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재해 (1)
11층.
디엔드 신도들이 멋대로 먼저 튀어 나가서 죽은 뒤, 10층은 더 이상 서로에 대한 배신 없이 힘을 합쳐 통과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 층인 이곳에서였다. 10층에서 계단을 타고 올라온 두 그룹은 11층의 입구에서 아직도 함께 서 있었다.
휘이이잉.
입구에서 본 11층은 폭설이 쏟아지고 있는 한 도심의 모습이었다.
-야, 이건 거의 재난급 아님?
-물에서 나온 뒤에 겨울. ㅋㅋㅋ
-진짜 얘네 돌겠다.
그 말대로였다. 입구에 선 두 그룹은 갑자기 낮아진 온도에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앞으로 나아가기도 전에 동상에 걸릴 것이었다.
‘이 자식, 여기 이런 거 먼저 알고 있었을 텐데.’
디엔드도 딱히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안에서 방한 용품을 구하려는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방찬혁은 본인이 알고 있는 정보를 신도들과 공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바로 아래층에서의 일만 봤을 때도 그는 신도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혼자 독점하고 유용하려는 것일까.
그렇다면 역시 고천수는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하령아.”
“아직요.”
살짝 이름을 부르자 김하령이 고개를 저었다.
“안 하고 있어요.”
김하령은 고천수의 요청을 받고 방찬혁의 모습을 계속해서 살피고 있었다.
방찬혁이 혼자만의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지.’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방찬혁의 행동이 보이지 않는 이상 당장 스킬을 쓰는 건 도박이었다. 탑에 들어오자 도움을 주는 것이 더욱 박해진 시청자들이 스킬까지 추가로 줄 일은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이대로 버틸 수 있으면 버티는 게 나았다.
“천수 님, 역시 안 됩니다.”
제나도 고천수에게 살짝 속삭였다. 그녀의 능력도 방찬혁에게는 통하지 않고 있었다. 메인 빌런일 테니까.
“그래, 그럼 이제 그만해도 돼. 네 눈 색이 계속 붉으면 저쪽도 신경 쓸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남은 건 역시 스킬뿐이었다.
“……고천수.”
그때, 권민주가 다가와 고천수에게 말했다.
“교주님께서 네 의사를 물으신다.”
“……의사?”
고천수가 물음표를 그리자 권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행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동행.
10층에서 올라오고 난 뒤에는 확실히 결정해야 될 문제였다.
‘어떻게 할까.’
솔직히 옆에 있어야 견제하고 스킬 타이밍을 잴 수 있는 건 맞았다.
디엔드만 남으면 이쪽이 모르는 방법으로 저 눈보라를 재껴 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동행 자체는 싫지만 여기서는 고천수에게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다.
“같이 간다고 하면?”
그렇기에 이렇게 떠보았더니, 권민주는 비웃음을 흘리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같이 간다고 하면 네 일행들은 떨어뜨려야 해.”
“뭐? 뭔 소리냐?”
“너 포함 다섯이다.”
권민주는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그 인원만 들여 주겠다고 하신다.”
그 말에 고천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곧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
그게 방찬혁의 의사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제나가 권민주의 앞에 나서며 소리쳤다.
“천수 님 포함 다섯이라고? 지금 너희 상황을 잘 모르는 건가?”
“우리 상황?”
“우리 쪽이 더 인원이 많이 남았어! 그쪽보다!”
10층에서의 일로 디엔드의 신도는 50~60명가량 남았다. 마키나 쪽이 적어도 십수 명은 더 많았다.
“흡수가 되려면 그쪽이 되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하지 마!”
“야.”
권민주는 그런 제나의 태도가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숫자가 다가 아니야.”
그녀는 주변의 환경을 손으로 가리켰다.
“너희, 몇 명이나 동사하지 않고 여길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뭐?”
“어차피 너희는 우리와 협력하지 않으면 하나씩 얼어 죽어나갈 거야.”
승기를 잡았다고 본 것일까, 그녀는 아예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러니까 응할지 안 할지나 선택해.”
-이거 싸우자는 거 아님?
-한판 해야 하나?
-병신들아. 싸우긴 뭘 싸워. 다 뒈질 일 있어?
여기서 싸웠다간 체력 소모가 심해서 누구도 11층을 빠져나가기 어려워진다. 고천수는 주먹에 꽉 힘을 주었다.
‘이 새끼도 우릴 떠보고 있네.’
서로 괴멸을 각오하고 해야 하는 짓이지만,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방찬혁은 꽤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의 도발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는 의미였다.
‘의도가 뭐야, 방찬혁.’
분명 탑을 살아서 올라가고 싶을 텐데도, 자기 목숨을 굳이 또 아까워하지는 않는 대범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 이쪽을 뒤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지만 공략법이 더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렇게까지 먼저 무리하게 이쪽에 도발을 시도할 필요는 없었다.
“뭐, 좋아.”
어쨌거나 확실한 건 방찬혁은 탑의 꼭대기를 향한다는 사실. 서로 부딪치게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동행 안 해.”
다만 여기서 싸울 생각도 없었다.
“방찬혁한테 그만 갈라서자고 전해. 단, 그래도 거지같은 환경 때문에 죽을 확률이 높으니까 서로 마주치는 정도로는 총질하지 말자고도 하고.”
“그런 결정인가.”
이미 예상했던 대답인지 권민주는 태연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천수가 다음으로 한 말에 바로 평정심을 잃었다.
“그래, 그리고 교주한테 할 말 있으면 좀 직접 하라고도 하고. 왜 자꾸 너 같은 따까리가 내 앞까지 와서 신경을 건드는 거냐? 설마 우리가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뭐?”
“권민주.”
고천수는 그녀에게 현실을 가르쳐주었다.
“소모품이면 소모품답게 예절 좀 갖춰. 누가 보면 교주랑 일심동체인 줄 알겠어.”
“……이 자식이!”
권민주는 순간 표정을 구기며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제나가 총구를 권민주의 가슴팍에다가 들이밀었다.
스릉!
권민주의 검이 반쯤 나오다가 멈췄다.
제나는 하얀 숨결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디 더 움직여 봐. 조금이라도.”
일촉즉발.
눈보라가 몰아치는 도시보다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파고들었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소란에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만.”
그리고 그 상황을 끝내려고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방찬혁이었다.
“말 하나 전하라고 했더니, 대체 무슨 소란이지?”
“교주님, 이 녀석들이 말을……!”
“뭐라고 했는데?”
방찬혁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묻는 말에 권민주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소, 소모품이라고 해서.”
“…….”
방찬혁은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고천수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와 마주보았다.
“고천수. 우리와는 동행하지 않기로 했나 보지?”
하지만 방찬혁은 그런 그에게 따져 묻기보다는 원론적인 질문을 다시 던졌을 뿐이었다.
“그래. 여기서부터는 따로다.”
“아쉽군.”
방찬혁은 디엔드 신도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신도들이 이동 준비를 마치고 다가왔다.
“우리 제안을 받아 줬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알잖아.”
받아 줄 수 없는 제안이었다는 것을.
“좋아. 그럼 11층 끝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지.”
그렇게 방찬혁은 제나의 총구를 손으로 치우고는 권민주를 데리고 돌아갔다.
싱거운 결말이었다.
권민주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남았는지 계속 이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후. 그렇게 나온다는 건가, 방찬혁?’
고천수는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좀 흔들어두긴 했으려나?’
광적인 놈들도 섞여 있겠지만 현재 이곳의 디엔드 신도들은 와해가 쉽다는 것도 10층에서 증명됐다.
아마 딱히 누군가를 아끼지 않는 방찬혁의 태도 때문일 터.
내부 분란이라도 일으킬 수 있으면 좋을 듯해 강한 워딩을 심어 놓았는데, 앞으로 권민주가 어떻게 느낄지는 미지수였다.
“자! 우리도 출발 준비를 합시다!”
고천수는 고개를 외쳤다. 뭐가 됐든 여기서 시간을 더 끌 수는 없었다.
대기하고 있던 마키나 단원들은 모두 짐을 챙기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
-야. ㅋㅋㅋㅋ
-뭐임.
-천수야, 뭣허냐. ㅋㅋㅋㅋㅋ
채팅창이 웃음으로 가득 차는 것을 보면서 고천수는 코를 훌쩍거리며 답했다.
“형님들. 방법이 없잖아요, 방법이.”
고천수의 앞.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디엔드가 걸어가고 있었다.
“길도 모르고 아이템도 없어. 그럼 이미 준비돼 있는 놈을 따라갈 수밖에 없잖아요?”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방찬혁을 놓치면 잃게 되는 것이 많았다.
“제 딴에는 전략적인 방향이다 이겁니다.”
디엔드의 신도들은 뒤에서 마키나가 따라붙는 것에 신경이 쓰이는지 계속해서 힐끔힐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물론 디엔드를 신경 쓰는 건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고천수.”
장서연이 추위에 이를 딱딱거리면서 말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설마 따라가는 거야?”
“길이 좀 겹치네요.”
고천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따라가는 게 아니고 전 원래 이 길로 가려고 했습니다.”
“뭐? 너 길을 알고 있는 거야?”
“자세하게 설명드릴 순 없지만 맞아요.”
-맞아욬ㅋㅋㅋㅋ
-맞긴 뭘 맞아.
-따라가고 있잖아!
“저 녀석들도 길은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만찮은 놈들이니까 긴장은 해 두세요.”
고천수가 하는 말에 장서연은 뭔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령만 느네, 천수.
-근데 우리가 별로 도움 못 줘서 그런 것도 있는 듯. 반성의 의미로 오늘 저녁 라면만 먹음.
-떨고 있는 놈한테 라면 ㅇㅈㄹ ㅋㅋㅋ.
악마가 따로 없었다.
고천수는 따끈한 음식을 떠올리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디엔드를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몸에 한계는 있었다. 디엔드가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으면 일단 근처에 있는 건물에라도 들어가 몸을 녹일 뭔가라도 찾아야 했다.
온몸이 삽시간에 얼어붙고 있었다.
“어?”
그런 고천수의 눈에 띈 것이 있었다.
“저건…….”
분수대였다.
저 멀리 보이는 광장에 커다란 분수대 하나가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형태의 분수대는 아니었다.
물 대신 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불?”
“형! 저거 보여요?”
“천수 님, 저기!”
일행들도 분수대, 아니 분화대를 발견한 듯 외쳤다.
‘몸을 녹일 수 있는 곳!’
거대한 모닥불마냥 활활 타오르는 그곳을 본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디엔드가……!’
디엔드는 앞에서 우측 길로 빠지고 있었다.
저 멀리에 있는 광장이 눈에 확 띈 것도 디엔드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이었다.
“어? 디엔드는 다른 곳으로 간다.”
“쟤네는 저거 못 봤나?”
“뭐지?”
일행들도 의문이 드는 얼굴로 디엔드를 바라보았다.
고천수는 빠르게 걸어가 디엔드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확인했다.
‘뭐야.’
딱히 뭐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 아니었다.
디엔드는 그냥 여전히 눈보라만 치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형님들.”
고천수는 이를 더 심하게 딱딱거리면서 말했다.
“저희 분화대에서 쉬었다 가도 됩니까?”
-분화대?
-아, 저거.
-[한도초과] : 쉬어도 되긴 해! 조금만!
확인은 받았다.
고천수는 잔뜩 굳은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저희는 저쪽에서 몸을 녹이고 갑니다! 다들 이동하세요!”
디엔드가 다른 쪽으로 가고 있던 것에 찝찝해하던 마키나 단원들도, 당장 확보할 수 있는 온기를 눈앞에 두고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빠, 빨리 가자!”
“추워 뒈지겠어!”“얼른 가자!”
달려가는 마키나 단원들을 보며 고천수도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때는 간과하고 있었다.
뭔가 존재한다는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