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종말 폐기장 (2)
쾅! 콰앙! 콰아아!
늘어나는 유성의 충돌음을 들으며, 지면에 난 구멍 안쪽으로 겨우 몸을 피신한 일행이 각자 한숨을 몰아쉬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바로 옆에 떨어져서 귀 나가는 줄 알았어.
"갑자기 무슨 소나기처럼……."
소나기.
그 표현이 딱 맞았다.
유성은 갑자기 불어닥친 비바람처럼 사정없이 지면 위를 휘갈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지면 아래에서 고천수는 살짝 이를 악물었다.
‘일단 살긴 했는데, 그 다음엔 어쩐다.’
폴링월드 게임에서와 같은 메커니즘이라면 이 유성비가 그치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유성비가 몰아치고 지나간 곳에는, 이내 잡다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 유성비가 많이 떨어지고 있는 이 지점에서는 멀리 떨어져야 했다.
딸깍.
갑자기 들린 소리에 고천수는 고개를 돌렸다.
제나가 손전등을 켠 것이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돌려 일행이 있는 지하의 곳곳을 비췄다.
"천수 님, 이쪽으로 이동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일행이 들어온 지하는 동굴처럼 뚫려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공간이었지만 고천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천수 님?"
"잠깐만."
고천수는 고민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다가 더욱 거세지는 유성의 충돌음을 듣고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쪽으로 가자."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석연찮은 기운을 느낀 제나가 물었지만 고천수는 일단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야. 일단 가보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사이 다른 일행들도 손전등을 꺼내들었다.
일행이 갖고 있던 손전등은 총 7개였다.
고천수는 손전등을 하나 들고 제나를 포함한 단원 6명에게 손전등을 들고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조용한 동굴 안을 울렸다.
시야가 어둡고 분위기가 꺼림칙했던 탓에 일행들은 불안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정말 여기로 가는 길이 있을까?"
"기분이 좋지 않은데."
"쉿. 천수 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냐."
그 말은 맞았다. 고천수도 아무 계획없이 이곳을 걷고 있는 건 아니었다.
폴링월드에서 지하는 유성비를 피해 이동할 수 있는 길이었다. 당연히 이 동굴도 어딘가로 나갈 수 있는 출입구가 존재할 것이었다.
다만 문제는 길이 멀쩡히 나있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갈림길이 나오는 것을 보며 일행은 잠시 멈칫거렸다.
"길이 세 개나……."
제나가 고천수를 돌아보았다.
그는 대답없이 잠시 손을 들었다.
잠시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뚜벅.
일행이 멈췄는데도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는 총을 들어 올렸다. 그를 본 일행들도 각자 무기를 치켜들었다.
뚜벅…….
걸음 소리는 곧 끊겼다.
중간의 갈림길에 한 인영이 나타나있었다.
왈!
인영을 발견한 흑구가 짖어 보였다.
그러자 인영은 다시 걸음을 옮겨 일행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쏘, 쏘지 마세요!"
웬 젊은 남자였다.
"응?"
"사람?"
"사람이라고……?"
일행들은 당황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일행들이 공격할 의도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두 손을 든 채로 가까이 다가왔다.
"네, 사, 사람입니다! 밖에서 도망쳐서 들어왔어요.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아시나요?"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행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냥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이런 세계에 있었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도와주세요."
"……뭐?"
"갑자기 여기에 와 있었다고?"
일행들은 그의 말에 물음표를 그렸다.
"천수 님?"
이런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일행은 곧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고천수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사이, 남자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도와주세요. 혼자라서 뭘 어쩌지도 못하겠어요. 저도 데려가 주시면……."
타앙!
그때였다.
고천수가 들고 있던 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타앙!
연달아서 쏘아져 나간 총알에 맞은 남자가 비틀거렸다.
일행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비틀거리던 남자는 울컥 피를 쏟아냈다.
"처, 천수 님!"
"형?"
"뭐하는 거야, 고천수!"
하지만 고천수는 당황하는 일행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계속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고천수가 나지막이 말했다.
"저 남자, 빛에 비친 거 못 봤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
일행들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를 보세요."
그리고 고천수가 첨언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깨달았다.
"그, 그림자가……."
"없어!"
불빛에 비친 남자는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뭔가 다른 법칙이 통용되고 있는 것처럼.
"도, 도와달라고 했을 뿐인데."
비틀거리던 남자는 고개를 치켜올리며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왜 이렇게 한 거야."
남자는 비척비척 다시 발을 움직였다.
[어그로 1 - 09:59]
"그야 넌 사람이 아니니까."
타앙!
발사된 한 발의 총알에 머리를 얻어맞은 남자가 뒤로 나자빠졌다.
그걸로 끝.
더 이상 남자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형, 저 사람은 대체……."
"가짜야."
"가짜, 요?"
놀라는 양민철에게 고천수는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떨어지는 잔해하고 같이 내려온 멸망 세계의 주민 같은 거야. 물론 말이 주민이지 잔재에 불과해."
현재 유성으로 떨어지고 있는 각종 세계의 잔재들은 멸망한 곳에서 오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포함되어있는 사람들 또한 이미 죽은 상태로, 원래의 존재와는 다르게 뒤틀려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진짜가 아닌 페이크맨이었다.
‘……하지만 폴링월드에서 본 적은 없는 옷이야.’
쓰러진 남자는 자주색의 정장을 입고 있었다.
폴링월드에서는 나온 적이 없는 복식이었다. 단순히 그냥 다른 옷이 나온 것일 수도 있지만 고천수는 찝찝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 나오는 주민이 아닌가?’
문득 든 생각에 고천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이 사람 정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네요."
김하령이 남자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피 색깔이 너무 이상해요. 이미 죽은 피만 가득했던 것처럼."
"잠깐, 비켜봐."
고천수는 김하령을 물리고 남자의 옷을 뒤적거렸다.
피가 손에 묻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고천수는 남자의 옷에서 지갑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신분증이 하나 들어있었다.
남자의 사진과 주소가 적혀있는 것이었다.
"망할."
본 적이 없는 주소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고천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다른 세계야.’
폴링월드의 형식을 차용해서, 어떤 종말한 세계에서 잔재로 넘어온 존재로 보였다.
"형님들?"
고천수가 시청자들을 불러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이제야 진짜 종말이 닥친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쿠궁.
유성비가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다시 귀를 거슬리게 했다. 고천수는 신분증을 꽉 쥐었다가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고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잘 들으세요. 지금부터."
페이크맨은 멀쩡한 인간이 아니었다.
폴링월드의 형식을 따른다면 그들은 진짜인 사람들을 질투해 죽여버리려고 하는 몬스터일 뿐이었다.
"사람처럼 생겼지만 이 녀석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페이크맨이라는 몬스터입니다."
"예? 모, 몬스터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조심하세요."
접촉하면 몸을 빼앗으려고 달라붙은 채 놔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 상태로 오래 지나면 함께 몸이 썩어들어가 죽게 되는 방식이었다.
"여기저기서 페이크맨이 나타날 겁니다. 손전등으로 확인되면 죽이도록 하세요."
탕!
고천수가 말을 함과 동시에 심하문 일병이 다른 곳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처, 천수 님! 저기에도!"
새로운 인영이 나타나 있었다.
일행들이 전부 총을 치켜드는 가운데, 인영은 세 번째 갈림길로 사라져버렸다.
"후, 후우."
"시발."
"무서워."
페이크맨들의 등장에 동요하는 일행들에게 고천수는 한 가지를 일러두었다.
"보인다고 무조건 쏘지 마세요. 그림자를 확인해야 합니다."
폴링월드의 세계라고 해서 무조건 페이크맨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림자가 기괴하게 남아있는 건 무시하고 보내줘야 합니다. 그건 에러맨입니다. 건들면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놔두세요."
"더한 몬스터가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래도 건들지 않으면 그쪽은 대신 접근을 안 할 겁니다."
주의를 준 고천수는 페이크맨들이 다녀가 일행들이 무서워하는 길은 굳이 택하지 않고, 갈림길 중 첫 번째를 선택해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세요. 얼른 가야 하니까."
"네, 네!"
"빠, 빨리 따라가자!"
벌써부터 두려움에 질린 일행들이 고천수의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고천수, 방금 한 말 다 진짜야?"
말하면 그대로 수긍하는 단원들과 다르게, 장서연은 지나치지 않고 고천수에게 의문을 표했다.
"예, 진짜입니다."
"넌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는 거야?"
그 질문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올라오기 전에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정상 자세한 얘기는 해드릴 수 없지만 말입니다."
"그러냐."
말꼬리를 높이면서도 장서연은 그에게 더 질문을 던지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이런 세계에서 그런 건 당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느냐 없느냐, 그거 하나만 확실하면 됐다.
장서연을 비롯해서 이곳에 있는 인원들은 하나같이 고천수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의구심보다는 강력한 신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뚜벅뚜벅.
뚜벅, 뚜벅.
길을 걷던 인원들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걸음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천수 님."
"우리 말고 다른 기척이 많이 느껴집니다."
"뒤쪽에서 따라오는 것 같습니다."
아직 유성비는 그치지 않았고, 출구도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는 일행들에게 손짓했다. 달리라는 신호였다.
일행은 그의 지시에 따라 지체없이 달려나갔다.
어딘가에서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도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저기입니다!"
심하문 일병이 발견한 구멍을 따라 일행은 한꺼번에 위로 올라섰다.
그렇게 올라선 곳은 유성비가 마구 떨어져 내리는 곳에서는 빗겨나 있는 장소였다.
그런 고로 유성비를 피해 다시 지하로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폭탄, 터뜨리세요!"
상황을 확인한 고천수는 단원들 중 미리 염두에 두었던 이에게 지시를 내렸다.
폭탄 전문가.
고천수에게 지시를 받은 이는 7층에서 얻은 것들을 휴식처에서 재정비해 휴대용 폭탄을 가지고 있던 단원이었다.
"터집니다!"
단원의 외침에 일행은 근처 폐기물 뒤로 몸을 숨겼다.
콰아앙!
폭탄은 순식간에 터졌다.
그리고 그 충격이 출구의 지반을 무너뜨렸다.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흙무더기를 쑤셔박은 것이었다.
"후."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고는, 폭탄을 터뜨린 뒤 무너진 출구를 확인하고 있는 단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막았습니까?"
하지만 아직 안심할 때가 아니었을까.
무너진 지반 사이에서 튀어나온 손이, 땅을 확인하던 단원의 발목을 붙잡았다.
"흐, 흐아! 흐아아아!"
그것도 한 개가 아니었다.
몇 개나 되는 손이 단원의 발목에 더 포개어졌다.
"천수 님! 천수 니이임!"
탕! 타앙! 탕!
단원이 비명처럼 외치며 급하게 총을 쏘았지만 이미 늦었다.
붙잡힌 그는 무너지는 출구와 함께 쑥 밑으로 꺼져 내렸다.
"으아아아아아악……."
그의 비명이 멀어졌다.
놀란 눈을 뜨고 있던 일행들이 숨을 삼키며 주춤댔다.
콰아아아앙!
그때, 끌려 들어간 단원이 모든 폭탄을 터뜨린 듯 지반이 꿀렁였다.
"망할! 다들 피하세요!
갈라지기 시작한 땅에 쫓기며, 일행은 고천수의 외침을 따라 근처 빌딩 숲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