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살얼음 (2)
‘망할.’
어디까지나 가정이기는 하지만 지금 떠올린 생각이 맞는다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온리원 님.”
사정을 듣기 위해 온리원을 호출했지만 이번에는 아예 답이 없었다.
현재 도달한 곳은 10층. 정상까지 고작 4층 더 남은 만큼 침묵으로 지켜보겠다는 뜻일까.
-천수가 화날 때만 부르니까 온리원 잠수 탄 듯.
-좀 더 부드럽게 부르면 돌아올지 모름.
-두부라도 되라는 거냐. ㅋㅋㅋ
반응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는 예상했다.
온리원은 말도 안 하고 고천수를 이리저리 굴려댄 전적이 있으니까.
문제는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략집을 물리적으로 뺏을 수 없는 형태로 갖고 있다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거 없어.’
정보가 부족하면 저쪽에 끌려 나니게 된다.
탑에서는 이쪽 정보창이 제대로 갱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한 생각에 좀 더 확신이 섰다.
“여러분.”
그렇기에 고천수는 주변의 동료와 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결정했습니다.”
그러고는 방찬혁이 있는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걸 보고 깜짝 놀란 제나가 서둘러 뒤를 따랐다.
방찬혁 쪽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고천수는 다시금 마주보는 자리에 섰다.
“상의를 할 시간은 충분했나?”
“아니.”
방찬혁의 물음에 고천수는 짧게 대답했다.
“그래도 결정은 했다.”
슥.
고천수는 손을 내밀었다.
“네 말대로 이곳을 같이 지나가도록 하지.”
그 모습을 본 마키나 단원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이 지나간다고……?”
“저 녀석들이랑?”
“정말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방찬혁은 고천수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 생각했다.”
탁.
“나도 잘 부탁하도록 하지.”
방찬혁이 고천수의 손을 맞잡음으로 인해서 잠시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
양쪽의 인원들은 한순간에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에 대해서 각자의 복잡한 심경으로 인해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교주님은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
그중에서 방찬혁을 보좌하고 있는 권민주 또한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똑같았다.
‘우리를 공격한 놈인데.’
고천수 일행은 디엔드의 입장에서는 경쟁 상대였다.
크기가 크기인 만큼 현재 상태에서 흡수는 불가하고 척결하거나 어떻게든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방찬혁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7층에서 고천수에게 디엔드의 신도들이 당할 때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느 순간에나 태연한 건 그의 원래 성격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무척이나 차분했다.
신도들은 방찬혁이 약속된 믿음을 갖고 있어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권민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이라면, 바로 방찬혁이 고천수를 어떻게 대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8층 입구 쪽에서 10층까지 한 번에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사용한 방찬혁은 이곳에 도착해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추월은 한번이면 족하다, 라고.
더 이상 뒤를 따라잡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였지만, 어떻게 보면 이걸로 상대방에게 필요한 패를 보여 줬다라는 의미로도 들렸다.
즉, 방찬혁은 이런 구도를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것이었다.
‘대체…….’
권민주는 다시 방찬혁과 고천수를 쳐다봤다.
둘 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권민주는 자신의 교주를 믿었다.
제나 대신 자신을 선택해 데려온 것만 해도 함께 최상층에서 구원의 길을 걷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차분한 마음으로 검에 손을 얹었다.
슥.
그사이 고천수는 방찬혁에게서 손을 뗐다.
“같이 건너가기로 했으니, 이제 방법을 정하자고.”
***
10층을 건너갈 방법.
그건 간단했다.
“형, 정말로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예요?”
“여기 너무 깊은 거 같은데. 여긴 물속도 안 보여.”
“다 같이 죽자는 거야?”
방법은 강에 그냥 무조건 뛰어드는 것.
그 얘기를 들은 양민철 일행은 기겁하며 주춤거렸다.
“전 천수 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들 중 홀로 완전한 믿음을 보인 김하령이 손을 뻗었다.
“저기 그렇게 적혀 있잖아요.”
50인 이상 권장.
즉, 50인이 한 번에 들어가면 그렇지 않았을 때와는 상황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천수 님은 저 뜻을 정확히 이해한 것뿐이에요.”
만족스러운 답변에 고천수는 김하령을 칭찬했다.
“그래, 역시 하령이가 상황을 잘 보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팍 숙이는 김하령을 보며 장서연이 미간을 팍 찌푸렸다.
“누가 보면 아주 우리는 상황을 못 보는 줄 알겠어. 찝찝하니까 그런 거 아냐, 찝찝해서.”
그러면서 그녀는 디엔드 신도들과 마키나 단원들을 다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다들 겁나게 떠드는 거 안 보이냐? 둘 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갈라선 두 집단.
디엔드와 마키나는 서로가 함께 강에 뛰어드는 것만도 거부 반응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디엔드와 마키나 모두 서로의 안내자를 끝까지 믿는다고 결정한 상태라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장서연 정도는 할 말을 감추지 않았다.
“넘어가자마자 총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거 50명 이상 권장이면 누군가는 50명이 함께 입수하지 않은 상태로 물에 남는다는 거잖아.”
“그렇죠.”
“괜찮은 거야, 이거?”
걱정을 표하는 장서연을 보며 고천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저쪽과 서로 방법을 의논한 거 아닙니까.”
그는 방찬혁과 디엔드와 마키나 단원들의 입수 순서를 정했다.
서로 똑같은 순서로 들어가는 거였다. 인원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방법으로도 일단 상호 견제는 충분했다.
다만 문제는 장서연이 말한 대로 50명 미만이 물에 남았을 경우였다.
“제가 얘기한 대로만 하면 됩니다.”
“흐음.”
장서연은 그래도 여전히 찝찝함이 남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 알겠어. 그래도 여기를 빠져나간 뒤에도 계획이 있기를 바랄게. 저 녀석들이랑 계속 같이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알겠습니다.”
고천수도 그건 사양이었다.
“준비됐나?”
그때, 권민주가 멀지 않은 곳에서 소리쳤다.
제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한 녀석입니다. 나중에 제가 저 녀석을 끝장내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래.”
대충 대답해 주고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을 돌아보았다. 전부 준비는 마쳤다.
이제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들 이동!”
고천수의 지시에 마키나 단원들이 넓게 퍼졌다.
디엔드의 신도들도 횡으로 길게 늘어져 강 앞에 섰다.
“입수!”
그리고 양측 리더의 지시에 따라 한 번에 물에 발을 담갔다.
풍덩! 풍덩!
전원이 한꺼번에 강에 들어왔다.
처음에 일부 인원이 약간 더 빠르게 입수하자 출렁거리려고 했던 강이 다시 잔잔히 흘러갔다.
“바, 방금 봤어?”
“약간 출렁였던 것 같은데.”
“맞아.”
단원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디엔드의 신도들도 함께 강을 헤치고 반대편으로 향했다.
잠시간의 적막.
서로가 시선을 흘깃 보내며 강을 걷는 시간이 지속됐다.
긴장감이 주위를 감돌았다.
-근데 여기 50명 미만으로 남으면 어케 되는 거?
-어떻게 되는지 네가 한번 남아 보셈.
-다시는 못 물어보게 될 듯.
물밑에 꿀렁거리며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까 전에 물이 조금 출렁인 건 밑을 기어 다니는 뭔가가 한꺼번에 지나가며 물살을 일으켜서인 것으로 추정됐다.
“큿!”
“아래 뭔가가 있어!”
“제기랄!”
단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그리고 그건 디엔드의 신도들 쪽도 마찬가지였다.
“교주님!”
“밑에 뭔가가 있습니다!”
“으아아!”
하지만 방찬혁은 거기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고천수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나가기만 하면 돼. 나가기만 하면.’
고천수는 강의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가 그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나가자마자 공격 태세를 취해야 할까?
이쪽에는 흑구까지 있었다. 전력만 따지면 결코 디엔드에 밀릴 수준은 아니었다.
“다 왔습니다!”
끝에 다다르자 양쪽의 인원들이 그 사실을 알렸다.
“다들 준비하십시오!”
그 얘기에 모두가 강 끝에 올라서기 전 예비 동작으로 땅을 짚었다.
“준비되셨습니까?”
물어본 누군가가 이내 곧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자, 하나……!”
“으악! 이런, 시발!”
아직 둘도 세지 않았을 때였다.
발밑에 무언가 있다는 사실에 공포에 질린 디엔드의 신도들 몇이 반사적으로 먼저 위로 올라섰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타이밍이 어긋났다.
누군가의 절망적인 외침을 시작으로, 이후는 아비규환이 되어버렸다.
“시발, 비켜!”
“나도 올라갈 거야!”
“교주님부터 올려드려!”
디엔드가 먼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함께 동시에 올라가기로 해놓고.
“시발, 이 엿 같은 새끼들!”
고천수는 총을 들어 올렸다.
50명이 꼭 살아서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교전 상황에 들어가더라도 몇 놈들을 쏴 버려서 강에서 기어 올라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어차피 공격을 해야 한다면 저쪽 전열이 흐트러져 있을 때가 기회였다.
-[한도초과] : 천수야, 기다려!
이 말이 없었다면 말이다.
-교주도 안 올라갔어!
-주위를 봐!
-침착해, 새꺄!
‘침착……?’
마키나 단원들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들도 땅을 잡은 채로 공포에 질린 눈으로 고천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행동하지 않고 있었다.
고천수의 지시만을 믿고 따르겠다는 듯.
“아.”
그때였다.
땅에 먼저 올라섰던 디엔드 신도들이 갑자기 바닥으로 훅 꺼졌다.
“뭐, 뭐야! 뭐야아아아!”
“바닥에 뭔가……. 으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
그들이 빠진 건, 마치 녹색의 땅처럼 보이는 강이었다.
“사, 살려! 살려 줘!”
십수 명의 사람들이 허우적댔다.
출렁이는 녹색의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면서 말이다.
“살려 줘! 살려 줘, 제발!”
“교주니이이임!”
하지만 아직 물속에 있는 방찬혁은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믿음을 저버린 듯한 사람을 응징하는 듯이.
‘50명.’
고천수는 순간 그 말이 의미하는 뜻을 알아챘다.
그건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 50명 이상을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촤아아아아아.
먼저 땅을 짚고 녹색의 강으로 넘어간 신도들은 그대로 삼켜져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방금까지 패닉에 빠진 채로 원래 있던 자리에 남아있던 자들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천수 님……?”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고천수는, 옆에 다가온 제나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어어.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ㅋㅋㅋ
-천수 넋 나갔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인마.
‘이런 망할.’
고천수는 옆의 방찬혁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천수처럼 이 상황에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만 더 쪽 당할 뻔했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조차 보이지 않는 방찬혁을 보며 고천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상관없어.’
뭐가 됐든지 간에 지금 희생당한 건 디엔드의 신도들뿐이었다.
숫자마저 이쪽이 더 우세해졌다.
‘또 무슨 비밀 통로를 알고 있어서 여유를 부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탑에 대해서 미리 알고 계획을 먼저 짜 두었다고 해서, 이런 상황에 동요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서 반드시 유리한 게 아니었다.
고천수는 다시 마키나 단원들, 디엔드 신도들과 함께 반대편으로 넘어갈 일을 준비하면서 땅을 짚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찬혁과 악수를 나눴던 손이었다.
‘방찬혁. 너, 그거 알지 모르겠네.’
고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한테도 네가 모르는 스킬이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