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200화 (200/224)

200. 이상한 나라의 수명 토끼

속지(屬地).

한 세계 안에서 태어난 존재는 그곳의 영향력에 묶이게 된다. 폴링월드의 세계관에 추락한 것들은 그 개념의 적용을 받는다는 점이 두 눈으로 확인됐다.

빅 바디는 서울의 조각들이 떨어져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일정 거리의 범위에서만 활동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행이네.’

멸망하거나 멸망하고 있는 세계의 조각을 끌어놓고 있는 폴링월드의 세계관 때문에 헷갈리는 부분이었지만, 한 종류의 쓰레기를 모아놓는 곳이 존재하는 건 분명 정크야드의 세계관이었다.

즉, 이 층은 한 가지 게임의 세계관만 존재하는 건 아니었다.

고천수가 알고 있는 여러 게임의 세계관이 뒤섞여 있을 터.

개념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빅 바디가 그대로 따라올 가능성도 있었지만 방금의 일로 고천수는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 추적자는 사람만 조심하면 되나?’

사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몬스터들은 폴링월드에서도 유일하게 플레이어를 뒤쫓아 오는 악질이었다.

앞으로 맞닥뜨릴 다른 멸망 세계의 조각들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은 피할 수 있었지만, 페이크맨은 계속 따라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푸드, 푸드드드.

그때였다.

잘 달리고 있던 트럭이 갑자기 덜컥거리며 속도를 줄였다.

"뭐죠?"

"이, 이게 갑자기……."

고천수가 물으려니 김하문 일병이 당황한 표정으로 답했다.

"조, 조작이 안 됩니다!"

그 말대로 김하문 일병이 핸들을 돌리든 브레이크를 밟든 트럭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망할!’

고천수가 뛰어내릴 각오까지 하고 창문 밖을 바라볼 때였다.

다행히 트럭은 알아서 천천히 속도를 줄여 나갔다.

덜컥!

그렇게 완전히 트럭이 멈춰선 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괜찮습니까?"

트럭이 어디 부딪친 건 아니었지만 속도를 줄이는 과정에서 몇 번이나 흔들림이 있었다.

일행들이 다쳤나 싶어 돌아보려니, 다들 괜찮다며 손짓을 전해 왔다.

고천수는 곧장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트럭에 별 이상은 없는 듯했다.

"천수 님, 제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행 중에 있던 소지영 일병이 짐칸에서 내려 다가왔다.

"정비는 제가 전문이라……."

고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트럭의 보닛을 열어 안을 살펴봤다.

"응?"

그런데 그는 안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밖에서 볼 때는 멀쩡해 보였건만, 의외로 문제가 컸던 것일까.

"천수 님, 여기 좀 봐 주시겠습니까?"

"문제가 어떻길래……."

그의 말에 안을 들여다보던 고천수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이거."

예상외였다.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조금 티 나는 정도일 줄 알았지만, 안은 누군가 난도질을 한 것처럼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뭡니까?"

고천수가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소지영이 똑같은 얼굴로 말했다.

"이게, 이상합니다. 누가 일부러 부숴 놓은 것처럼 이렇게 되는 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즉, 누가 일부러 부수지 않는 이상 갑자기 이렇게 될 리는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트럭은 계속 달리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해 놓을 틈은 없었다.

혹 몬스터가 달라붙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랬다면 조수석에 앉았던 고천수가 몰랐을 리 없었다.

아니면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는데 너무 깨끗했다.

‘그래.’

그리고 결정적으로 고천수는 이 현상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이 차로 오래 갈 수는 없다고 미리부터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에 빨려온 멸망 세계의 조각들은 이미 죽어 있거나 죽어 가는 것들의 잔재였다. 이미 수명이 거의 다한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장 써먹을 수 있을 듯해도 결국에는 오래 쓰지 못하고 버리게 될 뿐이었다.

쉽게 말해서 시한부였다.

이 트럭에게도 정해진 시간이 존재했고, 그게 다하면서 완전히 망가진 것이었다.

"어쩔 수 없네요. 일단은 걸어서 이동하죠. 또 차를 찾을 곳이 있을 겁니다."

고천수가 손짓하자 일행이 트럭에서 모두 내렸다.

철컥, 칙, 철컥.

일행들은 긴장한 듯 모두 무기를 점검했다.

고천수는 그들의 반응을 보며 앞으로 갈 길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 층에는 많은 곳에 유성이 떨어지고 있었다.

각각의 구역이 어떤 세계관의 색채를 띠고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지구 지상에서 가장 강한 축에 속했던 빅 바디까지 만났던 만큼 일행들이 두려움을 갖는 것도 고천수는 이해가 갔다.

고천수도 이 상태에서 빅 바디를 또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천수 님, 저희 이 상태로 괜찮겠습니까?"

제나가 고천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따지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녀는 고천수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궁금한 듯했다.

"걱정 마라."

하지만 고천수는 긴장은 하고 있어도 무서워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변수가 있다고 해도 고천수가 알고 있는 것들이 조합된 장소였다.

필요한 것들만 확보할 수 있으면 어찌됐든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린 끝까지 갈 수 있을 테니까."

"제가 할 일이 있겠습니까?"

"아직은."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즉각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했다.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해도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일부러 먼저 찾을 생각은 없었다.

이 층의 범위는 그야말로 무한대.

한 번 길을 헤매기 시작하면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고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갈증이 계속될 때 사막을 헤집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었다.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능한 빠르게 출구로 향해야만 했다.

딸깍.

하지만 그렇게 일행을 데리고 움직이려던 고천수는 순간 들린 소리에 귀를 쫑긋할 수밖에 없었다.

"천수 님, 무슨 일이라도……."

"쉿!"

무슨 일이냐고 묻는 단원에게 손을 올리며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쿵, 쿵…….

유성들이 떨어져서 생기는 울림 때문에 다른 작은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들렸다.

딸, 깍.

"다들 찾으세요!"

고천수는 급하게 소리쳤다.

"주변에 토끼가 있을 겁니다! 빨리 찾으세요!"

"토끼……?"

고천수의 외침에 일행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고천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얼른!"

심각한 내용이란 것을 알아챈 일행들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앗! 저, 저기!"

"어디!"

"저쪽인가?"

일행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고천수는 일행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같이 고개를 이곳저곳으로 돌려댔다.

아직 고천수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

하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고천수는 회중시계를 딸깍이고 있는 토끼를 발견했다.

"저거!"

고천수는 토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시계를 뺏어야 됩니다!"

그러자 일행들이 일제히 토끼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한 토끼는 흠칫하며 어딘가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우르르.

토끼가 가는 곳으로 일행들이 일제히 몰려갔다.

하지만 토끼는 작고 빨랐다. 회중시계는 어느새 토끼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포위망을 갖추세요!"

무조건 몰려 다니면 토끼를 잡기 힘들었다.

주위에 토끼가 몸을 숨길 장소가 많은 만큼, 잘못하면 놓칠 수 있었다.

‘실수는 안 돼!’

한 번 놓치면 다시 찾기 힘든 토끼였다. 고천수는 총을 들고 토끼에게 겨눴다.

‘간다.’

탕!

티잉!

총알이 날아가고 난 뒤 이내 차가운 금속의 마찰음이 들렸다.

총알은 회중시계에 맞았다.

토끼는 한 콘크리트 잔해 안으로 몸을 숨겼다.

"이런, 씨……."

고천수는 총을 파지하고 잔해 옆으로 다가갔다.

다른 일행들도 잔해 근처로 몰려들어 작은 포위망을 형성했다.

‘토끼가 있으면 여기도 빨리 지나가야 한다는 얘긴데.’

이 토끼가 나온다는 건 여기가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라는 게임의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바꿔서 공포물로 만든 것인데, 희한하게도 토끼가 주인공인 공포 게임이었다.

토끼가 가지고 다니는 시계는 주변 대상의 수명을 알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한 번 딸깍이면 그 수명들이 보이고, 한 번 더 딸깍이면 다시 보이지 않게 되는 식이었다.

수명을 보게 되면 그 능력을 감지할 수 있는 녀석들이 공격하기도 하므로, 시계를 적절하게 운용해 주변에 있는 시한부 물체들로 위기를 타파해야만 하는 것이 이 게임의 골자였다.

탕!

고천수는 시계가 필요했다. 토끼가 게임의 주인공이든 뭐든.

"시계 내놔!"

안에서 토끼가 시계를 딸깍이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계속 딸깍이면 시계를 켰을 때보다 더한 놈들이 나타나게 돼 있었다.

지금 이 토끼는 그놈들을 불러내 이쪽을 상대하게 할 생각인 듯했다.

‘망할.’

이렇게 오래 시간을 끌면 불리했다.

고천수는 주위를 다시 둘러보았다.

다른 방법을 써야만 했다.

"라이터 가지고 있는 사람!"

고천수가 소리치자 장서연이 품에서 라이터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러자 고천수는 바로 근처로 달려가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왔다.

그러고는 옷깃을 찢어 막대기 끝을 둘렀다.

그가 뭘 하려는지를 알았는지 소지영이 팔을 들어보였다.

"천수 님! 더 잘 타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막대기를 받아들고는 트럭으로 달려가 연료통에 넣어 끝을 적셔 왔다.

고천수는 그 막대기를 다시 돌려받아 장서연의 라이터로 바로 불을 붙였다.

"나와, 이 새끼야."

중얼거리며 고천수는 막대기를 잔해 안쪽에 쑤셔 넣었다.

토끼 또한 수명이 한정되어 있는, 이상한 나라의 집토끼란 게임의 잔영일 뿐이었다.

토끼가 쓸데없이 수명을 늘리는 동안 아직 망하지 않은 지구와 이곳의 사람들이 죽어 가게 되어 있었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넌, 오래 못 버텨."

쓰으으으.

막대기에 붙어 있던 불이 연기를 안에 가득 채웠다.

매캐한 검은 연기가 콘크리트 속을 헤집었다.

"켁."

"콜록!"

"콜록콜록!"

주위의 일행들도 밖으로 새어나오는 연기를 맡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고천수는 눈이 벌게지도록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청자들이 보고 있다면 고천수, 네가 더 무섭다고 할 지경이었다.

파앗!

그때였다.

연기를 버티지 못했는지, 토끼가 마침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탁!

고천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토끼의 두 귀를 잡아챈 고천수가 뒤늦게 기침을 하며 주춤거렸다.

"콜록! 콜록! 자, 잡았다."

토끼는 붙잡히자마자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고천수는 토끼가 발을 팔처럼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바로 앞발들끼리 잡아 버렸다.

"제나!"

이미 상황을 눈치 채고 주위에서 끈을 하나 찾아온 제나가 바로 토끼를 잡아 묶었다.

고천수는 그제야 토끼에게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바둥바둥.

네 다리가 다 묶인 토끼가 미친 듯이 움직였다.

고천수는 토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죽었다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네."

그건 고천수에게 잡히기 전에도 이미 이루어져 있던 일이었다.

고천수는 토끼의 등에 손을 뻗었다.

거기에는 회중시계가 있었다.

딸깍.

고천수는 회중시계를 빼앗아 한 번 딸깍여 보았다.

그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수명.

모든 물체의 위에 전자시계처럼 수명이 떠올랐다.

콘크리트 같은 물체는 유의미한 덩어리 위에만 숫자가 나타났다. 이미 부서졌거나 망가진 것들은 적용을 받지 않는 듯했다.

"이게……."

토끼가 가지고 있던 수명 시계의 효과.

하지만 고천수가 그렇게 순수하게 감탄만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척, 척, 척.

이상한 것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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