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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76화 (176/224)

176. 희생자는 길을 알고 있다 (5)

“헉, 헉, 시바.”

그 시각, 최형식 일행은 전등을 든 여자에게 쫓기고 있었다.

“저게 뭐야, 대체.”

여자는 주변에 일정 범위의 노란색 빛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었다.

장판처럼 깔린 그 위에 올라서면 갑자기 절망감에 휩싸이고 움직이기가 어려워졌다.

최형식은 처음에는 여자를 쏴 버렸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여자가 총에 맞으면 주변이 거의 다 샛노래졌다.

오히려 빛을 피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었다.

“제기랄.”

결국 최형식은 도망치기를 선택했다.

빛을 맞을 때마다 절망감에 휩싸여 갑자기 멈추는 일행이 생기면 서로 서로 도우면서, 여자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무작정 달려갔다.

“골치 아프군요.”

휴는 그런 최형식 일행을 따라가며 한숨을 흘렸다.

그의 입장에서도 여자를 해치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딱히 약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최형식 씨, 인원을 나눕시다.”

“예?”

“제가 유인할 테니 도와주기만 하세요.”

다만 휴는 그녀에게서 확인한 부분이 있었다.

공략을 시도할 만한 부분을.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최형식에게 다가선 휴는 자신이 계획한 바를 그대로 전해 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최형식은 이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방법이 제일 낫겠군요.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최형식은 그렇게 다른 단원들과 함께 앞으로 달려 나갔다.

휴만 혼자 뒤처져 여자를 바라보았다.

“뭔 원한이 있어서 이러고 다니실까?”

한 마디 던져 보았지만 그녀는 답을 해 주지 않았다.

“안 알려 주려고?”

여자는 그저 전등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휴의 발밑에 노란 빛이 생겨났다.

펄쩍.

살짝 닿았지만 곧장 뛰어서 피했다.

휴는 찰나의 순간 느껴졌던 감정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 이거 요상하네.’

빛을 밟으면 갑자기 감정이 땅으로 꺼지는 것처럼 멘탈이 주저앉았다.

물론 다른 사람과는 자라 온 환경이 다른 탓인지 빛을 밟더라도 휴는 걸음까지 못 옮길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아까 전에 본 시체였다.

‘지영배라고 했나?’

이름은 사실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휴는 그가 죽어 있는 형태에 집중했다.

눈이 파여 죽은 시체.

주변에 돌아다니고 있는 살인마는 딱 봐도 저 여자 하나뿐.

그렇다면 여자가 그를 붙잡아 눈을 파 버리고 죽였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붙잡으면 그대로 눈을 팔 건가?”

휴는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지만 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잡히면 죽는다.

그것도 두 눈이 뽑혀서.

“……올라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이게 또 무엇일까.

여자는 갑자기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했다.

“너희의 고통은 여기서 끝나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소리?”

휴는 딱히 지금까지 고통을 받은 적이 없었다. 세상에 종말이 찾아오기는 했지만 원래부터 휴는 그다지 좋은 환경에서 자라지도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고통이라는 표현에 공감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엔 네가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맞아.”

여자는 웃기게도 휴의 말을 순순히 인정해 버렸다.

“하지만 너에게도 고통이 없지는 않을 거야.”

“……나도 모르는 내 고통인가?”

“난 본 것을 말할 수 없어.”

여자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긴 저 지경이면 뭔가 끔찍한 것을 보고 눈을 파 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휴는 한숨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된 게 남을 죽이는 것들은 죄다 알지도 못할 소리만 해 대는 거지? 응?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넌 진실을 마주하게 될 거야.”

여자는 상관 않고 계속해서 지껄였다.

휴는 더 이상 여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큭?!”

여자가 계속 앞에 만들어대는 빛 장판을 피해 펄쩍펄쩍 뛰며 뛰어넘다가, 결국에는 붙잡혀 주저앉게 된 것이었다.

“개떡, 같네……?”

걸음을 옮겨 봤지만 예상외로 절망감이 강했다.

움직여 봤자 아무것도 하지 못할 듯한 느낌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말했잖아.”

여자는 직선으로 뒤에서 다가오며 말했다.

“너에게도 절망이 있다고.”

“이건, 네 거 아냐?”

휴의 머릿속으로 엄청난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가지 단어로 감정을 설명할 수 있었다.

실패감, 그리고 무력감.

“이 탑은 올라가도 끝이 없어.”

여자는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였다.

“그런데도 올라갈 셈이야?”

“…….”

이 탑의 끝에는 모두가 바라는 구원이 있었다.

적어도 마키나 단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거짓말쟁이네, 이 여자.’

구원 같은 건 바라지 않는 휴라도 그 끝에 무언가 있기 때문에 고천수가 위로 올라간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여자의 기망 전술은 들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만.”

휴는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너한테 어울리는 곳으로 가라.”

“뭐…….”

훅.

갑자기 여자의 모습이 사라졌다.

열린 맨홀 아래로.

“지금이다!”

“서둘러!”

“뚜껑을 닫아 버려!”

주위에 숨어 있던 마키나 단원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휴의 제안에 따라 미리 맨홀 하나를 열어 두고 있었다.

터엉!

그들은 야삽을 지렛대로 사용해 근처에 놓여 있던 맨홀 뚜껑을 들어서 굴려 여자가 빠진 입구에 도로 얹어 버렸다.

“끄응.”

하지만 여자가 죽은 건 아니기에 빛 장판은 여전했다.

휴는 천천히 기어서 빛 장판을 빠져나왔다.

“하아…….”

웬만하면 지치지 않는 성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극심한 피로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야. 그 여자?”

살인마, 아니, 살인귀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공포감을 주었던 그녀가 남긴 감정은 참으로 오묘했다.

“고천수한테 물어봐야지.”

헛소리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여자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했다.

그렇기에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할 찰나,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

터졌다.

트래퍼가.

“크으으으윽!”

고천수는 주위에 있는 나무를 부여잡고 폭발에 따른 후폭풍에 버텼다.

“아, 시발!”

최대한 멀어진다고 멀어졌다.

지영배가 알려 준 길로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렸던 것이다. 그런데도 확실히 폭발의 여파는 그리 작지 않았다.

-와우, 그대로 날려가는 거 아님?

-ㅋㅋㅋㅋㅋ 그래도 어케 안 죽고 산 거 같다.

-아직 안 끝남.

“끄아아악!”

고천수는 나무를 놓치고 먼 곳까지 날아갔다.

그러다가 후폭풍이 사라졌을 때에야 바닥에 몸을 처박고 몇 바퀴 구른 뒤에야 멈춰 설 수 있었다.

“아, 오…….”

트래퍼 해결.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왈왈!

흑구가 달려와 고천수의 뺨을 핥았다.

온리베어도 흑구의 등에서 내려와 고천수의 뺨을 후려쳤다.

“아, 인마! 기절 안 했거든?”

솜방망이 펀치를 맞고 일어난 고천수는 얼른 옆으로 시선을 돌려보았다.

제나와 지영배, 둘 다 무사했다.

“후. 누구 죽은 사람은 없네.”

트래퍼는 상대하기 힘든 적이었다.

그냥 놔뒀으면 꽤 골치 아팠을 텐데, 예상보다 괜찮은 마무리였다.

“덕분에 살았네요, 지영배 씨.”

고천수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며 말했다.

“하마터면 곤죽이 될 뻔했어요.”

“아닙니다. 덕분에 저도 그 녀석한테서 벗어날 수 있게 됐는데요, 뭐.”

엄밀히 말하면 그건 고천수의 덕은 아니었다.

‘그 자식이 워낙 병신이어가지고.’

트래퍼가 자폭한 것이기에 딱히 공을 차지하고 싶은 건 없었다.

고천수는 지영배에게 물었다.

“지영배 씨, 조금 같이 여운이나 느끼면 좋을 텐데 저희가 많이 바쁩니다.”

“아, 예.”

“같이 가시겠습니까?”

어차피 지영배는 여기에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일반인은 아니었다.

탑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NPC라고 볼 수 있을 테지만, 살인마와는 다른 조형이기 때문인지 고천수는 지영배도 일행으로 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주신다면 고맙기는 하죠. 안 그래도 여기서 저도 뜨고 싶긴 했으니까요.”

지영배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여긴 더 이상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에요. 저도 그 녀석만 아니었으면 더 빨리 도망치려고 해 봤을 텐데 방심하다가 거기에 갇히는 바람에.”

“뭐, 그럴 수도 있죠.”

잡혀서 그 꼴이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같이 마을에 살았던 트래퍼에게 일말의 정이라도 있었을 터.

다른 살인마들까지 판치는 상황에 의지할 사람조차 없으면 웃기게도 그런 괴물을 방패삼아 숨어 있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다.

“갑시다, 그럼. 다른 살인마들이 오기 전에 서두르죠.”

고천수는 무전으로 단원들에게 상황을 전한 뒤, 현 대형을 유지해서 이동을 계속했다.

그가 들를 곳은 C의 관리소, 그다음이 D였다.

이동하는 동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른 살인마들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폭발이 만든 연기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사방을 맴돌고 있어서 숨쉬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야겠네.’

C에서 열쇠를 확보하고 곧장 D 구역으로 향했다.

최형식 일행이 오지 않는다면 찾으러 가야 하긴 했지만, 그것도 일단 D 구역으로 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D 구역.

그곳에 도착하자니 마을에서 어딘가를 잊는 거대한 도개교가 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다 왔다!”

고천수는 무전으로 마키나 단원들을 한 자리에 소집한 뒤 도개교 근처에 있는 사무실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쪽도 깨끗합니다!”“클리어!”

일견 듣기 좋은 상황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무전으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여기에도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천수 님, 다른 살인마가 사람들을 끌고 간 걸까요?”

“모르겠네. 어쨌거나 다른 놈이 오기 전에는 해결을 보는 게 좋을 텐데.”

고천수는 주위를 살펴 기계실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도개교를 내릴 수 있는 기계 장치가 되어 있었다.

-피……!

-여기서 누구 뒈졌나 봄.

-오우 쉣.

고천수는 기계실 안으로 들어가 도개교 조작 장치를 찾았다.

다행히도 친절하게 레버마다 설명표가 붙어 있어 그도 조작할 수 있었다.

덜컥.

하지만 레버는 작동하지 않았다. 애초에 불도 들어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동력이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열쇠 구멍 4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열쇠를 꽂는 곳이 보였다.

일단 열쇠를 가져오면 어디다 사용할 수 있는지는 확인했다.

고천수는 기계실에서 나가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별거 없는 장소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전기가 존재했다.

-[한도초과] : 이거 쓰자.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거잖아.

처음에 이 층에 들어왔을 때도 무전을 받은 게 있었다.

D 구역의 상황을 알 수 있었던 무전이었던 만큼, 커버할 수 있는 전파의 범위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고천수는 혹시나 싶어 무전을 한번 해 보았다.

“아아. 여기는 마키나. 생존자 있는지?”

일부러 어디 구역에 있는지는 얘기하지 않고 동료가 알 수 있는 물음으로 무전했다.

“여기는 마키나. 생존자 응답 바람.”

잠시 동안 답이 없었다.

역시 듣는 사람이 없구나 하고 판단하는데, 갑자기 무전이 들려왔다.

『아, 여기는 휴. 반갑네?』

휴였다.

고천수는 곧장 반가움을 표했다.

“휴! 살아 있었냐?”

『당연하지. 살인마도 둘이나 잡았는걸. 역병의사 놈이랑 무슨 절망감 주는 여자랑.』

“뭐? 둘이나?”

고천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병의사는 못 들어본 놈이야. 그럼 총 일곱이었나?’

그렇다면 남은 살인마는 총 셋이었다.

적지는 않았다.

“휴. 빨리 와. 최대한 빨리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안 그래도 열쇠 습득하고 가는 중이야.』

“그래, 서둘러.”

『너도 조심하고 있으라고.』

필요한 응답은 다 들었다.

고천수는 무전을 켜 둔 채로 뒤에 있는 지영배에게 말했다.

“지영배 씨! 살인마가 셋 남은 거 같은데, 그놈들에 대해서 좀 얘기 나누시죠!”

『지영배?』

휴의 목소리가 갑자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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