나였다.

뿅망치에 맞으면 너무 강한 신경 자극이 오기 때문에 잠깐 동안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 녀석을 잡으세요!"

고천수는 뒤에서 계속 쫓아오고 있던 클럽 병정을 끌어왔다.

그러고는 일행 셋을 불러 넷을 완성해 클럽 병정을 헹가래했다.

"이 상태로 저쪽에 던지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반론은 필요 없었다.

고천수는 그들과 함께 클럽 병정을 위아래로 흔들다가 신호를 주었다.

"지금입니다!"

팔락이던 클럽 병정은 날아간 화살처럼 위까지 쑤욱 올라갔다. 일반적인 물리력을 벗어나는 동작이었다.

정해진 숫자를 지켜서 얻은 힘이었다.

콰득!

올라간 클럽 병정은 바로 활약을 시작했다.

들고 있던 곤봉으로 컬러 조커를 때렸던 것이다.

뾱! 뾱!

컬러 조커가 대항하듯 뿅망치를 휘둘러댔지만 클럽 병정에게는 소용없었다.

클럽 병정은 컬러 조커를 미친 듯이 몰아붙였다.

가장 약한 카드가 최강급 카드를 잡는 건 이 게임에서 약속된 구도였다. 두 카드는 앙숙으로 설정된 카드들이었다.

다만 클럽 병정이 시간을 끄는 틈을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4명 법칙을 활용해 계단으로 한 명씩 일행들을 날려 보냈다.

계단 위로 올라온 고천수는 아래에 남은 넷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누가 위로 던져 줄 수가 없었다.

다만 위에서 끌어 올려 줄 수는 있었기에, 고천수는 주변 일행들과 옷으로 끈을 만들어 끌어올려주려고 했다.

"끄악!"

"끅!"

"이, 이 자식…… 크악!"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갑자기 아래에 나타난 흑백 조커가 칼을 휘둘러댄 탓에, 남아 있던 네 명은 순식간에 살해당했다.

컬러 조커를 찢어 버리고 있는 클럽 병정을 내려 보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고천수는 클럽 병정의 위에 떠 있는 1분 30초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끼익.

옥상 위에는 확실히 헬기가 있었다.

그것도 멀쩡한 헬기였다.

고천수는 서둘러 다가가 헬기 안을 확인했다.

"천수 님, 근데 저희 헬기를 조종할 인원이……."

제나가 뒤늦게 의문을 꺼냈다.

여태 데려온 인원 중에 헬기 조종이 가능한 사람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고 해도 지금 남은 사람 중 제나를 제외한 원래 마키나 단원은 심하문, 소지영 외 묵묵해 보이는 사람 한 명뿐이었다.

묵묵해 보이는 단원은 이미 고개를 젓고 있었다.

즉, 여기에 헬기를 조종할 수 있는 인원은 없었다.

여기로 오는 인원 조합을 잘못 했다고도 볼 수 있었지만, 고천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헬기 위로 올라탔을 뿐이었다.

휘이이잉.

그러자 헬기가 날개깃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 그렇게 약속되어 있는 물체인 듯.

남은 수명 - 24:59

다른 게임에 나오는 이 자동 헬기의 수명이 현재 장소의 수명과 다른 것을 확인하며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들, 제발 출구가 멀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 시청자 없이 기지로 생존한 고천수는 알지 못했다.

걱정해야 할 것은 남은 길이 아니라 잠시 잊은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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