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희생자는 길을 알고 있다 (7)
묶음이라는 건 이유가 있는 법.
“흐아아아아!”
고천수는 달려가 잠시 멈춰 있는 사육사의 몸을 붙잡았다.
“앗!”
“천수 님!”
“대체 뭘……!”
단원들이 놀라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고천수는 사육사의 팔을 움직였다.
‘굳어 있어서 총을 뺏을 순 없지만……!’
이미 붙잡고 있는 총을 돌릴 수는 있었다.
위잉! 위이잉!
체인킬러가 그런 고천수를 보며 톱을 든 채로 달려들었다.
“어디 한번 보자!”
서로를 신경 쓰지 않는 살인마라면 고천수가 사육사와 가까이 있는 와중에도 무자비하게 톱을 휘둘러 댈 터.
덜컥.
하지만 체인킬러는 그러지 않았다.
“걸렸다!”
고천수는 사육사의 총구를 체인킬러에게 향했다.
슉!
나간 것은 총알 대신 진정제가 담긴 주사기.
그래도 체인킬러의 몸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끄으으으으!”
체인킬러는 찢어질 듯한 신음을 흘리며 비틀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육사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자신의 팔이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안 사육사가 몸을 뒤틀었다.
“응, 안 되지.”
대기하고 있던 고천수는 잽싸게 그가 손을 움직이자마자 오히려 포획 총을 빼앗아 들었다.
포획 총은 볼트액션으로 한 발의 총알만 장전하는 구조였다.
이미 한 발의 진정제는 사용했기에 고천수가 발사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퍼억!
하지만 총 그 자체가 무기 아니던가.
고천수는 포획 총을 휘둘러 사육사의 턱을 적중했다.
“끄악!”
사육사가 얼굴에 손을 대며 뒤로 비틀댔다.
고천수는 그의 허리에 있던 주사기 주머니를 탈취해 한 발을 재빠르게 장전했다.
휘익!
뒤통수에 갑자기 큰 칼이 날아들었다.
도살자가 던진 것이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이미 그 궤적을 염두에 두고 사육사와 같은 방향으로 서 있었다.
고천수가 고개를 돌리자 목표를 잃은 칼은 사육사의 오른쪽 가슴으로 날아갔다.
파악!
꽂혔다.
사육사의 가슴에서 순간 피가 튀었다.
-먹혔다!
-그렇지. 이거지.
살인마들끼리는 공격이 통한다.
그걸 확인받은 고천수에게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슉!
그가 쏜 진정제가 이번엔 도살자에게 향했다.
그러자 도살자도 이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칼, 계속 나온다고 했지?”
고천수는 도살자에게 달려가 칼을 하나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단원들이 있는 쪽으로 내던졌다.
“처, 천수 님?”
근처에 있던 제나가 놀라며 움찔거렸다.
고천수가 던진 칼이 그녀의 근처 땅에 박혔다.
-뭐하는 겈ㅋㅋㅋ
-네 팀을 썰어 버리려고 하는 거냐?
-미친. ㅋㅋㅋㅋㅋ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제나! 그 칼을 사용해라!”
일반적인 칼은 사육사의 개들에게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살자의 칼도 과연 그럴 것인가.
“아.”
제나는 알아들은 듯 땅에 박힌 칼을 뽑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제나가 칼을 들고 사육사의 개들에게 간 사이, 고천수는 도살자에게서 새로운 칼을 빼앗아 내리그었다.
촤악!
칼에 얼굴을 맞은 도살자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렸다.
위잉! 위이이잉!
체인킬러가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고천수에게 톱을 휘둘렀다.
“안 되지, 인마.”
팍!
고천수는 체인킬러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타격은 받지 않겠지만 상관없었다.
밀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위잉! 위…… 촤아아아아!
체인킬러의 톱이 눈먼 총알처럼 궤적을 그리고 도살자의 몸 위에 안착했다.
“끼아아아아아아!”
도살자의 몸에 돌아가는 체인이 박혔다.
살이 절반쯤 날아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욱.”
고천수는 인상을 구기며 칼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뒈져!”
촤악!
칼이 체인킬러의 목 뒤에 박혔다.
“끄아아아아아!”
위이이잉!
타격을 받은 체인킬러가 톱을 빼서 뒤로 돌린 탓에 고천수도 반 토막이 날 뻔했다.
위잉! 위이이잉!
고천수가 계속 뒷걸음질을 치는 사이 체인킬러는 계속 톱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톱을 켜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그에게 타격을 주지 못하는 탓에, 고천수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계속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위잉…….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까드드득!
톱이 아래로 쏠리며 지면을 긁었다.
진정제의 효과가 돌고 있었다.
게다가 목 뒤에 꽂힌 칼 때문에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지 체인킬러는 걸을수록 바닥을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콰당!
결국 체인킬러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져 버렸다.
틱.
그사이 다시 접근한 고천수는 톱을 끄고 그의 목에서 칼을 빼어 들었다.
“이젠 네놈들이 좀 죽어 봐.”
팍! 파직! 콰악!
고천수는 칼을 마구 휘둘러 체인킬러를 찍어댔다.
체인킬러는 미세한 반응을 계속 보이더니, 어느 순간 그대로 멈춰 버렸다.
“끄으, 끄으으으.”
도살자와 사육사도 아직 살아 있었다.
고천수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와, 천수 미쳤는뎅.
-쌉 돌았따.
-으. 천수야 적당히 부탁한다.
나머지 살인마를 정리하는 사이, 제나도 제 역할을 했다.
깽! 깨갱!
그녀가 들고 있는 칼에 맞은 사육사의 개들이 부상을 입고 달아났다.
크아아아!
그 뒤를 쫓은 흑구가 그들을 하나씩 붙잡고 늘어져 그녀가 칼로 찍어낼 수 있게 도왔다.
“고맙다.”
덕분에 개들을 전부 끝장낼 수 있었던 그녀가 감사를 표하고 고천수에게 다가갔다.
고천수는 칼을 마구 휘두르다가 그녀의 기척을 감지하고 멈춰 섰다.
“다 끝났나?”
“예, 천수 님.”
후, 하고 한숨을 몰아쉰 고천수도 허리를 펴며 말했다.
“내 쪽도 다 끝났다.”
저돌적으로 나선 고천수의 활약으로 살인마들이 제대로 단원들과 구도를 갖추기도 전에 모든 일이 끝나 버렸다.
단원들은 놀란 눈으로 고천수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환호성을 질렀다.
“여, 역시 천수 님이야!”
“우리를 구해 주셨다!”
“천수 님, 만세!”
또 다시 만세 세례가 시작됐지만, 단원들과 달리 그저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이도 있었다.
‘대단하긴 하네.’
지영배였다.
그는 고천수의 활약에 내심 탄식하고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놈은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봐도 남들과는 다른 기질을 갖고 있었다.
“야.”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시선을 눈치챈 고천수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하던 얘기 마저 하자.”
***
고천수와 지영배.
피해 상황을 수습한 뒤, 둘은 자기들끼리만 다시 사무실에 들어가 마주 앉아서 얘기를 재개했다.
“……그러니까 너도 한때는 나랑 같은 역할이었다고?”
고천수는 지영배에게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그는 탑을 올랐던 세 번째 플레이어로, 꼭대기까지 올라 소원을 빌었더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기억나는 건 이 7층뿐이며, 나머지는 ‘그랬다’는 사실만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그리고 난 실패해서 이 층에 갇혔어. 누군가 성공할 때까지 안내 역을 하고 있는 거지.”
“…….”
“터무니없지? 나도 마찬가지야.”
지영배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앞뒤로 얼마나 더 플레이어가 있었는지조차 몰라. 있었더라도 지금은 뭐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럼 왜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지?”
“그야 리스크를 짊어져야 하니까.”
그 말에 고천수가 고개를 갸웃하자, 지영배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말하면 난 다시 여기 갇히지도 못하게 돼. 네가 실패하면 나도 사라지는 거야.”
“뭐?”
“자세하게는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된다는 것만 알고 있어.”
당연하지만 이번에도 지영배는 조용히 있으려고 했다.
고천수에게 플레이어란 표시가 떠 있는 걸 봤지만, 그가 성공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던 것이다.
“……그럼 혹시 네가 여기서 죽어도 영원히 사라지는 거냐?”
“아니.”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그럼 다른 입을 열 이유가 있어서 말한 것이라고 봐서 물은 것이겠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그냥 네가 몰아쳐서 밝힌 것뿐이야.”
“뭐?”
고천수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이유가 없지는 않지.”
지영배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었다.
누군가 실패하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영원히 떠돌고 있어야만 했다.
“지쳤어, 이제.”
기억나는 거라고 해 봤자 극히 일부의 자기 신상, 그리고 실패의 경험과 이곳에 대한 것뿐이었다.
플레이어인 고천수와 격렬한 접촉이 생기자 감정이 폭발했던 것뿐이었다.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건 다 알려 줄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물어봐.”
“…….”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네.’
과거의 플레이어.
그 말이 사실인지는 굳이 혼자 따져볼 것도 없었다.
“형님들, 왜 이런 엿 같은 상황이 존재하는 겁니까?”
그냥 시청자들에게 물으면 그만이었다.
-온리원이 그런 거니까, 뭐.
-몇 번 기회를 주는 와중에 이스터에그처럼 들어간 거지.
-이렇게 정색할 건 없지 않나?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분명히 그럴 것이었다.
‘하여간 지들만 안전하면 그만이지.’
시청자들이 플레이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소모품.
그러니 열성팬도 잘 생기지 않는 것이리라.
“한도초과 님, 보고 싶네요.”
-[한도초과] : 앗, 진짜?
괜히 한도초과가 인간적으로 느껴져서 한 번 언급해 주고, 고천수는 다시 지영배에게 말했다.
“뭐라도 물어보라고 했지?”
“그래.”
“뭘 얼마나 알려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일단 하나 물어볼게.”
여기는 7층이었다.
아래층에서는 서로 길이 갈려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7층에서부터는 디엔드와 마주칠 수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쯤이면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디엔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는 그 점이 못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 말고도 이 층에 올라오고 있는 사람이 있어. 아니, 애초에 나보다 먼저 탑에 들어왔는데도 여기서 보이지 않고 있거든.”
“너보다 먼저? 그냥 올라오는 게 좀 늦는 거 아냐?”
“그건 아닐 것 같아서. 실력자일 게 분명하거든.”
교주는 이 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처음 탑에 입장하기 전부터 디엔드 신도들을 지휘한 모습을 보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혹시 아직 내가 그 사람하고 만나지 못할 만한 이유, 알고 있냐?”
“흐음.”
예상과는 조금 다른 질문인지 지영배는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글쎄, 굳이 생각하자면 한 가지 있긴 한데 말이야.”
“뭔데.”
“일부러 올라오지 않고 있는 거.”
“일부러?”
지영배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자라며. 만약 이 7층에 뭐가 있는지를 예측하고 있는 거라면 오히려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아.”
“다른 사람이 적당히 7층을 정리했을 때 올라오려고 말이야.”
지영배는 밖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네가 겪어 봐서 알겠지만 7층은 피지컬 싸움이면서 동시에 머리까지 빠르게 굴려야 돼. 그러면서도 많은 인원의 이점도 누리질 못하고.”
“그렇지.”
“그 상황에 만약 누군가 자기가 해야 될 일을 대신해 줄 수 있다고 하면, 너라도 맡기지 않겠어?”
맞는 말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한다면…….
“그 녀석은 누가 탑에 또 들어온 걸 안다는 얘기네?”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봐야겠지.”
지영배의 대답에 고천수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 새끼가 날 이용하려고 했단 말이야?’
정확히 누가 따라 들어왔는지는 교주가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교주는 누가 따라 들어올 거라고 예측은 할 수 있었다는 소리였다.
‘전직 플레이어까지 있는 마당에 뭐 더 놀랄 일은 아니겠지.’
탑에 함께 들어올 빌런인 만큼 교주에게 주어진 것도 만만치는 않은 종류의 것일 터였다.
“어쨌든 서둘러야겠네. 뒤에서 각을 보고 있다면 곧 올라오겠지.”
“지영배, 넌?”
“난 말했잖아.”
지영배는 허탈한 표정을 그렸다.
“난 여기에 갇혀 있다고. 길 안내를 하는 게 내 역할이야.”
“혹시 뒤에 오는 디엔드 애들 헷갈리게 만들어 줄 수는 없나?”
“고의 트롤링은 안 돼. 설정인지, 못 하겠더라. 뭐, 그래도 가만히 있어 줄 수는 있지.”
“그거면 돼.”
고천수는 지영배의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고맙다. 만남이 썩 좋은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래.”
지영배도 고천수의 건투를 빌어 줬다.
“잘해 봐.”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천수 님! 최형식 병장이 보입니다』
고천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