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종말 폐기장 (3)
"후우, 후우……."
"헉, 허억."
"하아."
한 빌딩 안.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1층 구석에서, 일행은 각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나?’
고천수는 좌우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다행히 낙오된 이는 없었다. 흑구와 온리베어도 모두 곁에 있었다.
"쫓아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홀로 뒤를 경계하고 있던 제나가 고천수에게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우스운 질문이었다.
"계속 달아나는 수밖에 없지."
이곳은 자그마치 멸망한 세계의 잔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페이크맨의 숫자 또한 상상을 초월할 수밖에 없었다.
"가자."
숨을 고른 고천수는 더 쉴 시간을 갖지 않고 일행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일행들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멈칫했다.
"좀만 더 쉬고 가면 안 돼요, 형?"
"여기 숨쉬기가 왠지 쉽지 않아."
"공기가 좀 탁한 것 같네요."
양민철, 장서연, 김하령이 각기 의견을 내는 동안 단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천수 님, 여기에 잠깐만 머물렀다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태까지 지나왔던 층하고는 뭔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안 됩니다."
고천수는 그들에게 단호하게 답했다.
"페이크맨들은 상당히 교묘합니다."
보이기만 하면 단순히 쫓아오기만 하는 좀비와는 결이 달랐다.
페이크맨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머리를 쓸 줄 알았다. 애초에 처음 접근할 때부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척 다가오지 않았던가.
시간을 주면 이쪽을 포위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수적 우위가 있는 그들에게 그대로 싸잡힐 수도 있었다.
‘내 스킬로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처음 페이크맨을 만났을 때, 어그로가 늦게 걸렸다. 그건 페이크맨의 행동이 처음부터 적의로 판정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가짜기는 해도 페이크맨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상대하기 상당히 까다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었다.
쉽게 말하면, 페이크맨들의 행동에 따라 어그로 스킬이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해낼 수도 있었다.
페이크맨이 함정 마냥 에러맨을 끌고 와 데려다 놓는 경우도 있으므로 미리부터 예민할 정도로 주의를 해야만 했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있을 겁니다. 그걸 찾도록 하죠."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주의를 한다는 건, 최대한 빨리 문제에서 회피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시다."
고천수가 움직이자 일행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리더가 결정을 한 것이니 그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다들 이내 고천수의 곁에 따라붙었다.
‘폴링월드라면 자구책도 비슷하겠지.’
이것저것 뒤섞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 층의 기틀은 폴링월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생존자를 위협하는 페이크맨도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고천수가 이미 알고 있는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았다.
끼기기긱.
가지고 있는 나침반은 360도로 계속 돌아가며 정확한 위치를 가리키지 않았다. 하지만 고천수는 빌딩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를 금세 확인했다.
태양이었다.
폴링월드의 태양은 동쪽에 떠 있었다.
굳이 나침반을 보지 않아도 태양을 따라서 가면 동쪽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 보자.’
고천수는 거대한 도로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그는 한 건물 앞에서 흠칫하며 멈춰 섰다.
‘찾았다……!’
은행이었다.
고천수는 일행들이 뒤따라오는 것을 보며 먼저 은행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은행도 그리 멀쩡하지는 않았다.
곳곳이 포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서져 있고, 창구에 있는 컴퓨터는 이리저리 처박혀 있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거기에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은행에 왔으면 응당 찾게 되는 것이 있었다.
고천수는 곧장 금고로 향했다.
"열려 있어라……."
닫혀 있는 금고 문을 잡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잠금이 걸려 있는 느낌은 아니었다.
뭔가 걸린 듯해서 고천수는 잠시 일행을 기다렸다.
"천수 님!"
일행들이 도착하자 고천수는 곧장 문을 가리켰다.
"이거 같이 좀 당겨 보죠. 열릴 것 같은데."
"예?"
일행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걸 말입니까?"
"얼른요."
고천수는 문을 다시 잡았다.
"안 도울 겁니까, 다들?"
그러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던 일행들은 같이 문을 잡았다.
꾸드드득.
여러 명이 함께 당기자 문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그리고 고천수가 이를 악물며 힘을 내고 있을 때, 흑구와 온리베어까지 합세하면서 문이 갑자기 확 열려 버렸다.
쿠당탕!
문을 놓쳐 버린 고천수는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며 화분에 몸을 박았다.
일행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가운데, 가장 먼저 달려온 건 김하령이었다.
"천수 님, 이런 데서 다치면 치료도 어려워요. 앞으론 제 쪽으로 넘어지세요."
"괜찮아."
고천수는 김하령을 밀어내며 문으로 다가갔다.
그 안쪽에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돈다발이 있었다.
부스럭.
고천수는 바로 돈다발 몇 개를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러자 일행들은 그런 그를 보며 의구심을 나타냈다.
"천수 님, 돈은 어디에다 쓰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이런 데서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다 쓸 데가 있습니다."
이곳은 일반적인 종말 세계가 아니었다. 고천수가 플레이했었던 게임의 틀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종말 세계였다.
그렇다는 말은 공략법이 이미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다 챙겼습니다. 따라오세요."
일행들을 데리고 다시 바깥으로 나온 고천수는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주차장을 찾을 겁니다. 주차장이 발견되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다들."
주차장.
온갖 버려진 차들이 널려 있는 종말 세계에서 왜 주차장을 찾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양민철이 그에게 물었다.
"형, 주차장에 가도 멀쩡한 차가 있을까요? 여기도 다 박살난 차들뿐인데."
"멀쩡하진 않을 거야."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반푼이 인간인 페이크맨이 존재하듯, 이 세계는 반 정도는 작동하는 것들이 꽤 많이 있었다.
"찾게 되면 알 테니까 너도 도와."
고천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주차장을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근처에 마트가 하나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주차장의 입구를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왈왈!
고천수의 눈짓을 받은 흑구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먼저 지하에 들어갔다.
안쪽을 확인하고 돌아온 흑구는 멀리서 고개를 끄덕였다.
"장서연 씨, 민철이랑 하령이랑 같이 밖에서 망 좀 부탁드립니다."
고천수는 몇 명에게 입구를 망보게 하고는 주차장의 입구 차단기를 확인했다. 일반적인 차단기와는 다르게 단단한 쇠로 되어 있었다.
그걸 보니 고천수는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탁탁탁탁! 타다닥!
안으로 들어간 일행들은 고천수의 지시대로 하나하나 차를 살폈다.
문이 열려 있고 내부에 열쇠가 있어 시동이 걸리는 것이면 아무것이든 좋았다.
그렇게 그들이 살펴본 차는 문이 안 열리는 것도 있었고, 내부에 열쇠는 있었지만 시동이 안 걸리는 것도 있었으며, 잠시 시동이 걸리는 듯했지만 이내 작동을 정지해버리기도 했다.
"천수 님! 찾았습니다!"
하지만 주차장에는 답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침내 멀쩡히 엔진을 움직이는 1톤 트럭 한 대를 찾은 단원 하나가 소리쳤다.
고천수는 다른 일행들과 함께 그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트럭은 배기구에서 연기를 토해내며 정말 당장이라도 달릴 수 있다는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제가 몰면 되겠습니까?"
심하문 일병이 고천수의 고갯짓을 확인하고는 운전석에 올라탔다.
고천수가 조수석에 탑승하자 나머지 인행들은 트럭의 짐칸 위에 탑승했다.
"고, 고천수!"
마침 절묘하게 장서연이 입구 쪽에서 소리쳤다.
"걔네들 몰려온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었다.
페이크맨들이 등장한 것이라 판단한 고천수는 심하문 일병에게 곧장 소리쳤다.
"차, 빨리 모세요!"
부르르르릉!
트럭은 빠르게 출발해 언덕을 올라섰다.
출입구 차단기를 박살낼 듯이 질주하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손을 내저었다.
"잠깐! 저기 요금기 앞에서 멈추세요!"
자동납부 요금기는 신기하게도 아직까지 돌아가는 중이었다. 당장 돈을 내놓으라는 듯 LED를 빛내고 있는 요금기에, 고천수는 바로 은행에서 털었던 돈뭉치에서 만 원을 꺼내 밀어 넣었다.
지이이잉.
그러자 무조건 뚫고 나가야만 할 것처럼 보였던 차단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뭔가 이런 상황과는 분위기가 맞지 않아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심하문은 고천수를 쳐다보다가 다시 액셀을 꽉 밟았다.
차단기가 적당히 올라가자마자 바로 차를 탈출시킨 심하문은 장서연 일행을 보면서 소리쳤다.
"타세요!"
그 와중에 저 멀리 달려오는 페이크맨들을 보며 모두가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와, 저 씨발!"
"그놈들이야?"
"벌써 이렇게 몰려왔다고?"
몰려온 숫자만 딱 봐도 수십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당장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너희는 어디서 온 거야?!"
"우리도, 데려가……!"
일견 혹할 수밖에 없는 대사였다. 멍한 표정을 그리며 사이드미러를 쳐다보는 심하문을 보며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심하문 일병님. 혹시 여기서 죽고 싶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의미는 단순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심하문은 곧장 기어를 조작하고 액셀을 밟았다.
"바, 바로 모시겠습니다!"
트럭이 미끄러지듯 거리를 달려 나갔다.
페이크맨들은 소독차를 따라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내민 채 뒤를 쫓아왔다.
안타까운 장면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고천수 일행은 곧 모두 그런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빤히.
트럭을 놓친 페이크맨들은 멀리서 멍하니 고천수 일행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 페이크맨들의 손에는 사실 삽이나 칼 같은 것이 잔뜩 들려 있었다.
"쏴, 쏴 버릴까요."
누군가 그렇게 묻는 소리가, 트럭의 깨져 있는 후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고천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총알 아끼세요."
무기를 쓰지 않고도 벗어날 수 있는 지대면 최대한 격돌 없이 탈출해야만 했다.
동쪽으로 가려면 아직 멀었다.
종말 폐기장인 이곳에는 끝도 보이지 않는 쓰레기들이 널려 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많은 몬스터들도 마주치게 될 터.
총은 가급적 꼼수를 허락하지 않는 존재에게만 사용해야 화력을 아낄 수 있었다.
‘……시청자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그 와중에 아직도 조용하기 그지없는 채팅창을 보며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날 보고 있기는 하려나?’
티격태격하던 놈들이기는 해도 있던 게 갑자기 없어졌더니 허탈감이 온몸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없어도 상관은 없었다. 그저 고천수는 이 지옥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응?"
그러던 고천수는 방금 막 트럭이 무언가 때문에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잠깐."
녹색의 표지판이었다.
사방으로 가는 길을 표시한 채로 널려 있는 그것은, 여러 종말 세계의 잔재로 넘어온 여느 표지판과 큰 차이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파괴된 도시 곳곳에 늘어져 있는 표지판들과 다를 바 없었다.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형태에서만.
"멈춰요."
고천수는 심하문에게 말했다.
심하문은 놀라며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예? 지금 말입니까? 조금 더 가서 세우는 게……."
"멈추세요."
그 목소리는 단호했다.
결국 심하문이 차를 멈추자 고천수는 내려서 방금 막 보았던 표지판을 확인했다.
"……조졌네, 서울."
표지판에는 강남구청역 사거리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