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 이상한 나라의 트럼프 병정 (1)
"뭐, 뭐야."
"이건?"
일행들이 놀라며 눈을 크게 뜨는 사이, 지금 막 도착한 것들이 멈춰 섰다.
"트럼프……?"
누군가가 중얼거린 대로, 나타난 건 13개의 트럼프였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몸통은 카드로 되어 있었으며, 각기 숫자나 알파벳은 달라도 모두 클로버 잎 모양이 찍혀 있었다.
클럽 트럼프 병정.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에 나오는 적들이었다.
척!
그리고 그 사실을 고천수가 설명할 필요는 없다는 듯, 클럽 병정들은 손에 들고 있는 곤봉을 치켜들었다.
"이거!"
고천수는 지체하지 않고 소리쳤다.
"다들 이거 빼서 들어요! 다른 건 쓰지 말고!"
콘크리트 잔해에 떨어져 있는 철근들.
클럽 병정들이 다가오는 것을 총을 들던 일행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요!"
총이 아닌 철근.
더 좋은 무기를 놔두고 다른 쪽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일행들은 잠깐 주춤했지만, 고천수의 말에 의구심을 품을 이는 없었다.
일행들은 이내 철근을 들었다.
그때, 클럽 병정들 중 하나가 지척까지 다가와 단원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팡!
날았다.
철근을 들어 공격을 막은 단원은 충격량까지 줄이지는 못했다.
땡그랑!
철근까지 놓치며 날아간 그는 근처 잔해 속에 떨어져 파묻혔다.
"이런 시……."
팡!
그 광경을 보며 욕지거리를 하던 단원 하나도 이내 곤봉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중상.
누가 봐도 그 정도의 피해는 입었을 거라고 보이는 타격이었다.
"처, 천수 님!"
"강한 것 같습니다!"
"총을……."
아직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았으면서 일행들은 겁에 질렸다.
한 단원은 자기 앞에 클럽 병정이 다가오자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탕!
결국 한 발 갈겼지만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파아아앙!
총을 맞은 클럽 병정이 휘두른 곤봉에 맞은 단원은 처음의 피해자보다 더 먼 곳으로 비행해버렸다.
"다른 건 쓰지 말라고 했잖아!"
고천수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소리쳤다.
그 강렬한 외침에, 다른 몇 명도 무심코 들어올리고 있던 총을 내렸다.
"으아아!"
먼저 행동에 나선 건 양민철이었다.
그는 철근을 휘둘러 자신에게 향하던 곤봉을 피하고 클럽 병정 하나를 때렸다.
콰직!
총알이 적중했을 때와는 달랐다.
철근에 맞은 클럽 병정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몸을 숙이고 주춤거렸다.
몽둥이.
트럼프 카드에서 클럽은 바로 그런 뜻을 상징하고 있었다.
클럽이 무기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클럽의 약점이 되는 것은 모두 몽둥이로 분류되는 것들뿐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에서 클럽 병정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무기로 주어지는 또한 곤봉이나 철근, 나무 방망이 같은 것들이었다.
이외의 것들은 효력을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범주에서 벗어난 것으로 타격하게 되면 병정의 힘을 높게 올려 주는 수가 있었다.
퍽! 파악!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실력이 늘었다고 해야 할까.
양민철이 몇 번의 곤봉질을 피하며 철근을 휘둘러댄 모습이 제법 인상적이었기에 일행들이 다시 전의를 불사를 수 있었다.
"공격해!"
"속도는 우리보다 느려!"
"연약한 몸을 노려!"
클럽 병정들은 카드로 만들어져 있는 몸통이 약했다.
차분함을 되찾은 일행들은 클럽 병정들을 상대할 방법을 찾아내고 곧바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파악! 퍽! 퍼억!
클럽 병정들은 일행들이 휘두른 철근에 맞아 휘청였다.
그리고 그사이에 다시 일행들이 철근을 내리찍어 클럽 병정들을 바닥에 눕혀 버렸다.
잠시 겁을 잊어버렸을 뿐인데 클럽 병정들을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한 대만 맞아도 렉 걸린 듯 잠시 버벅거리는 병정들은 일행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파악!
결국 병정들은 손쉽게 바닥에 쓰러졌다.
‘아직…….’
하지만 죽진 않았다.
고천수는 누워 있는 병정들을 보며 일행들에게 지시했다.
"다 손목을 공격해서 무기를 떼어내세요. 숫자 3인 녀석만 빼고."
한 번 고천수의 열 받은 표정을 보았던 일행들은 이젠 일말의 군말조차 하지 않았다.
일행들은 서둘러 병정들의 손목을 내리쳤다.
그러자 비명을 지른 병정들이 곤봉을 놓치고는 모두 흙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놔."
고천수는 누워 있는 클럽 3 병정에게 다가가 말했다.
"놓으라고."
그러자 클럽 3 병정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기 말고는 아무도 살아남은 클럽 병정이 없다는 것을 안 녀석이 스스로 곤봉을 내려놓았다.
"저, 저게……."
"되는 거야?"
"뭐지?"
일행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클럽 3 병정은 고천수의 옆에 섰다.
고천수는 더 이상 병정에게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토끼를 바라보았다.
남은 수명 - 24:53
토끼에게 남아 있는 수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천수는 주위의 일행들도 바라보았다.
남은 수명 - 62Y
남은 수명 - 58Y
남은 수명 - 70Y
대부분의 수명이 많이 남아서인지 년으로 표시됐다.
하지만 이 수명은 어디까지나 지금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시 죽음까지 가게 되는 시간을 말해 줄 뿐이었다.
즉, 지금 뜨고 있는 일행들의 수명은 고천수에게 그리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남은 수명 - 24:11
땅을 쳐다보자 거기에도 숫자가 나와 있었다.
지금 보이는 수명은 유의미한 수명을 가졌을 때에나 나타나는 만큼, 그냥 흙 알갱이의 수명을 알려 주고 있을 리는 없었다.
이건 범위였다.
숫자는 특정 범위의 수명을 알려 주고 있었다.
고천수는 토끼와 클럽 병정에게 떠 있는 수명을 확인했다.
그 수명들이 땅바닥에 떠 있는 숫자와 일치했다.
‘이 세계관에 남은 시간이 고작 24분.’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는 해당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게 돼 있었다.
"이동합시다."
고천수는 철근을 허리춤에 챙기고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천수 님, 환자는 치료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김하령이 그가 잊고 있던 것을 알려 주었다.
고천수는 멀찍이 처박혀 있는 단원 둘을 내다보았다.
둘은 죽지는 않았는지 손을 위로 치켜들고 있었다.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안 데려가면 인원은 12. 그것도 흑구랑 온리베어 포함해서.’
아직 적지 않은 숫자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고천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나라도 더 데려가긴 해야 하나?’
바로 아래층에서 버스에 탈 수 있었던 인원은 15명뿐이었다.
당연히 모두가 다 생존할 수는 없으니 반드시 이 층에서 15명이 살아남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 층에 올 수 있었던 게 15명뿐이라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웬만하면 많은 인원이 있는 게 좋기는 했다.
"하령아, 상태 확인 좀 해 줘."
"네, 알겠어요."
김하령은 잔해에 처박힌 사람들에게 다가가 서둘러 상태를 확인했다.
"천수 님."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첫 번째 사람은 반응 보니까 왼팔이 부러진 것 같고요. 두 번째 사람은 갈비뼈가 몇 개 나간 것 같아요."
"데려갈 만한가?"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요. 개한테 좀 태워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 이제 치료해도 되나요?"
듣자하니 고심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끝낼게요. 전 진짜 금방 끝낼 수 있어요."
김하령은 신난 표정으로 부상 입은 단원들을 치료했다. 물론 시간이 없는 탓에 제대로 된 치료는 못하고 일단 걸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뿐이었지만.
"흑구야. 사람 좀 태워야겠다."
고천수의 지시를 들은 흑구가 얼른 대형화했다.
온리베어는 부상자들이 흑구 위에 탈 수 있게 도와주었다.
"뭐야, 이거."
하지만 부상자들을 태우자 이상한 현상이 벌어졌다.
바로 땅 바닥에 떠 있는 수명이 갑자기 10분으로 줄어든 것이었다.
고천수는 놀라서 부상자들을 다시 흑구한테서 내리게 했다.
그러자 수명은 다시 원래 상태인 20분대로 늘었다.
‘망할.’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탑승물을 타지 않고 속도를 높이려는 모습을 보이면 아예 시간을 줄여 버리는 듯했다.
"천수야, 저기."
난감해하는 고천수를 보며 장서연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쇼핑 카트 같은 게 몇 개 처박혀 있었다.
고천수는 단원들이 카트를 가져오게 해 부상자들을 거기에 실었다.
효용성은 떨어지더라도 당장은 이렇게라도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렇게 상황을 마무리하고 다시 출발하기 전, 고천수는 바닥에 놓여있는 토끼에게 다가갔다.
토끼는 아직도 힘이 남아있는지 마구 발버둥 치고 있었다.
"넌 가고 싶은 대로 가라."
고천수는 토끼의 끈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토끼는 시계를 내놓으라는 듯 고천수의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댔다.
"배에 바람구멍 나고 싶냐?"
하지만 고천수가 친절하게 인사를 날려주자 토끼는 시계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달려갔다. 고천수는 그런 토끼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토끼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숫자는, 하염없이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
무너져가는 건물들 사이를 걸으면서 고천수는 곁에 있는 병정을 돌아보았다.
‘클럽 병정은 4가지 종류 무늬 중 최약체…….’
나타난 게 더 높은 등급의 무늬가 아니어서 다행이기는 했지만, 그 말은 아직 다른 무늬의 병정들이 더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괜한 소란을 피하려면 역시 차를 구해 이곳을 빠르게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수명에 눈을 뜬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살아있는 차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번엔 지하 주차장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흑구도 못 타고, 하.’
정말로 사람을 열 받게 만들어 놓은 법칙이었지만, 어디에다가 따질 수도 없었다.
그나마 시청자들과 소통이 가능할 때는 채팅창에 화풀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소통은커녕 채팅창을 봐도 여전히 잠잠하기만 했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완전히 없어진 건 절대 아니었다.
기억하기로 후원은 분명히 들어왔다.
채팅창만 공백으로 있을 뿐, 시청자들이 고천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다만 후원액에서만큼은 그 전과 그다지 크게 차이가 없었다.
고작해야 몇 젠, 정확히는 2젠만이 후원됐을 뿐이었다.
후원할 때 같이 적어두기 마련인 후원 문구마저 없어서 이것도 지금 정상적인 상태라고는 볼 수 없기도 했다.
"형님들."
불러 봤지만 대답이 없었다.
"저 잘 가고 있는 거 맞습니까?"
[띠링! 우리아들잘하고있지 님이 1젠을 후원하셨습니다.]
반응은 있었다.
이걸로 역시 시청자들이 남아 있기는 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초스포금지 구간인지 뭔지 형님들이 사라진 건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제가 봤을 때, 이 층 출구까지 남은 길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해가 떠 있는 동쪽의 하늘에는 멈춰 있는 유성들이 잔뜩 보이고 있었다.
대기 유성.
미리 떨어지지 않고 그곳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됐다.
"이 근처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어도 저건 에바잖아요, 솔직히."
이곳에서 대충 보이는 숫자만 해도 수백 개였다.
한꺼번에 떨어진다고 하면 대항하는 게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채팅창 좀 어떻게 해봐요. 존나 필요할 때 없으니까 힘들다니까요."
하지만 그 흔한 ‘ㅋㅋㅋ’마저 올라오지 않았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며 다른 하늘로 시선을 옮기다가 멈칫했다.
아직 무너지지 않은 건물 위였다.
거기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옥상에 하나 놓여 있었다.
"저건……."
중형 헬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