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흔적
서울의 흔적이었다.
고천수는 표지판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이곳은 지금 망해 버린 세계의 잔재가 모이고 있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이 표지판이 있는 장소 또한 망해 버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다.
고천수가 탑에 들어와 있는 이상 적어도 지금은 그럴 단계는 아니었다.
‘완전히 망하기 직전이라는 얘기인가?’
반드시 멸망이 완료되고 나서야 폴링월드에 그 조각들이 빨려 들어오는 건 아니었다.
그 직전에 해당되는 세계의 조각도 뜯어온다는 설정이 있었으니까.
즉, 지금 서울은 폴링월드의 인력에 의해서 붕괴되어서 조각조각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천수 님, 이거……."
"세상에."
"저거 구청 건물이잖아."
단원들이 놀라며 돌아보는 곳에 한 건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니, 버려져 있었다.
완전히 박살 나 있는 건물의 입구에 강남 구청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고천수는 그걸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제기랄.’
고천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에 당장 이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한다고 해도 지구는 당장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폴링월드에 서울이 빨려 들어가고 있는 이상 지구의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봐도 무방했다.
폴링월드의 인력은 차이는 좀 있지만 블랙홀의 메커니즘과 비슷했다. 한 번 빨아들이기 시작하면 놓지 않았다.
서울을 기점으로 다른 지역까지 이곳으로 빨려 들어오게 될 것이었다.
"천수 님."
그때였다.
제나가 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기 누군가 있습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부서진 시청 건물의 입구였다. 그녀의 말대로 그곳에서부터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또 그놈들인가?"
"제기랄."
"다, 다들 조심해."
단원들도 긴장하며 총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기척의 주인은 밖으로 몸을 내밀며 얼굴을 드러냈다.
"여, 여긴……."
중얼거리고 있는 그는 중년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더니, 고천수 일행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사, 사람!"
그러더니 그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 마!"
타앙!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는 단원이 쏜 총에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고천수가 쳐다보자 단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소리쳤다.
"그, 그림자가 없었습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쓰러진 남자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는 다가가 죽은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 역시 페이크맨이 분명했다. 다만 가지고 있는 신분증은 대한민국, 그것도 서울시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지랄 맞네, 진짜.’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부터는 한국에 있던 사람들까지 적으로 맞이해야 할 판이었다.
"천수 님, 다시 차에 타시죠.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심하문이 차를 가리키며 식은땀을 흘렸다.
차는 자꾸만 덜컥거리고 있었다.
‘벌써 문제가?’
고천수는 숨을 삼켰다. 차의 수명이 그리 길게 가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다들 차에 타세요!"
고천수의 지시에 일행들은 다시 차에 올랐다.
이내 출발하는 차 뒤로 강남구청의 건물이 멀어져갔다.
***
이후로도 흔적은 계속 발견됐다.
서울의 건물들을 시작으로 각 지방의 랜드마크 같은 것들이 주위에 널려있는 것을 보며 모두가 탄식했다.
"한국이 통째로 부서져서 여기로 들어오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밖은 어떻게 된 거지?"
"이 탑은 괜찮은 건가?"
그 의문은 고천수도 가지고 있었다. 폴링월드가 한국을 빨아들이고 있다면 이 탑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탑 안에 폴링월드가 구현되고 있는 것이니 탑은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김포공항만 지금 보호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잠깐…….’
고천수는 순간 든 생각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온리베어!"
부르자 온리베어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혹시 지금 보급함 감지되는 거 없어?"
고천수가 묻자 온리베어는 주변을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뭔가 느껴지는 게 있으면 알려줘. 아마 뭔가 있긴 할 거야."
폴링월드가 빨아들이는 지역이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한국을 전 방위로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빨려 들어오는 건 대부분 잔재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보급함이었다.
‘폴링월드는 별걸 다 빨아들여서 갖다 놓기도 하니까…….’
한국의 구석구석을 조각 내 이 층에 떨어뜨려 놓았다면, 보급함도 근처에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툭툭.
그리고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온리베어가 뭔가 느껴진 게 있다는 듯 트럭 후면 창가를 두드렸다.
"후."
당장이라도 보급함을 손에 넣고 싶었지만 고천수는 차를 세우는 데는 망설임을 보였다.
‘생각해 보니 젠이 없는데.’
보급함이 있어도 아이템을 구할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아직도 시청자가 보이지 않는 채팅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콰앙!
게다가 폴링월드는 한국에서 사람들과 보급함만 끌고 온 것도 아니었다.
한 건물을 박살 내며 뒤에 따라붙은 몬스터가 있었다.
"저건……!"
"젠장!"
"빅 헤드다!"
머리가 집체만 한 거인 몬스터가 곳곳에 널린 잔해들에 몸을 박으며 트럭의 뒤를 빠르게 쫓아왔다.
타앙!
제나가 바로 총구를 돌리며 빅 헤드의 머리에 맞췄다.
우우우우!
하지만 그 정도로는 빅 헤드를 멈추기에 역부족이었다.
잠깐 어디 스친 것처럼 빅 헤드는 더욱 빠르게 달려왔다.
"저쪽으로."
고천수는 심하문에게 외진 골목길로 들어갈 것을 주문했다.
심하문은 그의 뜻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트럭을 골목길로 끌고 들어갔다.
쾅! 쾅! 콰앙!
빅 헤드가 좁은 골목에 부딪히며 길을 지나 오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길이 워낙 좁았던 탓에 빅 헤드는 여기저기 머리를 박다가 결국 몸이 끼어서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트럭은 그 틈을 타 골목을 빠져나와 큰 길을 내달렸다.
다행히도 빅 헤드는 더 이상 뒤를 따라오지 못했다.
콰앙!
대신 크롤러 한 마리가 나타나 트럭의 옆구리를 쳐 버렸다.
스키드마크를 그리며 밀려나 트럭은 한 번 넘어질 뻔하다가 겨우 균형을 잡고 달려 나갔다.
"망할……!"
심하문은 운전대를 꽉 잡은 채 룸미러로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트럭 뒤로 크롤러 3마리가 따라 붙어있었다.
"천수 님! 몬스터들입니다!"
"예, 보고 있습니다."
크롤러 셋.
많지는 않았지만 크롤러 한 마리의 파괴력을 생각하면 일행을 전멸시키기에 그리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아직 안전한 장소까지는 먼 것 같은데.’
고천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크롤러를 상대할 만한 것들이 없었다.
‘시청자들만 제대로 있었어도…….’
평소에 짜증나는 말들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필요할 때 채팅창에 보이지 않으니 상당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응?"
트럭이 향하는 방향 쪽에 절벽이 하나 있었다.
고천수는 조용진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했을 때를 떠올렸다.
"심하문 일병님."
"예!"
"혹시 이 차로도 드리프트 가능하시겠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심하문의 표정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그,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저는 특수 운전만 해 와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쉽지도 않습니다."
그사이에 절벽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고천수는 심하문에게 지시했다.
"심하문 일병님, 그럼 그대로 부탁하겠습니다."
고천수는 심하문이 트럭을 가지고 급작스러운 커브 회전을 할 때 크롤러들을 절벽 밖으로 내몰 수 있기를 바랐다.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크롤러를 상대할 때 제대로 먹혔던 방법이었다.
고천수는 과거의 경험과 심하문 일병의 실력을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물론 다른 보험도 들어있었다.
크아아아아!
크롤러들이 며칠 굶었는지 미친 듯이 트럭 쪽으로 다가왔다. 심하문은 겨우 핸들을 꾹 잡고는 기어를 바꾸고 좀 더 빠르게 차의 속력을 높였다.
부아아아앙!
결착이 나는 것은 고작 찰나의 일이었다.
심하문이 절벽에서 차의 방향을 틀자 일직선으로 뒤쫓아 오고 있었던 크롤러들이 멈칫하며 바닥을 세게 짚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터진 상태였다. 크롤러들은 제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절벽 쪽으로 떨어졌다.
트럭도 절벽의 끝에 바퀴가 몇 번씩이나 닿았다.
그때마다 심하문 일병이 식은땀을 흘리며 트럭의 균형을 맞춰 주었다. 그것으로도 조금 부족했지만, 고천수의 신호를 받은 온리베어가 몸의 일부를 대형화해 손톱을 지면에 찍음으로써 트럭이 안전하게 회전하게 도와주었다.
콰드드드득!
결국 트럭이 관성을 이겨내며 달려 나갔다.
이로써 패자는 크롤러들이 된 것이었다.
"천수 님! 됐습니다!"
감격에 겨운 듯 심하문 일병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잘 풀리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심하문 일병님."
"네?"
"이제 시작됐을 뿐입니다."
폴링월드가 가져오는 한국의 흔적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근처 하늘에서는 아직도 계속 유성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고천수는 밖에서 온 것들과 싸우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총과 칼만으로 무장한 것이 아닌, 아이템이 더욱 절실했다.
[띠링! 한도초과 님이 1젠을 후원하셨습니다!]
그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던 그때, 놀랍게도 고천수는 한도초과가 후원금을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님?!"
놀란 마음에 고천수가 외쳤지만 채팅창은 여전히 조용한 상태였다.
헛것이라도 본 것일까. 하지만 분명히 후원 알림이 있었다.
"형님들, 듣고 있으면 응답 좀 부탁드립니다."
고천수가 다시 한번 말했지만 아직 아무런 답변도 돌아오지 않았다. 고천수가 갑자기 들어온 후원금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그때, 또다시 후원 알림이 날아들었다.
[띠링! 아무도모름 님께서 1젠을 후원하셨습니다!]
이로써 공식적으로는 2젠이 확보됐다.
하지만 2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직은 값어치가 너무 작았다.
바랄 수 있는 건 갑작스럽게 들어온 시청자들의 후원을 좀 더 기대하는 것이었다.
콰앙! 쾅!
하지만 그걸 기다리기도 전에 이번엔 빅 바디가 나타났다.
"진짜 징글징글하네."
고천수는 인상부터 찌푸렸다.
빅 헤드보다 강한 저 개체는 공항에서부터 선착장까지 따라붙으며 고천수의 일행을 끊임없이 위협했던 몬스터였다.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을까.
직접 대적하기에는 역시 빅 바디는 너무 강했다. 물론 이 상태로 놔두면 빅 바디가 다가와 이 트럭을 손에 잡고 찌그러뜨릴 것이란 걸 너무 잘 알았다.
고천수는 총을 들어 올리고 조수석 창 밖에 몸을 내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총이라도 휘갈기고 나서 판단해도 될 문제였다. 이 상태로는 빅 바디에게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였다.
우우우우.
빅 바디는 쿵쿵쿵 뛰어와 트럭의 뒤에 주먹을 휘둘렀다.
다행히 허공을 때렸지만 빅 바디의 손은 트럭에 거의 닿을 뻔했다.
"진짜 이런 건 좀 끌고 오지 말라고……!"
하고 많은 것들 중에 이런 걸 한국의 흔적이랍시고 가져온단 말인가.
가뜩이나 대응하기 어려운 깡다구 있는 몬스터라 총으로도 해결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타앙!
물론 그것도 확인을 해 봐야 아는 일이었다.
"형님들! 빅 바디 떨어뜨릴 테니까, 보고 있다면 꼭 한도초과 님처럼 반응 부탁드립니다!"
타앙! 탕! 타앙!
그렇게 총알을 몇 발 소진했을 때였다.
촤아아아악!
빅 바디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미끄러졌다.
그리고 곧장 굳어 버린 듯 트럭을 더 이상 뒤쫓지 않고 멀어져갔다.
"뭐, 뭐지?"
"우리를 놔 줬어."
"뭐야."
일행이 전부 의문을 표했다.
고천수만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복기했을 뿐이었다.
‘멀리 벗어나지 못하나 보네.’
빅 바디는 자신이 나타난 곳에서 일정 범위를 쫓아오는 곳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고천수는 그 점을 확실하게 주지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