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90화 (190/224)

190. 재해 (2)

“따, 따뜻해.”

“후우.”

“살았다…….”

순식간에 분화대에 도착한 마키나 단원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늘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눈이 다 녹아 있네.

-캠프파이어 같다.

-천수 너도 숨 좀 돌려라.

안 그래도 엄청난 눈보라에 고천수도 온몸이 얼어 가던 참이었다.

서둘러 분화대 옆에 선 그는 손을 쥐었다 펴며 감각을 회복했다.

“형, 괜찮아요?”

양민철이 옆에서 물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야. 넌 어때?”

“저도 괜찮아요.”

그러면서 양민철은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긴 굉장히 따뜻한 것 같네요.”

위로 올라간 열기가 이쪽으로 쏟아져 내리는 눈보라마저 막아내고 있었다.

평범한 불길은 아니란 뜻이었다.

“그러게. 잠시 피신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인가 봐.”

나지막이 대답하며 고천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시야에 보이는 곳 중에 여기만큼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달리 갈 만한 곳은 없는 건가.’

죄다 하얀 눈에 덮여서 뭐가 뭔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일단은 이곳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좋을 듯했다.

“고천수, 여기 지나갈 수 있는 거야?”

재난 수준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을 짓는 장서연의 물음에 고천수도 딱히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 녀석들은 어디로 간 거지?’

고천수는 방찬혁이 어디로 갔는지가 궁금했다.

‘주위가 이런데도 행군을 강행한 거면, 역시 길을 알고 있는 건가?’

그럴 경우 어떻게든 방찬혁을 따라가는 것이 맞을 테지만, 고천수가 그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단 방찬혁이 길을 알고 있을 가능성은 높았다. 현재로선 상층부를 공략할 수 있는 공략집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물일 테니까.

다만 방찬혁은 리스크를 피하지 않는 부류였다.

여태까지의 행동을 보면 주변인들의 희생도 거의 신경 쓰지 않기 때문에 따라가다가 오히려 문제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그런 문제에 휘말렸다가는 그냥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더욱이 고천수는 방찬혁의 태도가 신경 쓰였던 터다.

‘따라오려면 따라오라는 모습이었지.’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있는 양 행동하는 모양새였다.

고천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온리베어.”

플레이어는 플레이어답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넌 추위 타냐?”

도리도리.

온리베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럼 한 30분만 주변에 아이템 있는지 확인 좀 해 줘. 흑구도 데려가도 괜찮아.”

-왈!

흑구 또한 이런 추위에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듯 짖어 보였다.

온리베어는 그런 흑구를 탄 채 금세 분화대에서 멀어져 어딘가로 사라졌다.

“행동력 하나는 좋네.”

“천수 님.”

중얼거리는 고천수에게 제나가 다가왔다.

“발견된 게 있습니다. 같이 확인하러 가 주시겠습니까?”

“뭔데?”

걸음을 옮겨 제나가 가리킨 곳을 확인한 고천수가 살짝 탄식했다.

“저건…….”

열막이었다.

붉은색 열막이 허공에서 눈보라를 막아내고 있는 곳이 저 멀리 하나 더 보였다.

“이곳하고 똑같은 곳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네.”

“길이 저쪽으로 나 있다는 방증 아닐지요?”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고천수는 다시 기동성을 회복하고 있는 몸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준비되면 바로 출발할 거야. 그때까진 단원들 전부 휴식시키고 열량이 많은 걸 미리 좀 꺼내 먹게 해. 초콜릿 같은 거 있으면 주머니에 넣어 두게 하고.”

“알겠습니다. 또 지시하실 사항은?”

“하령이나 이쪽으로 불러 줘.”

김하령은 분화대의 온기가 닿는 곳 가장 끝 쪽에서 눈보라를 내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제나는 곧장 그곳으로 가 김하령을 고천수에게로 오게 해 주었다.

“부르셨나요?”

“그래,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눈보라요.”

너무나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김하령이 답했다.

“아니, 그건 알아. 근데 왜 멀뚱하게 보고 있었나 해서.”

“음, 뭔가 죽음의 기운이 느껴져서요?”

“갑자기 중2병이라도 오려는 건가?”

“디엔드요.”

김하령이 의외의 말을 꺼내놓았다.

“이 온기에 닿기 전까지만 해도 저희 다 쓰러지기 직전이었어요. 근데 디엔드는 그대로 가 버렸잖아요.”

“…….”

“죽었을 거예요.”

김하령이 단호하게 말했다.

“적절한 장비가 없으면 사람은 이런 환경에서 많이 못 걸어요. 지금 눈보라가 산악 지형에서 볼 법할 정도로 심해졌어요. 산악인도 이럴 땐 안 돌아다녀요.”

“그런 거 해 본 것처럼 얘기하네.”

“예전에 동사 사례로 배운 적이 있어서요.”

맞는 말이었다. 동사에 대해 고천수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눈보라는 시계(視界)를 고작 10m 정도로 제한할 만큼 강해졌다.

저 멀리 열막도 눈보라를 꿰뚫을 정도로 붉은 기운이 있어서 보이는 거지, 그게 아니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는 방찬혁이 자신만만하게 눈을 뚫고 갔을 리 없었다.

‘망할.’

괜히 안 따라갔나 싶기도 했지만 곧 고천수는 생각을 고쳤다.

분화대에 왔을 때도 상당히 아슬아슬했다.

만약 그대로 따라갔다가 한 템포라도 꼬였다면 동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형님들. 보고만 계실 겁니까?”

여러 가지 추론으로 따져 봤을 때, 방찬혁이 또 다시 비밀 통로를 사용할 수 있지 않은 이상은 분화대가 아닌 다른 곳에 중간 캠프를 세울 수 있는 지점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추론이었다.

단서가 적어서 고천수도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방찬혁 지금 밸런스 파괴하고 있잖아요. 예? 저는 지금 10젠도 없는데.”

-ㅋㅋ 또 시작인가.

-아닠ㅋㅋㅋㅋ 방찬혁이 그러고 있는 걸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지.

-여기 7층이랑 크기는 비슷해. 근데 여기서부터는 비밀 통로 없을걸? 이 정도는 이제 스포 아닐 듯?

쪼아댔더니 돌아오는 답이 있었다.

“예, 그래요, 형님. 이겁니다.”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방찬혁도 출구까지는 이 눈보라를 헤치고 지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곳을 분화대를 거치지 않았느냐가 의문인데…….

-[울부짖는정신병자] : 매니저라서 빠져 있으려고 했는데, 매니저라서 오히려 아슬아슬하게라도 알려줘야 할 것 같네.

갑자기 끼어든 매니저가 말했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저쪽에서 뭔가 활용하고 있으면 너도 그래야지. 엿볼 땐 엿보더라도 일단 우위부터 잡으려면 네가 플레이어란 걸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자각.

그런 건 이미 하고 있었다.

고천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형님, 지금 갖고 있는 게 너무 적어요. 활용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노리고 있는 건 스킬을 활용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적절한 기회를 잡기 힘들었다.

방찬혁은 속을 알 수가 없는 뭔지 모를 놈이었다. 블러핑 정도로는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결국에는 진짜 정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까지 그놈이 우위를 점하고 있지 않은가.

-항상 게임이란 게,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이없는 데서 뭐 튀어나오고 그런 거 아님? 특히 공포게임은 더 그렇지. 더 지치게 하려고 열 받게도 꼬아 놓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놓치고 있는 게 가장 무서운 거지. 당연하지 않게 됐을 때도 있으니까.

-[한도초과] : 아!

한도초과까지 이제 막 떠올린 듯한 반응을 보며 고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대체.’

당연한 듯이 지나치는 것.

게임 플레이를 할 때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이긴 했다. 사실상 이미 열쇠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열쇠를 찾고 있을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 시바! 채팅창에 스포일러 금지 경고 떴어! 이 정도로?

-온리원 이 자식 게임 끝날 때쯤 되면 더 심하게 이 ㅈㄹ 해놓더라.

-좀 빡세네. 아.

그 와중에 시청자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지만 고천수는 아직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불투명한 시계만큼이나 그는 답답한 심경이었다.

‘머리가 굳었어.’

탑을 올라오면서 정형화된 공략법을 찾다 보니 오히려 상식 밖의 일을 떠올리기가 힘들어졌다.

방찬혁이 비밀 통로를 이용해 올라온 것마저 거의 있을 수 없는 반칙 정도로 생각해서 허를 찔리지 않았던가.

온리원은 시청자의 스포를 다소 엄격하게 제한하는 스타일의 관리자였다.

애초에 고천수의 방송을 혼자 시청할 때도 1인 플레이를 즐겨 보는 타입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그점을 강조하는 듯한 온리원의 이런 행동 역시 힌트일 수 있었다.

“정보창.”

고천수는 홀린 듯이 말했다.

[정보 1 : ×] - [갱신 1젠]

[정보 2 : ×] - [갱신 1젠]

[정보 3 : ×] - [갱신 1젠]

그리고 거기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 고천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마치 엑박이라도 뜬 것처럼 정보창의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이거, 뭐야.”

정보들에는 새로고침을 하라는 듯 갱신 버튼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가격표까지 달려 있었다.

“뭡니까, 이거?”

고천수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채팅창을 바라보았다.

“예? 뭐냐고요.”

-ㅋㅋㅋㅋㅋ 알려 준 건데 왜 그랭.

-갱신이 안 된 거지, 뭐. 그때그때 안 건드려서 엑박까지 떠버린 듯.

-갱신을 안 했으니까 알람도 안 나왔겠지.

“와.”

고천수는 머리를 쥐어잡았다.

여태 이걸 열어 볼 생각을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초록색 선을 밟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웃기게도 그 선을 밟아야만 정보가 갱신된다는 규칙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시스템 오용.

당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것들에만 너무 이입한 나머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더블 체크하지 않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와, 미친…….”

고천수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식은땀이 다 흘러내렸다.

자신의 위치를 잠시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너무 그러지 마셈. 이런 건 원래 잊어버리기 쉬워서.

-유용한 정보가 뜨려면 대략적으로 갱신이 될 법한 큰 분기점은 지났어야 됨. 초록선 같은 강제 갱신 지점이 없으면.

-9층까지 중층부니까 어차피 10층부터 떴을 건데. 그때는 갱신했어도 팻말에 걸린 그 내용이랑 같았을 거.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야 잠시 깜박했거나 굳이 당장 알려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고천수는 크게 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되짚어봤지만 딱 언제다 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잠수 패치처럼 바뀌어 있는 갱신 방법이었다.

‘1젠이 필요하다는 건가?’

갱신을 하려면 반드시 일정 금액을 지불해야 하게 되면서 알림조차 뜨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놀란 심장이 다 두근거렸지만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1젠……!’

정보가 부족한 지금에서는 아이템보다 훨씬 값진 것이었다.

고천수는 바로 정보 1에 달린 갱신 버튼부터 눌러보았다.

띠링!

1젠이 소진되면서 바로 정보가 나타났다.

[정보 1 : 분화대에 10분 이상 머물러있으면 위험합니다.] - [갱신 1젠]

“……?”

갑작스럽게 뜬 내용에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분화대는 아직 멀쩡하게 자기 자리에서 불꽃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천수 님,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분화대를 노려보고 있는 고천수를 보며 제나가 의문이 든 듯 다가와 물었다.

고천수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보라 때문에 흑구와 온리베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 씁!”

“천수 님?”

“단원들 다 준비시켜! 여기서 움직일 거니까!”

제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마키나 단원들을 향해 달려가며 바로 출발할 테니 준비하라고 소리쳤다.

고천수는 여전히 분화대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뭐냐, 넌 또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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