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너도 한번 당해 봐 (2)
왈!
흑구가 짖는 소리에 양민철 일행은 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천수 형이……!”
“고천수가!”
“천수 님이 보낸 메시지예요!”
김하령은 앞으로 달려나가서 흑구 앞에 섰다.
그러고는 흑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걔 맞지?”
왈?
흑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하령은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천수 님이랑 같이 버스 탔던 걔잖아.”
대전의 그곳에서 김하령은 고천수가 버스를 타는 모습을 목격했었다.
늑대 같은 놈들에게 쫓기던 그가 버스에 데리고 탔던 게 바로 이 흑구였다.
“맞아, 그 개.”
기성현이 김하령의 곁에 다가가며 말했다.
“나도 봤었지. 분명히 고천수가 데리고 다녔던 개야.”
“이게 그 개?”
“정말입니까?”
장서연과 양민철도 다가와서 한 마디씩 던졌다.
특히나 양민철은 고천수가 남겨 두고 간 흑구를 보며 더욱 크게 탄식했다.
‘설마 개를 남겨 놨을 줄이야.’
다른 사람을 남겨 놓거나 확률은 좀 낮지만 본인이 직접 남았을 가능성도 따져 보았는데, 정말 고천수다운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근데 이건…….’
양민철은 흑구 위에 있는 곰 인형에 시선을 가져갔다.
움직이는 장난감 인형인가 했지만, 그는 곧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폴짝!
곰 인형이 흑구의 머리 위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앗.”
놀라는 양민철에게 다가서며 곰 인형은 다른 말이 적힌 종이를 들어올렸다.
[난 온리베어고, 해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온리…… 베어?”
끄덕끄덕.
온리베어라고 자신을 소개한 곰 인형은 이내 다른 종이를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고천수가 남겨 놓은 메모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건…….”
혼자만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양민철은 일행들에게 말했다.
“다들 이리 와서 이것 좀 같이 보세요.”
그의 손짓에 일행들은 조심스레 다가서서 온리베어가 들고 있던 내용을 읽어보았다.
“뭐?”
“아?”
“살인마가 살아 있다고?”
거기에는 이 7층에 살인마가 아직 살아남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
양민철은 일행들의 반응은 차치하고 일단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7층은 원래 살인마들이 있던 층이었다…….”
그런데 고천수가 다른 단원들과 함께 대부분을 해치웠고 지금은 하나만 남아 있다고 적혀 있었다.
놀라운 내용이기는 했지만 고천수가 여태까지 해 왔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그 다음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살인마를, 이용해라……?”
지시였다.
고천수는 남아 있는 살인마를 이용해 디엔드 신도들을 공격하고 길을 트라고 하고 있었다.
“정말 천수 형이 이렇게 하라고 했어?”
양민철의 물음에 온리베어는 고개를 한 번 더 끄덕였다.
“디엔드 신도들하고 한번 해 보라는 거야? 여전히 미친놈이네.”
“천수 님다운 계획이네요.”
“…….”
내용을 본 일행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뭐가 됐든지 간에 결론은 하나였다.
“후, 천수 형.”
양민철은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역시 이 정도는 해야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네요.”
***
한편, 고천수는 조금씩 8층의 내부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나중에 가는 거 아니었어?
-그러게.
-지금 이동하게?
이동하려고 한다기보다는 일이 잘 안 풀렸을 경우도 대비해야 했다.
“형님들,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7층의 입구와 마찬가지로 8층의 입구도 닫힐 일은 없었다. 그랬다면 디엔드 교주가 느긋하게 올라올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일부만 들어가서 미리 확인하고 있어도 나뉘어 별 탈은 없을 터였다.
“천수 님, 저기.”
조금 들어가다 보니 제나가 앞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건…….”
갑자기 시야가 트인 곳에 길이 하나 존재하고 있었다.
샛길 정도로 좁았는데, 그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있었다.
“형님들,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탑 안에 십 수 미터는 훌쩍 넘어 보이는 낭떠러지가 존재한다는 건 공간이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저 정도면 7층이 보여야 정상이었다.
“어, 보이네?”
그런데 진짜 7층이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고천수는 눈에 들어오는 7층의 전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ㅋㅋㅋㅋ 아나, 진짜.
-우리 욕하려고 그랬지?
-낭떠러지가 말이 되냐고 하려고 그랬지?
“아니, 뭐.”
고천수는 지지 않겠다는 듯 말했다.
“그럼 이게 평범한 낭떠러지입니까? 예? 말씀해 보세요.”
-가불기 쓰지 마셈.
-한 번을 안 지려고 하네.
-근데 사실 공간 왜곡이 맞긴 하지.
고천수는 길 옆에 있는 팻말에 시선을 가져갔다.
“떨어질 때마다 한 층씩 더 내려가게 되는 낭떠러지?”
뜻이 좀 헷갈렸지만, 곧 고천수는 이게 무슨 말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설마 한 번 떨어지면 7층, 그 다음은 6층인가?’
그렇다면 죽지 않고 다시 올라올 수 있게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고 해도, 여기서 미끄러져 떨어지면 그 자체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뭐, 그것만이 아니긴 하겠지.’
팻말에는 [절대 떨어지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함께 부착돼 있었다.
그 말인 즉, 난이도가 올라가든 뭐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어, 저기!
-보인다, 보인다!
-누가?
양민철이었다.
고천수는 뛰어가는 양민철을 보고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보인다고?’
낭떠러지로 보이는 7층은 터널처럼 그냥 고정된 방향으로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마치 움직이는 인공위성마냥 양민철을 쫓으며 보이는 지점을 바꾸고 있었다.
“천수 님, 저건?”
“아, 내가 얘기했던 그 친구야.”
양민철 일행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제나를 보며 고천수가 나지막이 설명했다.
“내가 여기 올라오게 하려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
-제나 표정 별로 안 좋은데.
-누구 올라오게 하려고 흑구 남긴다고 할 때부터 그러지 않았음?
-원년 멤버라 경계하는 듯.
그 정도는 이미 고천수도 감안하고 있었다. 멤버들이 섞이는 데 조금 고충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활동 영역을 다르게 둘 거라 그다지 문제될 거라고 보지는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양민철 일행이 고천수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살인마 어디로 나온다고 그랬지?
-G구역임. 곧 나올 듯.
-양민철 일행만 있는 거 보니까 어떻게 따로 잘 빠져나오긴 했나 보네.
그 말대로였다.
신도들과 함께 있었다면 따돌리는 과정이 필요했을 터.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총을 보며 고천수는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이내 납득했다.
“이쪽!”
“서둘러서 움직여!”“아이 씨, 나는 아직 다리 다 나은 건 아니라고.”
양민철 일행이 대화하는 소리까지 다 들렸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시야가 움직이는 건가?’
플레이어 전용인지 아니면 가장 가까이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반응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고천수도 할 일이 있었다.
휘이이잉.
고천수가 정신을 집중하자 갑자기 낭떠러지에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D구역.
거기에는 디엔드의 신도들로 보이는 다른 집단이 머물러 있었다. 보이는 숫자는 대략 50명 정도.
활주로에서 목격했던 인원이 200은 되어 보였으니 4분의 1쯤 남아있었다.
하지만 인원보다 중요한 건 교주의 옆에 남은 놈들이 핵심 전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앗.”
제나가 놀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천수 님!”
“어, 나도 봤어.”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
강해 보이는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인 그는 누가 봐도 디엔드의 교주였다.
“옆에 있는 놈들은 뭐지?”
“포니테일 머리를 한 여자는 교주의 현 비서고, 나머지는 간부들입니다. 흰색 옷을 입은 건 연구진이고요.”
“연구진?”
“교주가 주는 정보를 토대로 해서 탑을 연구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교주와 함께 탑의 공략법을 마련했다고 제나는 전했다.
“정확히 무슨 내용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천수 님.”
“아니야, 괜찮아.”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아쉬워하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저쪽도 공략법을 준비해 왔다면 이쪽도 준비를 해야겠다고 여기는 것뿐이었다.
“혹시 확대도 되나?”
고천수의 말에 낭떠러지의 화면이 좀 더 교주에게 근접했다.
“오.”
-오. ㅋㅋㅋㅋ
-교주님 털리겠네.
-흐음. ㅋㅋ
고천수는 교주의 말과 행동을 관찰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교주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권민주와 말을 나눌 때도 속닥거리고 있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제나야. 교주 원래 저렇게 말을 조심하나?”
“아뇨, 저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가면도 쓰고 다니지 않았고요. 오히려 엄청 외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대체 지금은 왜 저러고 다니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D구역을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갑자기 소란스러움이 들리기 시작했다.
-어? 왔다.
양민철 일행이었다.
하지만 그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제기랄!”
“좀 더 빨리 뛰어!”
“다들 조심해!”
양민철 일행은 제법 그럴 듯한 전술을 쓰고 있었다. 디엔드의 신도들은 그들이 내뱉는 조심하라는 말에 뒤쪽으로 시선만 내다보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전등을 든 포비아가 따라오고 있었다.
후욱.
포비아가 만든 빛 장판이 디엔드 신도들이 있는 곳에 깔렸다.
“크윽!”
“뭐, 뭐야.”
“이런, 시바…….”
신도들은 빛을 맞고 하나둘씩 늘어지기 시작했다.
시작된 참수.
포비아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신도들에게 다가가 눈을 뽑아 버렸다.
“교주님!”
사태를 목격한 권민주가 교주를 돌아보며 외쳤다.
“살인마가……!”
없어졌을 거라 생각한 살인마가 나타나서 당황한 것일까.
권민주는 검을 빼어들고는 교주의 앞을 지켰다.
스윽.
다만 교주는 머리를 한 번 긁적였을 따름이었다. 똑같이 당황한 듯 보이긴 했지만, 반응 자체의 규격이 달랐다.
“음?”
고천수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교주가 하늘을 올려다봤기 때문이었다.
“뭐야.”
마치 여기서 보고 있을 것을 예상한 듯한 모습이었다.
“뭘 봐, 새꺄.”
이건 예상했다고 하더라도 살인마를 남겨 놓을지는 몰랐을 것이었다.
왜냐면 고천수도 휴가 살인마를 남기고 올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다들 공격!”
교주에게서 뭔가 수신호를 전달받은 권민주가 신도들에게 외쳤다.
“공격해라!”
디엔드는 교주를 데리고 D구역에서의 피난을 가는 대신 공격을 택했다.
‘역시네.’
고천수는 교주가 7층 살인마에 대한 해결 방법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했다.
일단 D구역에서 버티기에 들어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짠 것인데, 예상대로 돌아갔다.
‘포비아를 바로 끝내진 못할 거야.’
포비아는 총을 맞고 멈춰 있어도 빛 장판은 계속 확산됐다.
거기에 닿은 디엔드 신도들은 공격을 멈출 만큼 늘어지고 있었다.
“천수 님, 동료 분들이 다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양민철 일행은 많은 디엔드 신도들의 발이 묶인 틈을 타 다리로 향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그리고 그에 맞춰서 다리도 내려오고 있었다.
“어?”
소란 때문에 다리가 내려가는 것도 뒤늦게 안 신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열쇠도 찾지 못한 시점에 어떻게 다리가 내려간단 말인가.
“잘하고 있네, 흑구랑 온리베어.”
고천수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빠져나오는 것도 잘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다리가 내려오고 있는 이상 디엔드에게 열쇠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교주님!”
권민주의 외침에 교주 무리도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될 것 같지?’
고천수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내가 이것만 준비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섭하지.’
쾅!
디엔드 간부 하나가 양민철의 뒤를 쫓다가 폭사했다.
“응?”
말 그대로였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달려가던 디엔드 간부와 신도들이 여기저기 폭발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쾅! 콰앙!
“끄악!”
“뭣…….”
“으아악!”
지영배는 설정상이든 뭐든 트래퍼의 친구였다.
트래퍼의 집에 있는 폭탄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요즘 아이템이 안 나와서 내가 직접 구해 봤는데.”
콰아앙!
“맛 좋지?”
이곳에서 적의 핵심 전력에 타격을 주고 자신은 잃었던 핵심 동료를 취한다.
교주를 비롯한 디엔드 신도들이 주춤하며 멈춰 서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네가 누구한테 싸움을 걸었는지 알려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