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휴식처 (2)
“15명……?”
그러고 보니 버스는 외형은 대형인데 비해서 내부 좌석이 그리 많지 않았다.
“뭐지?”
여러 번 태우고 왔다 갔다 하라는 뜻일까.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버스에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밖으로 나왔다.
“후.”
의문점이 남긴 했지만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니 당장 위험한 건 없는 듯했다. 버스에 대한 건 나중에 알아보고 역시 좀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고천수는 다시 산장으로 돌아갔다.
거기에 있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다시 이부자리에 누웠다.
흑구가 그런 그의 곁으로 와서 누웠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눈을 감고 완전히 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뜬 고천수는 뻐근한 몸을 일으키며 탄식을 뱉었다.
“아, 미친…….”
채 가시지 않은 피로가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조금만 더 안 쉬고 활동했더라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천수는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다 자나?’
같은 산장 안에 있는 이들은 아직도 눈을 붙이고 있었다.
고천수는 다시 부엌으로 가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이상한 여유.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고천수는 오히려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제일 먼저 깨네.
-휴식 시간을 줘도 이래.
-하여간에.
고천수는 스트레칭을 하며 답했다.
“형님들, 직접 내려와서 여기에 있어 보세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항시 내재돼있었다. 쉬려고 마음먹어도 제대로 쉬기가 쉽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이 탑을 공략하고 싶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아무리 중간 중간 쉬어 준다고 한들, 종말에 가까운 세계에서 피로를 푸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여독이 쌓였다. 마음 놓고 쉬지를 못했다.
그런 기분을 시청자들은 알지 못할 것이었다.
“응?”
밖에 불빛이 비추고 있는 것을 보고 고천수는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야외 순찰을 하고 있는 네 명의 마키나 단원이 있었다.
“아, 나오셨습니까.”
그 중에 한 명이 고천수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키가 크고 짧은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였다.
‘유구현.’
마키나 단원 중 하나로 여태 말을 따로 섞어 본 적은 없었다. 군복을 입고 있는 그의 이름표를 확인한 고천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경계 서고 있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아까부터 쭉 섰던 겁니까?”
“아, 아닙니다.”
유구현은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최형식 병장님이 근무 표를 짜 주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설 차례라…….”
말투에 약간 어리숙한 느낌이 섞여 있어서 계급을 살펴보자니 이등병이었다. 유구현의 옆에 함께 있던 상병은 먼저 고천수에게 말 걸 타이밍을 놓친 듯 뻘쭘한 표정으로 근처에 서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습니다. 뭐 특별하게 보인 거라도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아무것도.”
주변을 둘러본 고천수의 눈에 보이는 건 다른 산장들, 그리고 여전히 엔진이 켜진 채로 그 자리에서 대기 중인 버스뿐이었다.
‘기묘하네.’
소리에도 집중해 봤지만 늦은 시간에 풀숲에서 나는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별들이 여럿 떠 있어서 순간 어디 야영이라도 온 듯한 기분을 느낄 뻔했지만, 그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긴장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었다.
“저, 천수 님. 혹시 보고 하나 드려도 될지…….”
갑자기 입을 여는 유구현을 보며 근처에 있던 상병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 내젓는데?
-말하지 말라는 뜻인가.
-그럼 얼른 물어봐야지.
상병의 모습을 본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하며 유구현에게 물었다.
“무슨 보고입니까?”
“사실 저희, 경계하다가 지정받은 범위보다 더 걸어 봤는데 말입니다.”
“야야!”
“그랬더니…….”
유구현은 자신을 향해 소리치는 상병의 얼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고천수는 상병에게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상병이 눈을 크게 뜨며 살짝 주춤거렸다.
“말 막지 마세요. 추궁하지 않을 테니까.”
“아, 네, 넵!”
상병이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어차피 고천수는 최형식 병장에게 경계만 주문했지 세세한 내용까지 정해 준 건 아니었다. 정말로 추궁할 생각이 없었기에, 고천수는 다시 유구현을 보며 물었다.
“그랬더니 뭡니까? 발견한 거라도 있습니까?”
“사실 저희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더니, 저 앞에 불빛이 하나 보이는 겁니다.”
유구현은 앞쪽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잘 보이진 않지만, 정말로 불빛이 보이고 있었다.
‘뭐지?’
당연하지만 별빛은 아니었다.
고천수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자, 유구현은 숨을 삼키고 말했다.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가 보자고요?”
“가 보시면 알게 되실 거라서…….”
답할 것도 없었다.
고천수는 바로 불빛이 비치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구현과 그 옆의 상병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저거 뭐임? 아래 마을 같은 거 있음?
-마을. ㅋㅋㅋㅋㅋ
-넌 저게 마을 불빛으로 보이냐?
마을에서 나오는 불빛이라기엔 작았다. 추측하자면 다른 야영지에서 나오는 불빛 정도였다.
“……?”
하지만 불빛이 있는 곳까지 조금씩 더 가까워져 갈수록 고천수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뭐야.”
버스였다.
시동이 켜져 있는 버스가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놀란 고천수는 시선을 주위로 돌려보았다.
근처에는 산장들이 있었다. 고천수가 출발했던 지점에 있는 산장들과 동일하게 생긴 것들이었다.
“천수 님, 놀라지 마십쇼.”
이미 놀라 있는 고천수를 보며 유구현이 소름이 끼친다는 듯 말했다.
“여기 출발지랑 같은 곳입니다.”
그는 허15라고 쓰여 있는 버스의 번호판, 그리고 다시 저 멀리 앞쪽에 비치고 있는 불빛을 가리켰다.
“뭐에 홀린 것 같이 말입니다.”
고천수는 왔던 길을 되돌아보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좀 더 정확하게 확인하는 방법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잠시 여기 계세요.”
고천수는 단원들은 남겨 놓고 자신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잖아 다시 돌아왔다.
단원들이 있는 곳으로.
“역시.”
유구현은 떨리는 숨을 뱉으며 고천수에게 말했다.
“천수 님, 여기 길 없는 거 아닙니까?”
고천수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쪽에서도 빛이 비추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고천수가 앞에 있는 빛을 보며 뛰고 나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확실한 건 하나였다.
12층에 들어왔던 입구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
고천수는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유구현 이병님?”
그러면서 입을 열자 유구현이 차렷하며 대답했다.
“예, 천수 님!”
“지금 이건 우리만 아는 걸로 하겠습니다.”
고천수는 멀지 않은 곳에 멀뚱히 서 있던 다른 단원들에게도 고했다.
“저희가 알게 된 것들은 저희만 아는 겁니다. 나중에 질서 있게 이동하려면 굳이 다 알 필요는 없겠죠.”
여기서는 무조건 버스를 타고 나가라는 얘기였다.
다만 버스는 현재 시동만 걸려 있을 뿐 움직이는 방법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가장 유력한 방법은 버스에 쓰여 있는 정원만을 태우는 것이었다.
여러 번 태우고 왔다 갔다 하면 되지만, 같은 장소를 맴돌게 되는 현상을 알게 되면 불안해할 인원도 분명 있을 터였다.
“다들 이해했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경계 단원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
다음 날 아침.
일어난 단원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햇살을 맞이했다.
“으, 잘 잤다!”
“진짜 제대로 쉬었네.”
“그러게. 나 완전 기절했었던 것 같아.”
단원들은 대부분 피로를 회복한 모습이었다.
고천수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산장 근처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천수 님, 잘 주무셨습니까?”
최형식 병장이 고천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고천수는 고개만 살짝 끄덕여 주었다.
“혹시 천수 님, 무슨 일이라도?”
“아닙니다.”
고민이 얼굴에 묻어 나온 듯했다.
고천수는 바로 손을 내저었다.
“잠이 안 와서 조금 늦게 잤더니 피로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러면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쉬시는 게…….”
“아닙니다.”
고천수가 계속 거절하자 최형식 병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났다.
‘확실히 휴식터는 맞는 것 같다.’
자유를 허락하자 단원들은 산장에서 간식거리를 들고 나와 다들 먹고 마시고 있었다. 대부분 군복만 입었을 뿐이지 야영을 온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간혹 몇몇이 시동이 켜져 있는 버스에 관심을 갖곤 했지만, 고천수가 지금은 내부를 보지 말라고 한 탓에 그냥 그쪽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고천수에 대한 단원들의 신뢰도는 높았다.
그렇기에 통제하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야, 왜 이렇게 죽상이야.”
장서연이 포도 하나를 들고 오며 말했다.
“너도 이거 하나 줄까? 포도.”
“안 먹어요.”
“왜. 맛있는데.”
그녀는 포도를 생선처럼 들고 확 한 번에 뜯어먹었다.
-야생마.
-원래 포도 이렇게 먹는 거 아님?
-장서연은 파인애플도 껍질째로 먹을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채팅창을 보다가 고천수는 장서연에게 시선을 향했다.
“장서연 씨, 대화 좀 나눌 게 하나 있는데 혹시 괜찮으십니까?”
“대화?”
장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 물을 게 있어? 마키나 얘네 너 완전히 따르던데. 제나인지 뭔지한테 물어봐도 될 텐데.”
“농담하는 게 아닙니다.”
고천수는 장서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도 진지하게 답변했다.
“뭔데. 나랑만 얘기해야 하는 거야?”
“일단은요.”
“오케이.”
그녀는 자신이 나왔던 산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 좋은 방 하나 있더라고. 거기로 가서 얘기하자.”
고천수는 그렇게 그녀의 안내를 따라 한 산장 안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웬만하면 심각한 얘기는 하지 말자고. 나 간만에 좀 마음이 편하니까.”
그녀는 먼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도중에 또 술을 한 병 주워 온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던 잔에 벌써 한 잔 따르고 있는 중이었다.
“술 조금 마신다고 뭐라 할 건 아니지? 딱 한 잔만이야.”
“장서연 씨.”
고천수는 장서연 앞에 마주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인원들을 두고 가야 합니다.”
덜컥.
그 말에 장서연이 술잔을 올리던 손을 멈췄다.
“뭐?”
“들은 그대로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기도 했고, 아직 확인이 안 되긴 했지만 고천수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문제가 있다는 걸.
“밖에 버스 보셨죠?”
정원이 15명이었다. 고천수는 그 점을 알려 주며 말을 이었다.
“15명씩 데리고 나갈 수 있는 버스가 계속해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이 하나 생각나더군요.”
“……설마?”
“그 설마입니다.”
만약에 기회가 단 한 번일 경우였다.
“여기서 나가서 이후를 계획하려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고천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진심?”
“진심입니다.”
장서연을 데리고 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미 그걸 눈치챈 듯 장서연은 술을 자신의 잔에 따르고 한 잔 쭉 들이켰다.
“크흠! 그래, 그거네.”
고천수는 일단 장서연과 그 일행을 선택했다. 장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민철 걔는 마음 약해서 이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거야? 뭐, 하긴, 하령이한테도 미리 얘기해두긴 어려웠겠네. 성격이 그래서.”
“그냥 많은 단원에게 휴가를 주는 일이 될 겁니다. 장서연 씨, 협력하시겠습니까?”
“…….”
답이 없는 그녀를 보며 이번에는 고천수가 술잔을 잡아들었다.
“서로 술잔은 이미 부딪친 걸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