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재해 (3)
“다들 다음 분화대를 향해서 움직이세요!”
고천수는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눈보라 때문에 정확한 거리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일단 다음 분화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천수 님! 정말 이동합니까?”
“눈보라가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여기에 있는 게…….”
마키나 단원들이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단호했다.
“죽기 싫으면 서두르세요!”
고천수를 믿고 여기까지 온 자들이었다. 망설임도 없이 내뱉는 고천수의 말에 그들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망할.’
시간이 지나면 분화대가 어떻게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쉐도우 덕분에 이미 한 번 배우지 않았던가.
이럴 때 기다림은 미덕이 될 수 없었다.
꾹.
추위에 노출되기 전 고천수는 남은 정보의 내용도 하나 더 갱신했다.
[정보 1 : 분화대에 10분 이상 머물러있으면 위험합니다.] - [갱신 1젠]
[정보 2 : 분화대들을 이용해 현재의 재난 형태를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 [갱신 1젠]
무슨 말일까.
별 수 없었다.
고천수는 다음 정보의 갱신 버튼에도 손을 가져갔다.
[정보 3 : 분화대 하나에 머무르는 시간이 10분을 넘길 때마다 주변의 온도도 급격히 상승합니다.] - [갱신 1젠]
그런 거였다.
고천수는 이제야 분화대에 대한 내용을 이해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젠을 3개나 가져가고서야 다 알려 주네.”
젠이 없을 땐 1번 정보창만 갱신을 해야 할 듯싶었다.
“형! 이대로 우리만 가도 괜찮아요?”
“뭐?”
“형이 데리고 있던 동물들은요?”
양민철의 말에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 마. 다음 분화대까지 가면 신호를 줄 수 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흑구와 온리베어는 이런 혹한에 유리한 신체를 가졌다. 흔적만 알아챌 수 있으면 알아서 뒤를 따라올 것이었다.
-말만 하고 안 나가는 거?
-이제 시간 별로 없을 거임.
-가야 됨.
고천수가 분화대의 열막 안에 머무르며 나가지 않자 시청자들이 재촉했다.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분화대에서 10분을 버티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도 컸다. 정보 2에서는 분화대를 이용해 현재의 재난을 점진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쓰여 있지 않은가.
“잠깐!”
그렇기에 고천수는 열막 밖으로 나가려는 인원들을 붙잡고 잠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잠시 확인하고 갈 게 생겼습니다!”
“예?”
“대체 뭘…….”
의문스러워 하는 일행들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고천수는 분화대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준비는 전부 다 마쳤다.
모두가 이동하기 전에 저 분화대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 확인까지 할 요량이었다.
-괜히 뒷 정보들까지 열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텐데.
시청자 하나가 그 말을 하고 난 직후였다.
『10분이 초과되었습니다.』
갑자기 웬 목소리와 함께 분화대가 빨갛게 빛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불안한데.”
“터지려는 거 아냐?”
이젠 더 이상 열막 안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고천수는 다시 손을 들고 외쳤다.
“다들 이동!”
그러자 다들 빠르게 열막을 벗어나 눈길을 밟았다.
“우와아아아아!”
“추워!”
“차이가 너무 나잖아!”
모두 열막 안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표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분화대에서 나온 불꽃이 마그마로 변해 빠르게 고천수 일행을 쫓아왔던 것이다.
치이이이익!
마그마는 길 위의 눈을 녹이며 엄청난 열기를 뱉어냈다.
덕분에 주변의 온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온도가 올라간다고?’
고천수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마그마를 피해 달리며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주변이 사우나처럼 뜨거워졌다.
차갑던 눈보라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천수 님! 온도가 따뜻해집니다!”
“마그마와 붙어서 이동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 저기?”
갑자기 누가 손가락을 뻗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앞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쓰러져서 눈에 파묻혀 있는 여러 명의 인영이 보였다.
“디엔드?”
전부 디엔드의 신도들이었다. 고천수 일행이 지나쳐가자, 마그마가 곧 얼어붙어 있는 디엔드 신도들의 몸을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이.
바사사사.
타닥.
당연한 얘기겠지만 마그마에 닿은 신도들의 시체는 그대로 불타올랐다. 고천수는 주위를 살펴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 녀석들, 제대로 따라올 수 있을까?’
흑구와 온리베어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마그마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위험하다고 한 게 무슨 말인지는 이제 체감이 됐던 것이다.
-마그마 느려진다.
-용케 안 닿았네.
-애초부터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마그마는 한도 끝도 없이 따라오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렇다고 식어서 굳어 버리지도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흑구야! 온리베어!”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하지만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제기랄.”
30분이라니 너무 긴 시간을 줬다.
우회해서 올 수도 있겠지만 마그마 때문에 서로 만나게 될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근데 그건 뭐였지?’
급하게 지나와서 이제 와 생각하는 거지만 디엔드 신도들의 시체가 왜 이 근처에 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딱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긴 한데, 그게 꽤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천수 님.”
그걸 자기가 먼저 말하겠다는 듯 제나가 입을 열었다.
“도중에 보였던 디엔드 신도들, 전부 동사한 것 같았습니다.”
그랬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그냥 얼어 죽은 것으로밖에는 안 보였다.
그렇다는 얘기는 방찬혁이 별다른 방한 대책 없이 이곳을 지나쳤다는 뜻이었다.
‘이 자식 제정신인가?’
그냥 얼어 죽어 봤자 아무런 이득도 볼 수 없을 것이 분명…….
‘잠깐만.’
방찬혁은 이 층에 대한 공략집을 가지고 있었다. 직접 확인은 안 했지만 그렇다고 친다면 꼭 떠올려야 하는 게 있었다.
“이런……!”
고천수는 일행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뛰세요!”
이제 막 마그마가 멈췄기에 일행들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던 참이었다.
고천수는 그들을 향해 목이 찢어질 듯 외쳤다.
“얼른 뛰란 말입니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일행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동 중 제나가 고천수에게 다가와 물었다.
“천수 님, 무슨 일입니까?”
“방찬혁을 앞질러야 돼!”
다음 분화대는 첫 번째 분화대가 있던 곳에서 북동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었다. 좌측으로 많이 틀어진 방향에 존재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앞쪽이었다.
“방찬혁은 두 번째 분화대를 켜 버리려고 먼저 간 거야!”
이쪽이 첫 번째 분화대로 갈 것을 예측한 행동이었다.
만약 그대로 따라갔다고 해도 길을 알고 있을 방찬혁은 다른 계획을 전개했을 것이었다.
-두 번째 분화대로 마그마를 발생시키려는 건가?
-그것보다 심하지.
-첫 번째 터지고 두 번째 거 터지는 거잖아.
정보 2에는 분화대들을 활용해 점진적으로 재난의 형태를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 말인 즉, 분화대들이 각각 10분 이용 시간이 초과되어 버리면 마그마도 방금 것보다 더 강하게 몰려올 거란 뜻이었다.
“목적지를 바꿉니다! 일직선으로 가겠습니다!”
심지어 방찬혁이 두 번째 분화대에 있을 거라고도 장담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분화대가 터지고 두 번째 분화대가 터지면 이 층 자체의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방찬혁은 두 번째 분화대에 첨병만 보내서 임무를 수행하게 한 뒤, 그냥 온도가 올라간 이 지역을 빠르게 먼저 통과하면 되는 일이었다.
분화대가 2개로 끝이 아닐 것이니만큼,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서 세 번째 분화대를 활성화시키려는 계획일 수도 있었다.
터지는 분화대가 많아지면 그때부터는 눈이 문제가 아니었다.
정보 3화의 연계를 생각하면 또 다른 재난이 찾아올 수도 있었다.
‘젠장. 잠시 쉰 덕에 희생은 없었지만……!’
신도들을 장기 말로 써서 움직이는 방찬혁에게 또 허를 찔려 버렸다.
‘나보다 더한 새끼야.’
더 이상 안일하게 굴 수는 없었다.
이쪽은 플레이어였다. 도박수를 던지더라도 기수를 잡아 이쪽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야만 했다.
“천수 님!”
누군가 가리킨 쪽을 돌아보자 뒤쪽에서 쫓아오고 있는 거대화된 흑구와 온리베어가 보였다.
“너희!”
반색하는 고천수를 보자마자 온리베어가 글자를 쓴 종이를 들어보였다.
[흑구가 온도가 올라갔다고 해서 뭔가 이상해서 돌아왔어.]
역시 몬스터였다. 온도에 민감해서 다행이었다.
“흑구야! 저기 불빛 보여?”
온도가 올라가면서 눈보라가 가리던 시계도 조금 맑아졌다.
고천수가 가리킨 방향에서는 두 번째 분화대가 등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서 방찬혁 없는 허수아비들만 몇 있으면 물어서 다 죽인 뒤에 바깥으로 내던져 버려. 다시 분화대에 들어가지 못하게. 그러고 나서 그냥 북쪽으로 올라가고. 신호탄으로 신호 줄 테니깐.”
왈!
“혹시 방찬혁이 거기에 있으면 그냥 돌아와. 정말 거기 정찰조 정도만 남아서 그러고 있으면 그러란 얘기야. 다치지 않게 유의해.”
흑구와 온리베어는 분명 이곳에서 활용성이 다하는 놈들이 아니었다.
유용하게 쓰되, 버리는 패로는 내놓을 수 없었다.
왈왈!
흑구는 대답하고는 온리베어를 태우고 달려 나갔다.
나머지 고천수 일행은 계속해서 전진하고 또 전진했다.
“저기에도……!”
“저기에도 불빛이 보인다!”
“천수 님!”
단원들이 전방에 등대처럼 빛나고 있는 또 다른 분화대를 발견했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방찬혁. 너 이 새끼.”
먼저 가서 분화대를 전부 활성화시키려고 했던 거면 이쪽을 마그마로 둘러싸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번엔 가만 안 둔다.”
다만 방찬혁은 이번에도 전력 십수 명을 소진했다.
앞서가기만 하면 된다고 봤을지 모르겠지만, 이젠 그만 한 판 붙어 봐도 될 전력 차이였다.
세 번째 분화대에 다가가자 디엔드 신도들이 보였다.
고천수는 곧장 마키나 단원들에게 총구를 들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뭐야!”
“이 자식들!”
“쫓아온 거냐?”
곧장 인상을 쓰는 신도들 사이에 방찬혁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것도 열 명 정도의 신도들뿐이었다.
“뭐야, 방찬혁은 어디 갔어.”
고천수가 묻자 신도들은 코웃음을 쳤다.
“먼저 가셨다.”
“출구에 가서 재난 스위치를 끌 테니 그때 오라고 하셨지.”
“우리가 얼어서 잘 움직이지 못하니까, 도움을 주기 위해 가신 거다!”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고천수는 탄식을 뱉었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미 많은 수의 신도들을 희생시키며 나아가고 있는 방찬혁이었다.
뭔 계획인지는 몰라도 신도들을 아끼지 않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건방 떨지 마라!”
“우리는 디엔드 발족부터 함께 한 신도들이다!”
“어중이떠중이와는 달라!”
제법 자부심이 있는 놈들이 남은 듯했다.
고천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 그렇게 믿으려면 믿으라고 할 수밖에 없겠네. 근데 방찬혁은 신도들 대부분 다 데리고 가지 않았어? 두 번째 분화대에도 몇 명 안 남겼던데. 너희 믿는 거 맞아?”
“그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신 거다!”
“출구 공략에는 머리 숫자가 많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니까!”
떠봤는데 잘도 넘어갔다. 두 번째 분화대에 있는 인원도 별로 되지 않다는 걸 확인한 고천수는 잠시 고민했다.
‘여기도 분화대를 못 터뜨리게 하고 가야 하나? 아니면 놔두고?’
첫 번째 분화대만 터진 탓에 아직 눈보라는 차갑기만 했다. 하나를 더 터뜨리고 길을 가는 것이 나은 선택이라 여겨졌다.
신도들의 말에 따르면 방찬혁은 두 번째 분화대에도 없을 테니, 그쪽은 흑구와 온리베어가 정리하고 올 터였다.
‘좋아, 결정했다.’
고천수는 손을 내저었다.
“여기는 너희들이 쓴다고 하니까 포기할게.”
“뭐?”
“우리 먼저 간다고. 몸 잘 녹여.”
각개격파.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데 손댈 필요는 없었다.
“…….”
그저 노려보기만 하는 신도들을 마주보며 분화대 열막에 잠시 몸만 담갔다가 나온 마키나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탁!
이윽고 두 번째 분화대가 터지며 마그마가 신도들을 뒤덮을 때, 고천수는 신호탄을 피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