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살얼음 (1)
반갑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고천수는 교주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어떻게 된 일인지는 깨달았다.
‘그치. 내가 이름을 적어 놨었지.’
도발성으로 적어 둔 것이었지만 한 번에 그게 누구인지 알아본 게 신기할 뿐이었다.
-표정 왜 그럼. 바로 고천수라고 해서 놀랐나?
-이 상황에서는 너라고밖에 안 보이지 않아?
-리더처럼 나섰잖아.
그렇다고는 해도 교주 자신이 지키고 있는 이미지라는 게 있을 것 아닌가.
만약 아니었으면 꽤 무안한 상황이 됐을 것이었다.
“방찬혁이라고?”
어쨌거나 교주가 자기소개를 했으니 고천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그래.”
교주는 초연한 태도로 물었다.
“그것보다 내 신도들을 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맞나?”
신도들.
고천수의 뒤쪽으로 차례대로 도착하고 있는 마키나 단원들을 향하는 시선에, 고천수는 걸음을 슬쩍 옮겨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네 신도들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방찬혁은 어깨를 살짝 으쓱해 보였다.
“지금은 너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거군.”
가볍게 말하는 그를 보며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자식.’
보자마자 맞붙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의연하게 굴고 있었다.
‘방심하게 만들려는 건가?’
교주인 방찬혁은 이쪽을 이용했고, 이쪽은 그의 세력에 타격을 입혔다.
당장이라도 서로 총알을 난사해도 모자랄 판에 이 어이없는 전개는 무엇이란 말인가.
“천수 님. 다 도착했습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고 대기하는 사이에 마키나 인원들은 다 도착했다.
제나의 말을 들은 고천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
다들 방찬혁과 맞닥뜨린 것에 당황한 듯 총구를 치켜들고 있었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방찬혁이 오히려 당연한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고천수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교주님, 괜찮으시면 제가 대화를 해 보겠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나선 건 권민주였다.
그녀는 지나칠 정도로 초연한 방찬혁과는 다르게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건방진 녀석들을 교주님께서 직접 상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러서.”
그녀가 다가서자 제나가 총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천수 님에게 다가오지 마.”
“하.”
권민주는 제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천수 님? 아무리 갈 데가 없어도 그렇지, 그런 떨거지 밑으로 기어 들어가다니.”
“뭐?”
“발악하는 것도 이 정도면 애잔하네.”
그녀의 말에 제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이라도 총을 쏴버릴 기세였다.
“그 말 취소하는 게 좋을 거야. 다같이 머리에 구멍 나고 싶지 않다면.”
“교주님 쪽은 쳐다도 못 보고 있는 주제에 말은.”
권민주의 말대로 제나는 방찬혁 쪽에는 제대로 시선을 두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기 때문에 나서기는 했지만, 자기가 몸담았던 그룹의 리더를 대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무리하네.’
고천수는 그런 제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만약 전투에 돌입한다고 해도 제나가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흥분과 떨림 때문인지 그녀가 살짝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왜! 한번 해볼까?”
그러면서도 제나는 기세를 굽히진 않았다. 평소와 같지 않은 언동이었다.
그 기세대로 이곳을 뚫고 나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안 돼.’
여기서 전투를 맞붙으면 인원이 50명 밑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컸다.
고점 선점도 하지 못한 상태의 전투였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밀려들며 고천수는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권민주.”
그때, 방찬혁이 권민주를 향해 말했다.
“신도들이 희생된 것에 너무 열을 낼 거 없어. 그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얘기했을 텐데.”
“예? 하지만…….”
“한 번 더 얘기해야 알아듣는 사람이었나?”
방찬혁이 권민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제나에게 열을 올리며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했던 그녀는 얼른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뒤쪽으로 빠졌다.
“죄, 죄송합니다.”
그녀를 물린 방찬혁은 제나에게도 손짓했다.
“너도 뒤로 가.”
별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제나가 총을 든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쏘려면 쏘든가.”
일촉즉발.
한 발만 먼저 쏘더라도 서로간의 격렬한 전투가 시작될 것이었다.
제나는 고천수에게 시선을 향했다.
물러설 때 물러서더라도 방찬혁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모습이었다.
“괜찮아. 뒤로 가 있어.”
제나는 그제야 걸음을 뒤로 옮겼다.
그녀의 긴장된 표정도 함께 누그러졌다.
“그래, 방찬혁. 나랑 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솔직히 고천수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많았다.
하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지금 그가 무슨 의도를 갖고 여기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스윽.
방찬혁은 천천히 흘러가는 강을 가리켰다.
“별 것 없어. 그냥 강을 건너가자는 것뿐이지.”
10층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이었다.
방찬혁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과 함께 강을 건너갔을 것이었다.
“형님들, 이 자식 뭐 하는 겁니까?”
하지만 고천수는 그의 의도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정보까지 부족한 만큼 시청자의 반응으로 현재 분위기를 알아차려야만 했다.
-너랑 놀고 싶다는 거 아님?
-지금 맞붙으면 둘 다 손해니까.
-맞아맞아.
‘이 상황을 제어하려는 중이라는 건가?’
서로 위협적인 태도로 나가면 당연히 총질부터 할 상황이었다.
갑자기 나타나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간 방찬혁은 이 층을 통과하기 위해 또다시 이쪽을 이용하려는 듯했다.
‘뭐야, 대체.’
50명 이상이 반드시 필요한 구간.
그건 아무리 봐도 이곳으로 보였다.
강 앞에는 50명 이상의 입수를 권장한다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말이 권장이지 사실상 강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디엔드는 지금 고천수가 시선으로 훑어서 추측한 인원만 해도 이미 50명은 넘은 상태였다.
굳이 이쪽과 같이 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먼저 건너고 있다가 이쪽이 뒤에서 총질할 것을 대비해서 그냥 머무르고 있던 거라면 이해가 갔다.
즉, 방찬혁 또한 지금 막 이곳에 도착한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네.’
순간적인 판단으로 이랬다는 것인데, 보통 놈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고천수는 딱딱한 말투로 질문했다.
“일단 하나 묻지. 넌 여기에 어떻게 먼저 올라왔지? 분명히 우리가 먼저 올라왔을 텐데.”
아무리 바빠도 핵심적인 의문은 해결해야 했다.
방찬혁은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그것까지 대답해 줘야 할 의무가 있나?”
돌아온 답은 이랬다.
‘뭐, 좋아.’
고천수도 제대로 된 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공략집을 가지고 있다면 어차피 이 탑에 숨겨진 다른 장치가 이동로를 알고 있을 확률도 높았다.
그나마 지금 이 층에서는 디엔드도 먼저 나아갈 방법이 없었던 걸로 보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건너갈 때까지는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 그것만 서로 약속해 두면 될 것 같은데.”
어려운 문제였다.
고천수는 다시 뒤를 흘깃했다.
“상의해도 좋아. 나도 잠시 쉬고 있을 테니까.”
방찬혁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자신의 무리로 돌아갔다.
고천수도 몸을 돌려 마키나 단원들에게 향했다.
“천수 님, 어떻게 합니까?”
“역시 공격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예상대로 단원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디엔드와는 적대한 상태였다. 솔직히 언제 누가 공격을 시작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인질 교환 같은 거 하면 어떰?
-고천수랑 방찬혁이랑 바꾸면 될 듯.
-미친놈. ㅋㅋㅋ
그런 건 별로 고천수에게 끌리는 방법이 아니었다.
‘인질로 보낼 사람이 없어.’
여태까지 행동을 보면 방찬혁은 신도의 희생을 그렇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신도들도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구조로 보였다.
탑에 자기들 중 누구라도 먼저 오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식의 전략을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저쪽에서는 인질을 버리기도 쉽고, 이쪽도 그 정도의 중요성을 가진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양쪽 다 약속으로 걸어둘 만한 인물은 없던 것이다.
‘진짜 머리들끼리 교환밖에 없나?’
그나마 시청자들이 한 말이 가능성이 있는 것이긴 했지만, 그런 무모한 짓은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내걸 수는 없으므로.
“천수 님.”
그 와중에 제나가 다가와 말했다.
“지금 제 능력으로 저쪽의 편성 확인은 대략 마쳤습니다. 지시만 내려주신다면 바로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흠.”
제나는 의욕적이었다. 당장이라도 고천수가 디엔드를 제압하고 올라서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장서연 씨.”
고천수는 양민철 일행 중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장서연을 불러 물었다.
“여기까지 오시면서 디엔드 전력 직접 확인했죠? 저희랑 맞붙으면 어느 정도 피해가 날 것 같습니까?”
“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장서연이 뜸을 들이며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 내가 전력 분석 쪽은 아니라서.”
“그렇습니까?”
“근데 있잖아.”
장서연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교주 저놈, 보통 인간이 아니야.”
방찬혁의 안내에 따라 디엔드의 신도들은 이미 준비된 것처럼 척척 탑을 올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애초에 이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이상한 능력?”
“뭘 보는 것 같아.”
굉장히 두루뭉술한 얘기에 고천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장서연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도 잘 모르긴 해. 사실 이상한 능력 가진 것 같다고는 얘가 말했거든.”
그녀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김하령이었다.
김하령에게 고개를 돌린 고천수는 순간 몸을 흠칫했다.
자신에게 시선이 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김하령이 너무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 맞아요. 제가 봤어요.”
하필 뭔가를 목격한 게 김하령이라고 하니 신뢰도에 약간 문제가 생길 뻔하긴 했지만, 고천수는 일단 경청해 보기로 했다.
“저 사람, 자꾸만 허공에서 뭔가를 보는 듯한 행동을 해요.”
“……허공?”
“네.”
김하령은 갑자기 허공에 손가락을 들고 위로 긴 직사각형의 무언가를 그려 보였다.
“시선이 움직이는 범위는 이 정도. 사실 가면 구조 때문에 잘 보이는 건 아니에요. 근데 목 근육이 살짝살짝 움직였거든요.”
“그건…….”
“뭔가를 보지 않는 척 뭔가를 보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 말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 길이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한 가지 추측되는 게 있었던 것이다.
‘그럴 리가.’
하지만 뭔가 꺼내서 본 게 아니냐고 고천수가 다시 묻자 김하령은 아주 단호하게 답했다.
“분명히 허공에서 보는 거예요. 전 알 수 있어요.”
“……너무 신경 쓰지는 마.”
김하령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느낀 것인지 장서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얘 원래 가끔 뜬구름 잡는 소리 잘하더라고.”
“뜬구름 아닌데요.”
“지금도 뜬구름처럼 굴고 있잖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방찬혁이 여전히 가면을 쓴 채로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알게 된 건 이름뿐.
태도는 의연하고 가볍다는 걸 알겠지만, 얼굴을 볼 수 없으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니겠지.’
하지만 고천수는 떠오르는 한 가지 가능성에 머리를 쥐어 잡았다.
그건 정말로 끔찍한 가능성이었다.
‘설마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공략집은…….’
고천수는 시야 한편에서 계속 보이는 채팅창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