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희생자는 길을 알고 있다 (4)
“이쪽입니다.”
그 시각, 지영배는 고천수 일행을 데리고 이동 중이었다.
“이쪽으로 가면 그 녀석이 깔아 놓은 지뢰를 피할 수 있어요.”
그는 트래퍼가 어디에 어떻게 트랩을 깔아 놓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하면 건물 안에 들어가지 마시고요.”
“건물 안에?”
“네, 그 녀석은 사람이 들어올 만한 건물에 잘 설치하고 다녀요.”
고천수의 물음에 답하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정말 그 녀석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날도 이래서 쉽지 않을 텐데요.”
주변이 어둑한 건 물론이고 안개가 깔리고 있었다. 살인마의 특수 능력은 아니고 그냥 시간에 따른 환경 변화인 듯했지만, 이 정도면 극심한 시야 방해를 일으킬 정도였다.
“이미 끝난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고천수는 담담히 말했다.
피해 갈 수 있다면 피해 가겠지만 트레퍼는 살아 있는 시간이 길수록 방해만 될 놈이었다. 언제 어느 때 나타날지 모르니 날이 갤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릴 수도 없었다.
‘잡기 힘들긴 하겠지.’
트래퍼를 잡는다는 건 그만한 위험을 짊어진다는 것이었다.
지영배에게는 조금 버거운 일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말씀드렸듯이 그 녀석의 광적인 행동을 끝내려면 지영배 씨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이해하시겠죠?”
“아, 네네. 그럼요.”
그러면서도 지영배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잘 알지만 역시 힘들 테니까요. 그 녀석, 상대하기 까다로운 놈이니까.”
“……예.”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고천수 일행은 지영배와 함께 걸으며 트래퍼의 덫을 요리조리 피해 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트래퍼의 습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일단 지뢰는 건물 쪽에 있었다. 외벽 쪽에 바싹 붙어 있거나 내부에 설치해 두었거나 하는 식이었다.
간혹 가다가 인도 쪽에서 발견되는 함정은 덫이었다. 동물들의 발목을 잡을 때 쓰는 바로 그것.
“흑구야, 조심해라.”
킁킁거리며 앞을 걷는 흑구를 보며 고천수는 경고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주둥이 낄 수도 있다.”
-주둥이. ㅋㅋㅋ
-근데 여기에 있는 덫들은 다 해제 가능한 것들인가?
-뭐 던져 두면 닫힐 테니까 그게 해제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 말대로인지 지영배는 근처에 돌덩이가 있으면 그걸로 덫을 닫아 버리기도 했다.
“천수 님, 근데 이렇게 해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함정은 피해 가고 있다.
하지만 그게 곧 트래퍼와 조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제나의 우려에 지영배가 말했다.
“그 녀석은 그리 멀리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트래퍼는 사람들이 자신의 트랩에 걸려 죽거나 다치는 모습을 즐긴다.
그렇기에 아직 함정이 남아 있는 곳에는 트래퍼가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안 나타날지 보다는 나타났을 때 어떻게 할 건지를 걱정하는 게 낫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지영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타나서 자기 함정에 밀어 넣으려고 하니까요. 총은 없어도 폭탄은 가지고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특히 몸에 두르고 있는 걸 조심해야 돼요.”
“자폭용 폭탄이라도 두르고 있나 보군요.”
“예.”
지영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주 미친놈이에요.”
그 대화를 끝으로 일행은 잠시 이동에만 집중했다.
지영배는 고천수에게서 그들의 목적지가 D 구역이라는 것을 들었다.
D 구역은 이 마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는 곳으로, 여기서 살인마들이 날뛰고 난 뒤 많은 사람이 그쪽으로 향했지만 빠져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고천수 씨.”
그렇게 이동하는 도중 지영배는 갑자기 멈춰 섰다.
왈!
이유가 있었다.
앞서가던 흑구가 짖는 모습을 보고 일행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광대처럼 꾸미고 서 있는 웬 남자가 한 명 있었다.
-트래퍼!
-진짜 근처에 있었네.
단원들에게서 무전도 오지 않았다.
은밀하게 숨어서 이쪽과 함께 움직인 듯했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그러지?”
트래퍼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건 고천수가 아니라 지영배를 향하고 있었다.
“너한테서 벗어나려고.”
“나한테서?”
트래퍼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 친구 아니었나?”
“……뭐?”
“같이 하자면서?”
트래퍼는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여기서 못 나가게 하겠다고 그랬잖아? 근데 지금 이게 뭐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다이너마이트 하나를 쥐어 들고 흔들면서 트래퍼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같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억지로 나한테 끔찍한 일을 시키려던 거잖아.”
지영배는 트래퍼를 앞에 두고서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잠시 같이 있던 적이 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다행이네.’
분명 아까 전의 지영배는 트래퍼를 상대할 것이냐고 우려를 표했다.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미친놈이라고 본인 입으로 말했는데, 생각보다 더 잘 응대하고 있지 않은가.
-자기들끼리 싸움 붙을 것도 같은데 그냥 버려 두고 가는 거 어떰?
-그러게, 그것도 가능할 듯.
-아니, 천수가 얘 무조건 잡고 간다고 그랬잖아. 안 들었음?
솔직히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둘끼리 싸움이라.’
그렇다면 시청자들의 의견대로 둘이 해결을 보게 놔두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아냐.’
역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도망쳐 C 구역에서 열쇠를 얻고 D 구역으로 간다고 쳐도, 결국에는 최형식 일행의 합류가 필요했다.
만약에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엔 고천수가 다시 남은 단원들을 끌고 돌아가 다른 열쇠까지 찾아야 했다.
‘머리 꼬이네.’
어떤 방식이 D 구역에서 다리를 내리는 데 가장 효율적일지는 알 수 없었다.
고천수는 살짝 한숨을 내뱉고는 일단 뒤로 물러났다.
“여기로.”
작게 입을 뻥긋하며 낸 소리에 흑구와 제나가 눈치 빠르게 뒤로 옮겨왔다.
-뭐임?
-진짜 내빼려는 거?
-ㅋㅋㅋㅋ 야, 안 돼.
내뺀다니, 고천수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 상황을 이용해서 트래퍼를 없애 버릴 셈이었다.
“넌 여기서 아무데도 못 가.”
트래퍼는 고천수가 아니라 지영배에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말인 즉, 지영배를 미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천수 님, 저자는 어떻게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제나도 고천수에게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물었다.
“글쎄, 일단은 해치우는 게 문제가 아닐 거 같은데?”
트래퍼는 몸에 폭탄 조끼를 두르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뭔가 위험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철컥.
만약을 대비해 고천수는 총을 들어올렸다.
지영배를 미끼로 시간을 벌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어보였다.
트래퍼가 주머니 쪽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걸 보고 고천수는 바로 트래퍼의 머리에 총을 조준했다.
타앙!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트래퍼의 머리에 총알이 박혔다.
별다른 보호구 없이 그대로 총알을 얻어맞은 트래퍼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고천수 씨?!”
“방금 뭐 꺼내려고 한 거 못 봤습니까, 지영배 씨?”
총성에 깜짝 놀라는 지영배를 놔두고 고천수는 트래퍼에게 걸어갔다.
탕! 타앙!
머리에는 계속해서 총알을 박았다.
트래퍼는 그 데미지를 받고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뭔 허튼짓을 하려던 거야……?”
고천수는 트래퍼의 손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웬 시곗줄이 하나 잡혀 있었다.
틱틱틱틱.
그 시곗줄은 조끼로 연결돼 있었다. 시한폭탄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끼에 달린 시계의 초침과 분침이 돌아가는 것을 고천수는 탄식했다.
‘이 자식 설마 자폭하려는 건가?
그렇다면 자폭하게 놔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재단사의 죽음을 봤을 때 살인마의 약점은 본인에게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 트래퍼에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 약점은?
함정이나 폭탄인 게 당연하지 않은가.
틱틱틱.
시계의 초침이 굉장히 빠르게 돌아갔다.
고천수는 불안감에 얼른 뒤로 물러섰다.
“지영배 씨, 저거 터지면 얼마나 크게 터지겠습니까?”
그러면서 묻자니 지영배가 놀란 표정으로 답했다.
“예?”
“얼마나 크게 터질 것 같냐고요.”
“두 세 블록 정도는 날아가는…….”
“아니, 망할!”
예상보다 너무 강력했다.
“야야! 튀어! 튀어!”
고천수는 제나, 흑구 & 온리베어와 함께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미친. ㅋㅋㅋㅋㅋ
-항상 이렇게 되네. ㅋㅋ
-[한도초과] : 도망갈 수 있겠어?
우려가 있었지만 대답해 줄 시간은 없었다.
‘두 세 블록을 날릴 정도의 폭탄을 달고 다닌다고? 진짜 미친놈이네!’
고천수는 달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데미지가 남아 있는 것인지, 아직까지 트래퍼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이쪽으로!”
지영배가 안내한 샛길로 들어가서 밖을 내다보자 그제야 트래퍼는 걸음을 옮겼다.
“어라? 다들 어디에 간 거지?”
트래퍼는 고개를 갸웃대면서 움직였다.
‘터지나?’
돌아가던 시계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던 터다.
조금만 움직여도 곧 터질 것이었다.
“다시 움직이네요.”
하지만 지영배는 그게 헛된 희망이라는 듯 말했다.
“움직이면 시계는 다시 멈춰요.”
“뭐라고요?”
“자기가 움직이지 못하게 됐을 때만 돌아가는 시계예요.”
그 말에 고천수는 작게 탄식을 흘렸다.
혹시나 했는데, 자기 몸에도 트랩 같은 것을 설치했을 줄이야.
멈출 때마다 시계가 움직이면 남는 시간은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동귀어진을 노리는 건지는 몰라도 꽤 악독한 함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단원들을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고.’
지영배의 말에 따르면 다수가 움직일 때 트래퍼의 함정에 더욱 취약해진다고 했다.
시야가 극심하게 좁아진 주변 환경 때문에도 단원들을 원하는 지점에 불러내기 어려웠다.
딸깍.
혹시 자극만 할까 봐 무전기를 끄던 고천수는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어?”
트래퍼가 이상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시곗줄을 쥔 채로 허둥거리고 있던 것이다.
“아, 제기랄.”
지영배는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아는 듯 일행들에게 말했다.
“저 새끼, 시곗줄에 달려 있던 안전핀 다시 못 끼우나 봐요!”
“예? 뭐라고요?”
“뺄 때 휘어지면 다시 못 껴요! 총 맞으면서 동작이 잘못된 것 같아요!”
자폭이다.
그것도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전개로.
너무 갑작스러워서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고천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진짜 운도 지지리도 없네!’
지금 폭발을 일으키면 여기에 있는 인원들은 전부 폭발에 제대로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미친 트래퍼가 폭탄 조끼를 입고 다녀서 벌어진 일이었다.
“뭡니까, 이거.”
트래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저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니, 병신이냐? 그러게 왜 그딴 걸 쳐 입고 나와서는!”
트래퍼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고천수는 인상을 팍 구겼다.
“한 가지만 일단 제안하죠.”
트래퍼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말했다.
“길동무라도 되어 주세요.”
-ㅋㅋㅋㅋㅋㅋ
-돌았나, 이거.
-이판사판이냐?
그건 꽤 거지같은 제안이었다.
“죄송해요, 고천수 씨! 도와드린다고 해 놓고는!”
별다른 도움도 주지 못하고 일만 벌였다고 생각하는지 지영배가 신음과도 같은 탄식을 뱉어냈다.
‘아냐, 아직!’
도움이 끝난 건 아니었다.
“지영배 씨, 준비해 주세요.”
“네? 뭘…….”
“우리 여기서 도망쳐야 하니까요.”
사방에 트래퍼의 함정이 설치돼 있을 터였다.
가능한 멀리, 안전하게 벗어나려면 지영배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했다.
“설마 저만 두고 가려고요? 나만 이렇게 만들어 놓고?”
협박을 하려고 했든 뭐든 간에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놓고는 트래퍼는 섬뜩한 얘기를 잘도 지껄여댔다.
“그러게, 심성을 곱게 썼어야지……!”
고천수는 이를 악물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준비해. 터지긴 진짜 제대로 터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