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휴식처 (3)
장서연에게 부탁한 협력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고천수 대신에 양민철과 김하령에게 미리 준비를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자, 여러분. 이쪽으로 모이세요.”
그사이에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을 불러 모으고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모두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단원들은 대부분 의아한 표정으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나머지에서 최형식을 포함한 몇몇은 생기가 어린 눈빛을 띠었다. 이제 뭔가 계획을 진행할 것임을 알아챈 표정이었다.
“저기, 버스를 보셨을 겁니다.”
고천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버스를 가리켰다.
“혹시 이상한 점 발견한 분 계십니까?”
그러면서 묻자 단원 중 일부가 대답했다.
“계속 시동이 켜져 있습니다.”
“딱 한 대뿐입니다.”
“산장 앞에 버스가 있는 게 이상합니다.”
일반적으로 다들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고천수는 살짝 미소를 띠며 답했다.
“예, 맞습니다. 산장 앞에 대기 중인 딱 한 대뿐인 버스가 계속 시동이 켜져 있다니, 이상하죠. 하지만 여러분은 여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천수 님이 별로 신경 안 쓰셔서…….”
“저희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정리하자면 그만큼 고천수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고천수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여러분, 저 버스의 정원은 15명입니다.”
정원 15명.
우연이라기엔 대형 버스의 내부가 딱 15명만 탈 수 있게끔 좌석이 배치되어 있다는 게 이상했다.
15명씩 나눠 타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정황상 딱 15명만이 버스에 탑승해서 탈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지금부터 저는 버스에 탑승할 15명의 선발대를 가릴 생각입니다.”
“열다섯……?”
“딱 그만큼만?”
예상됐던 대로 마키나 단원들이 웅성거렸다.
15명을 뽑겠다는 건, 고천수가 자신을 포함해 딱 그만큼의 인원만 데리고 갈 거라는 얘기였다.
이곳에 남게 되는 인원이 대다수라는 걸 마키나 단원들이 알아채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 천수 님! 그럼 저희 중에 일부만 데리고 가실 거라는 겁니까?”
“탑승할 인원이 너무 적습니다! 저희는 50명이 넘습니다!”
“여러분.”
고천수는 차분하게 검지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13층, 14층. 위는 이 탑의 최상층입니다.”
그리고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을 이곳까지 데려왔다. 남은 층에서도 활약할 사람은 다름 아닌 고천수였다.
그만큼 마키나 단원들에게 앞으로의 위험을 잘 설득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위기와는 차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저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이곳에 남는 인원은 버려지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이 그렇게 느끼게끔 말했다.
“제가 탑을 다 오르면 여기에 있는 여러분을 꺼내 드릴 수 있습니다. 그점은 단언할 수 있지만, 13층, 그리고 14층에서는 생존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제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는 인원은 휴가라고 생각하고 풍족한 환경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저 고천수를 믿을 수 있다면.”
필요한 건 정예뿐이었다.
“제가 탑을 올라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최정예의 자신감이 있는 분들이 필요합니다. 모두, 함께 살기 위해서.”
약간의 의문을 표하던 마키나 단원들이 순간 입을 다물고 숙연해졌다.
여기서 눈치 없이 떠드는 자는 전원 생존의 대의를 망치려는 존재가 될 터.
이곳에 남은 인원들이 후에 쫓아올 수 있게 될지 아닐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15명만을 몰래 모아 이곳을 빠져나가는 대신 정면 돌파를 선택한 고천수의 전략은 그대로 먹혀 들어갔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도리어 이곳에서의 잔류는 생존, 탈출은 죽음이라는 인식을 박아 넣어 인원 통제에 나섰다.
“저 고천수만을 살리게 될지라도, 모두를 위해 희생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정예가 될 분들이 있습니까?”
고천수는 손을 들어 올렸다.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시죠.”
이미 이곳까지 올라오면서 직접 디엔드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 줬던 고천수를 믿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상황적인 의구심조차도 마키나 단원들의 머릿속에서는 금세 지웠다.
남은 건 고천수를 따르되 어떤 위험을 감수하느냐 하는 것뿐이었다.
‘고민될 테지.’
고천수는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까.’
무려 12층이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탑에 끝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선다면 불확실성에 의해 죽을 수도 있었다.
누가 함께 가든지 간에 고천수만 성공한다면 이곳에 남은 이들은 전부 살 수 있다, 라는 전제가 깔렸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남는 게 이득이었다.
“처, 천수 님!”
단원 중 하나가 소리쳤다.
“바, 반드시 데리러 와 주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고천수는 그 단원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얼굴.
그는 밤에 보았던 유구현이었다.
“그, 그럼!”
고천수의 대답을 들은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저는 천수 님을 믿고 남겠습니다!”
가겠다, 가 아닌 정반대의 의사.
잠시 분위기가 묘해졌지만, 곧 효과는 결과로 드러났다.
“저, 저도!”
“저도 천수 님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믿겠습니다!”
남는 것도 고천수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포장됐다.
고천수는 단원들이 원하는 대로의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며 미소를 그렸다.
‘잘했다, 유구현.’
고천수는 어리숙한 유구현을 따로 불러서 임무를 줬다.
다행히도 그는 무조건적으로 위층으로 가고 싶어 하는 부류가 아니었기에, 고천수의 말에 잘 따라 주었다.
이로써 분위기는 대부분 산장에 남는 쪽으로 넘어갔다.
애초에 산장이 다른 층들과는 다르게 안전하다는 게 한몫했다.
위로 가면 1초 만에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미 한 번 편안함을 맞본 단원들은 쉽게 위기에 맞서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뭐, 이게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12층은 휴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이곳에 모인 인원들의 긴장을 풀어 놓았다.
너무 풀어 놔서 단원들이 잠시 잊고 있던 두려움이 배어 나오게 할 정도였다. 고천수는 단원들이 여기까지 오면서 죽은 단원들을 떠올리면서 위층이 무섭다고 하는 얘기를 이미 주워들은 상태였다.
“자!”
어쨌거나 분위기가 정리됐으니, 고천수는 차에 탈 인원을 뽑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번엔 거꾸로 지원자를 뽑아 보겠습니다.”
많은 수가 남아야 하는 만큼, 일부러 지원자를 뽑는 과정을 뒤로 미뤘다.
이제 이곳에 남는 게 이상하지는 않으니 적절한 숫자만 지원 의사를 밝힐 것이었다.
“의사가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시길 바랍니다.”
고천수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희생을 각오해야만 하는 그룹.
그 때문에 잠깐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장 먼저 손을 든 무리가 있었다.
“네, 장서연 씨, 양민철, 김하령, 그리고 흑구하고 온리베어.”
장서연 일행이었다.
고천수가 이미 말을 전해 놓은 대로 그녀는 미리 측근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들 것을 주문해 놓았다.
-근데 이건 고천수가 미리 말해 놨어도 되는 거 아닌감?
-장서연을 시킨 이유가?
-그러게.
그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장서연 일행은 동료지 일반적인 마키나 단원들처럼 상하관계는 아니었다.
앞으로 마키나 단원들이 대거 하차하게 되는 만큼, 관계 회복을 위해서 역할을 부각시켜 준 것뿐이었다.
게다가 따로 너무 많은 접촉을 하게 되면 괜히 불필요하게 눈에 띄었을 수도 있었다.
“천수 님! 저도 손 들었습니다!”
바로 옆에 서 있던 제나가 보지 못했냐는 듯 말했다. 고천수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동물까지 정원에 포함되는지는 아직 모르기 때문에, 일단 더 필요한 지원자는 10명입니다.”
고천수는 지원자를 정리하며 첨언했다.
“특정 분야에 특기가 있는 분이면 환영합니다. 어려운 길이겠지만, 그래도 함께하면 난관을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천수 님!”
그러자 몇몇 인원이 손을 들었다.
“차량 정비에 특기가 있습니다!”
“저는 요리에…….”
“저는 수색을 잘합니다!”
나쁘지 않은 것들이었다. 고천수는 옆에 서 있는 제나에게 지원자들을 정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총 8명입니다. 아, 지금 손 든 인원들까지 하면 12명입니다.”
“8명까지만 두고, 빠르게 손 든 두 명만 추가 인원으로 해 두도록.”
고천수는 이어서 손을 드는 단원들을 보면서는 손을 내저었다.
“그만. 이제 됐습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잘 보았습니다.”
어차피 고천수는 대부분의 측근 합류만 이루어졌으면 그만이었다.
남는 사람 중에 신경 쓰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여기도 통솔해 줄 사람들이 필요하니까.’
특히 최형식은 많은 수의 마키나 단원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잔류가 불가피했다. 남는 이들과 눈빛을 교환한 고천수는 한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갈 사람과 남을 사람을 나눴군요. 가기 전에 든든하게 채우고 가야겠습니다.”
고천수는 제나에게 지시해 버스에 탈 인원들이 채비를 할 수 있게 했다.
산장은 물건을 챙기는 자와 챙겨 주는 자로 이내 분주해졌다.
“천수 님.”
최형식이 고천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고천수는 최형식을 보며 미소를 그려주었다.
“제 마음을 잘 읽어 주셨군요, 병장님. 따라온다고 해도 놔두고 갔을 텐데.”
“그렇습니까.”
최형식은 쓴웃음을 지었다.
“가시니까 하는 얘기지만, 고작 병장인 제가 여기까지 대담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천수 님 덕분입니다.”
“그런가요.”
“정말입니다. 천수 님도 병장이 어떤지는 아실 거 아닙니까.”
이해했다.
지휘관들이 없는 상태에서 최형식 병장이 준지휘관 역할을 해 마키나 단원들을 효율적으로 통솔했다.
웬만한 담력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최형식 병장님은.”
진짜였다.
자신이 원래 골방에 처박혀 지내던 사람이라는 걸 그에게 알려 줄 수 없다는 게, 고천수는 우스울 뿐이었다.
“자, 그럼.”
준비가 다 됐다는 제나의 말에 고천수는 바로 버스로 향했다.
“천수 님, 운전은 제가 맡으려 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건 심하문 일병이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운전석 뒤에 앉았다.
제나의 안내에 따라 나머지가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흑구와 온리베어도 각각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았다.
부릉!
혹시나 해서 추가 인원 둘을 더 뽑아 놓았건만, 버스는 갑자기 엔진 음을 더욱 크게 내뱉기 시작했다.
-아닠ㅋㅋㅋㅋ 진짜 둘도 정원으로 치는 거임?
-안 치는 게 에바지. 천수가 파밍 플레이어라서 몬스터 다 모으고 왔어 봐.
-그렇긴 하네. ㅋㅋㅋㅋ
뭔가 더 모을 수도 있었던 듯하지만 고천수는 시청자들의 말은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속성으로 움직여서 산 거니까.’
어딘가를 더 돌아다니다가 왔다면 여기까지 못 오고 죽었을 수도 있었다.
“천수 님! 더 안 태우고 출발합니까?”
어느새 고천수의 옆자리에 앉은 제나가 물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를 전달받은 심하문이 경적을 울렸다.
문 옆에 서 있던 예비 인원 둘은 곧장 이마에 경례를 올렸다. 고천수도 그들을 보며 경례를 해 주었다.
룸미러로 보이는 뒤편에서는 다른 단원들도 경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는 잠시 떠날 시간이었다.
부우우우웅!
버스는 출발했다.
산장에 남은 이들의 모습이 멀어졌다.
비포장도로인 탓에 버스가 계속해서 튀어 올랐다. 심하문은 핸들을 어렵게 조작하며 눈앞에 보이는 길로 계속해서 버스를 몰았다.
덜컥.
어느 순간 버스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 올라섰다.
갑작스러운 안정감.
버스에 타고 있는 인원들이 모두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건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벗어나 멀쩡한 곳에 들어섰기 때문이 아니었다.
“뭐야, 여긴.”
고천수의 눈에 비친 건, 거대한 폐차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