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살아남은 사람들 (1)
“형!”
양민철이 고천수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그러자 고천수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재회를 맞은 양민철을 반겼다.
덥썩.
고천수를 끌어 잡은 양민철은 뭉개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정말 힘들었어요, 진짜.”
“보고 싶었어요가 먼저 아니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리며 양민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겁나게 힘들었나 보네.
-하긴 천수랑 같이 다니는 거 아니면 솔직히 뒈졌어도 이상하지 않음.
-탑에 온 것부터가 기적 아님?
그 말대로였다.
웃기는 일이지만 디엔드와 함께 오지 않았다면 애초에 탑에 들어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천수.”
장서연도 고천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렇게 또 보게 되네. 너도 참 명 길다.”
“장서연 씨도요.”
웃으며 답하던 고천수는 근처에 있는 두 명의 사람을 더 바라보았다.
“천수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난 기성현인데, 터미널에서 만났던. 기억 나나?”
시선을 받은 두 사람도 차례대로 입을 열었다.
‘얘는 왜 좀 기분이 상한 것 같지?’
성격만 보면 김하령이 양민철보다 더 먼저 뛰어들어야 맞을 듯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차분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저, 천수 님.”
그사이 제나가 고천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런 대화에 껴서 죄송하지만 이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얼른 움직이시는 게 좋지 않을지.”
“아, 그렇지.”
교주와 디엔드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쾅! 콰앙!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디엔드가 다리를 건너온 것이 분명했다.
-와, 쟤네는 그냥 막 달려드네?
-교주가 시켰나 보지.
-빠르게 길 트려고 작정을 했고만.
디엔드는 길을 제대로 살펴보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일부 인원이 먼저 나서서 폭탄을 찾으며 무작정 길을 트고 있었다.
‘대단하네.’
고천수는 낭떠러지 쪽을 돌아보며 탄식을 흘렸다.
죽어도 자신이 탑의 끝까지 오르면 함께 구원받는다는 식으로 지꺼였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저돌적이었다.
‘날 그냥 보내지는 않겠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역시 서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민철아.”
“……?”
“재회 인사는 일단 확실히 살아남고 하자.”
그를 밀어내며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에게 외쳤다.
“바로 이 층을 통과하겠습니다! 대열을 갖춰서 이동하세요!”
그러자 마키나 단원들은 쭉 늘어서있던 그대로 한 줄 이동을 시작했다.
“이건……?”
양민철은 눈을 크게 떴다.
고천수가 자신과 일행을 맞으려고 단원들을 늘어뜨려 놓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8층은 낭떠러지로 좁은 길이 나 있는 구조였다. 한 줄로 늘어선 그들은 천천히 그 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이쪽도 서둘러야지.”
고천수는 양민철 일행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고천수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형, 근데 이 사람들은 다 뭐예요?”
그렇게 좁은 길을 걸으면서 양민철이 고천수에게 물었다.
“집중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도 있다, 민철아.”
“아, 죄송해요.”
“뭐, 대답해주는 게 어렵지는 않지만.”
고천수는 마키나 단원들을 만난 계기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다만 다른 단원들이 듣고 있는 만큼, 자신이 탑의 안내자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설명했다.
“형이, 탑의 안내자라고요?”
“그래, 내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위로 올라가는 역할을 맡았어.”
“그게 무슨 말이야?”
장서연도 끼어들며 물었다.
“네가 이 사람들의 대장이 됐다는 뜻이야?”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는 뜻의 대장이라면 그렇게 보면 되겠네요.”
모호하게 말하자 장서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ㅋㅋㅋㅋ 만나자마자 이런 얘기해서 좀 혼란스럽겠다.
-얘네 입장에서는 너도 교주랑 다를 바 없을걸?
-종파 싸움처럼 보이는 거 아니냐.
“천수 님, 저는 천수 님이 뭘 믿든지 간에 같이 믿을게요.”
실제로 상황을 오해한 듯 김하령이 말했다.
“그러니까 새 비서를 뽑으시는 건 어떨까요? 간호도 가능한 사람으로.”
“…….”
고천수는 앞에서 걷고 있는 제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제나 때문에 그러는 거였고만.’
그녀가 옆에 있는 걸 보고 자기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해 김하령이 열이 받은 듯했다.
‘애초부터 같은 역할도 아닌데.’
재회를 한 덕에 기분이 좋았건만, 약간 골치 아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인원이 많아질수록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아진다.
이들을 유용하게 굴릴 수 있으려면 좀 더 고생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큿.”
다들 시끄럽게 구는 사이 기성현은 걷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다리에 부목을 하고 있는 탓에 좁은 길에 돌부리라도 있으면 힘겹게 건너가고 있었다.
“쉽지 않고만…….”
아무리 처치가 잘 되었고, 생각보다 부상 상태도 크지 않았다고 해도 다리를 전력으로 뛰어서 넘어온 건 무리가 되었다.
도중에 한번 접질린 것이 또 타격이 되었기에 기성현은 연신 비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응?”
그러던 그는 넘어질 듯하면서 중심을 잡다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종유석 같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좁은 길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어어?”
날카로운 종유석들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사실을 알아챈 이는 없었다.
다들 폭음이 터지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낭떠러지에 시선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기랄!”
바닥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은 층이었다.
함정이었다.
“다들 위를 봐!”
그의 외침에 모두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
고천수는 종유석을 발견하고 탄식했다.
-노노.
-이걸 들키네.
-보면 안 되는데.
시청자의 반응이 이상한 것과는 별개로 주변이 술렁였다.
“천수 님! 위에 종유석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다들 빨리빨리!”
현재 이동에 사용하고 있는 좁은 길은 두 줄로 걸어도 좁은 곳이었다.
그렇기에 순서를 정해 한 줄로 이동을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난간 하나 없다 보니 조금만 멍청한 짓을 해도 떨어지기 십상이었다.
“야, 자, 잠깐.”
실제로 마음이 급해진 일부 단원들이 서로를 미친 것 때문에 몇 명이 길 끝으로 밀려났다.
“미, 밀지…….”
“이, 시발!”
“으아아아아!”
그리고 실제로 몇 명이 밖으로 떨어졌다.
“이런 제기랄!”
고천수는 단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멋대로 멈추거나 빠르게 이동하지 마세요! 제가 미리 일러준 속도로 움직여야 합니다!”
재회를 하자마자 이게 무슨 꼴이던가.
오히려 기성현이 이쪽의 기폭제가 되어버렸다.
-역시 부상자랑 동행하는 건 위험하네.
-아니, 뭐, 근데 기성현이 아니었어도 누가 보기는 했을 것 같아.
-그렇긴 하지.
맞는 말이었다. 기성현을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의도가 나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혼자 살겠다고 튀어 나가지 않은 걸 보면 성격도 나쁘지 않았다.
고천수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만 생길 뿐이었다.
‘뭐, 좋아.’
이미 몇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이 층의 규칙에 의하면 떨어져도 죽는 건 아니었다.
기성현이 가지게 될 죄책감도 나중에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당장 누군가를 너무 책망할 필요는 없었다.
“여러분! 이 층은 떨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아래층에 다시 머무르게 될 뿐입니다! 겁 먹지 말고 천천히 이동하세요! 아직 종유석은 안 떨어졌습니다!”
동굴과 같은 구조라면 소리만으로도 종유석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부득이하게 단원들을 안심시킬 요량으로 몇 번 소리친 고천수는 이후 입을 다물었다.
-그래그래, 얼른 이동하셈.
-8층 별 것도 없는데 몇 명 떨어졌네.
-ㅋㅋㅋㅋ 다이빙.
채팅창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길은 짧았다.
한 두 명씩 길 끝의 평지에 올라서기 시작하자 단원들도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
“놀라서 떨어지는 줄 알았네.”
“괜히 뒤에서 소리쳐 가지고는……!”
하지만 안심을 하자 단원들은 기성현에게 분노의 눈초리를 보냈다.
‘역시 이렇게 되나.’
고천수는 살짝 침음했다.
기성현은 고천수처럼 안내자 역할을 맡지 않은, 이제야 합류한 부상자에 불과했다.
지금 이 길을 건너오며 단원들은 그가 고천수가 짜놓은 계획에 혼선을 준 방해꾼이라고 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
양민철이 약간 불안한 듯이 말했다.
고천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청자들에게 물었다.
“형님들, 저거 진짜 함정입니까 아니면 떨어지는 겁니까?”
-함정이긴 한데, 누구한테 함정이 되느냐는 다르지.
-한 번 떨어지면 워낙 오래 떨어져서 미리 떨어뜨리라고는 할 수 없었는데.
-[한도초과] : 뭔지 알라나?
“아.”
천장의 종유석.
그리고 바닥의 특수한 낭떠러지.
고천수는 서둘러 단원들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여러분,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종유석을 가리켰다.
“오히려 이건 기회입니다.”
교주가 공략집을 가지고 있다면 8층에 저 종유석이 있는 것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8층의 함정에는 스스로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천수는 주저앉아 낭떠러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집중도에 따라 낭떠러지에 나오는 화면이 바뀌었다.
그는 교주가 아닌, 교주 근처의 신도들로 화면을 맞췄다.
“여러분, 모두 다 소리치세요.”
순간 단원들이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소리, 치세요!”
가장 먼저 알아들은 건 제나였다.
그녀는 먼저 아아아아아! 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떨떠름하게 서 있던 단원들도 하나둘씩 크게 소리를 내뱉었다.
쿠구구.
엄청난 함성이 쏟아지자 종유석이 더욱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쿠득.
하나둘씩 금이 가 바닥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콰아앙!
몇 개는 좁은 길에 맞았다.
길은 특수한 오브젝트 같은 것인지 부서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대부분의 종유석들은 낭떠러지로 추락했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디엔드의 신도들 위였다.
쾅! 콰과과과!
폭탄에 더해 종유석.
디엔드의 신도들은 그대로 갈려 나갔다.
‘교주, 너만 살면 되니까.’
전력을 최소한 이쪽이 우세하게 만들어놓는다.
디엔드 신도들이 폭탄과 종유석에 우왕좌왕하는 걸 보며 마키나 단원들은 넋을 잃었다.
“이, 이걸 이렇게…….”
“대단해.”
“등반은 우리가 먼저야!”
기분이 완전히 나빠져 있던 단원들은 교주의 세력이 박살이 나고 있는 것을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기성현이 저질렀던 일은 잠시 잊은 듯했다.
“천수 님, 교주는 공격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제나가 다가와 물었다.
고천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놈한테선 받을 게 있어. 끝장내고 싶더라도 조금 참아.”
어차피 세력이 줄면 아무리 공략집을 들고 있는 교주라고 해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실수한 거다, 교주 새꺄.’
공략집을 들고 있으면 누가 앞질러 가더라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이쪽엔 공략집은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천수 님, 교주는 세력이 많아서 무서운 자는 아닙니다. 부디 유념하시길.”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슨 말이야?”
“저도 자세히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냥 그런 느낌입니다.”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천수는 시선을 돌려 양민철 일행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기가 죽어있는 기성현, 그리고 고천수가 많은 이들을 다루는 걸 보며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나머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회 인사치고는 너무 격하긴 했다. 그치?”
고천수는 그런 그들을 향해 말했다.
“중요한 건 살아남아야 재회의 인사도 또 나눌 수 있다는 거지.”
종유석이 떨어지고 있는 살벌한 배경을 등에 둔 채로,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그쪽도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 좀 나눠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