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7층의 살인마 (6)
쿠탕!
뒤통수를 박고 누운 역병의사가 아주 찰나의 순간 길을 열고 굳어 있을 때였다.
확!
휴는 높이 점프해 역병의사의 몸을 뛰어 넘어갔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장갑 하나를 끼고 산이 든 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직접 만든 것인지 병에는 역병의사가 직접 적어 넣은 글자가 있었다.
“있잖아, 늦었지만 충고 하나 해도 될까?”
휴는 역병의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거 또 만들 시간에 방독면부터 제대로 고쳤어야지.”
촤악!
휴는 병을 열고 이제 막 일어나려는 역병의사의 머리에 쏟아 버렸다.
치익!
산이 물체에 닿으며 강렬한 소리를 내뱉었다.
“끼야아아악!”
역병의사의 비명은 덤이었다.
찢긴 방독면 사이로 흘러 들어간 산에 얼굴이 녹고 있는지 역병의사가 온몸을 뒤틀어댔다.
치익! 치익!
역병의사는 휴를 결코 가만히 둘 수 없다는 듯 일어나 지팡이를 휘둘러댔다.
“진정해.”
팍!
시야를 잃은 역병의사의 공격은 날카롭지 못했다.
휴는 역병의사를 발로 차서 넘어뜨린 뒤 다른 약품들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뭘 쓸까? 뭘 써야 너한테 제대로 먹힐까?”
“실수, 하는 겁니다. 치료의 대상은 제가 아닙니다.”
“그래?”
콰창!
휴는 바로 산이 든 병을 하나 더 역병의사에게 집어던졌다.
“끼아악! 끼아아아!”
역병의사는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의 동물을 흉내 내듯 미친 듯이 비명을 뽑아냈다.
휴는 그사이에 약병들을 빠르게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모든 약품에 대해서 다 아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건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배우며 자라 왔으니까.
콰창!
하지만 굳이 한 방으로 역병의사를 잠재우려는 건 아니었다.
휴는 산, 그리고 인체에 치명적인 다른 약품이 든 병들을 계속 집어던졌다.
콰장창!
주위가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역병의사를 바라보았다.
“어때?”
역병의사는 지금껏 이런 일은 겪어 본 적이 없을 터.
“네가 이런 취급 받아 보니까 이제 좀 실감이 나나? 그러게 왜 찢어진 방독면을 그대로 쓰고 있어. 바닥 안 보여서 페트병이나 밟고 말이야.”
“……당신은,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역병의사는 눈을 감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치료의 기회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휙!
역병의사가 자세를 잡고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
날카로웠다.
하마터면 맞을 뻔한 휴가 걸음 소리를 크게 내며 물러설 때였다.
휙! 휘익!
그 소리를 따라 역병의사가 연달아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소리로……?’
그러고 보니 이 연구실은 역병의사의 거점이었다.
이미 동선을 외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소리만으로도 공격을 이어나갈 수 있을 만큼, 그에게는 이곳이 익숙한 공간일 게 분명했다.
“그래서?”
휴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찌익!
휴가 바닥에 뿌려 놓은 끈끈한 액체에 역병의사는 순간 발이 붙잡혔다.
“미안하지만, 여긴 너한테도 지뢰 같은 곳이야.”
온갖 위험한 약품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장소.
아무리 익숙한 공간이라도 해도, 역병의사는 약을 만들며 주위를 정리하지도 않았다.
그 말인 즉, 몸에 채이고 채일 위험한 것들이 많다는 소리였다.
푹!
휴는 역병의사를 칼로 찔렀다.
허점이 많았던 역병의사는 그대로 휴의 공격을 허용했다.
푹! 팍! 푸욱!
연달아 칼을 찔러 넣은 휴는 바로 옆에 있던 병을 하나 더 가져와 역병의사에게 부었다.
경직되어 있다는 건 지연된다는 소리였다.
휴는 약을 붓고 또 붓고 또 부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형식 일행에게 CS탄을 던졌던, 그 남자를 사망하게 했을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해골 표시의 캡슐약도 찾아냈다.
“아, 캡슐 잘 못 삼킨다고? 걱정 마.”
안 그래도 캡슐이 위에서 녹아서 제 효력을 보일 때까지, 휴는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캡슐을 몇 개나 까서 약간의 물에 푼 휴는, 그대로 역병의사의 턱을 열어서 혀를 내리고 그 안에 흘려넣어 주었다.
“과연 몇 초 뒤에 네가 움직일까? 언제 움직여서 네가 마시고 있는 이걸 뱉어낼 수 있을까?”
휴는 역병의사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팍! 꾸욱!
휴는 한 손으로 역병의사의 목을 치고 문질러서 독약이 식도로 넘어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꾸득.
역병의사는 그제야 조금씩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휴에게 지팡이를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손에는 지팡이가 없었다.
“좋아 보이더라고.”
지팡이는 이미 휴의 다른 손에 들려 있었다.
“이건 내가 앞으로 쓸게. 넌 그냥, 마시기나 해.”
꿀꺽꿀꺽.
역병의사는 고통에 발버둥 치면서 약을 계속 들이마셨다.
그에게 부어진 온갖 독극물들이, 그를 더욱 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신은, 치료를…….”
순간 하얗게 질려 버린 눈을 뜬 역병의사는, 이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중얼거렸다.
“……필요로 하지 않는 역병, 그 자체.”
치익!
휴는 지팡이를 들어 그 눈마저 지져 버렸다.
***
재단사의 양복점.
지하 1층.
그 안에 있는 커다란 라커 중 하나에는 고천수와 제나, 그리고 흑구가 사이좋게 숨어 있었다.
‘아 씨, 이게 뭐야.’
고천수는 이렇게 된 상황을 되짚어 봤다.
일단 소리를 내며 내려온 첫 사람은 바로 제나였다.
그녀는 ‘지금 재단사가 이쪽으로 접근하는 중인데 어떻게 하냐’는 말을 했었다.
그걸 듣고 잠시 고민하는 사이, 재단사는 무슨 일인지 지하 계단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고천수는 일행과 함께 라커에 몸을 들인 것이었다.
‘뭘 어쩌자고 여기 들어온 건지.’
고천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이 라커는 너무 눈에 띌 정도로 컸다.
다행히 안에 아무것도 없기는 했지만, 재단사가 열어 보게 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ㅋㅋㅋㅋ 진짜 웃기지도 않네.
-이거 재단사가 시체 넣어 두는 라커 아님?
-시체가 되고 싶다는 의지 표명인 건지.
고천수는 자신의 눈높이쯤에 나 있는 작은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재단사는 무슨 일인지 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먼저 공격해야 할지도.’
여기 숨은 건 재단사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다 같이 달려들면 재단사를 경직시킬 수는 있었다.
그사이 재단사를 어떻게 해 놓으면 되긴 하겠지만 문제는 그러면 퇴치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여기 누군가 침입한 걸 알려 주면 재단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나가서 어디다 묶어 놔. 못 움직이게 하면 되지.
-그건 안 돼. 완전 결박하면 갑자기 사라져서 다른 데 나타날걸?
-레알?
-엉. 쉽게 해결 못 보게 하려고 그런 것 같던데.
시청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꼼수를 쓰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역시 여기에 숨어 있는 수밖에 없었다.
재단사가 나갈 때까지.
“옷감이…… 모자라네?”
재단사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거렸다.
그 모습이 제법 기괴해 보였다.
까딱까딱.
재단사는 그러면서 제자리를 맴돌다가 라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 시발.’
안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걸까.
고천수는 총을 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걸리면 안 되는데.’
마음을 졸이고 있자니 재단사는 천천히 걸음을 라커 쪽으로 옮겼다.
“큰일. 그래, 큰일이야.”
-더 큰일인 건 고천수.
-ㅋㅋㅋㅋㅋ
꿀꺽.
그렇게 고천수가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재단사는 라커 쪽에서 갑자기 뒤돌아서며 다시 되돌아 나갔다.
‘뭐야.’
잠시 기다려 봤지만 재단사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간 거야?’
고천수는 조금 더 상황을 살피다가 슬쩍 라커를 열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며 희생자가 있던 방까지 고개를 내밀고 살핀 고천수는 한숨을 살짝 몰아쉬었다.
‘정말 나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단사는 다시 바깥으로 나간 듯했다.
뒤따라 나온 제나가 낮은 목소리로 고천수에게 물었다.
“천수 님, 이제 괜찮은 겁니까?”
“그래. 근데, 그 녀석 시야는 안 훔쳐지는 거지?”
제나의 능력에도 조건은 걸려 있었다.
주요 빌런에게는 쓸 수 없는 것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재단사에게도 적용되고 있을 거라 보였다.
“네, 시도는 했지만 쓸 수 없었습니다.”
“그렇구만.”
고천수는 품에 가지고 있던 쪽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힌트라고는 이거 하나뿐이었다.
‘랍바, 그리고 옷감…….’
속으로 중얼거리던 고천수는 멍하니 고개를 돌리고 있는 흑구에게 말했다.
“흑구야, 냄새 맡아라. 쫓아가자.”
답은 하나였다.
재단사를 다시 쫓아가는 것이었다.
“으으, 살려 줘.”
그렇게 옆방으로 다시 돌아가 계단으로 향하려고 하는데, 거적때기에 덮여 있던 희생자가 입을 열었다.
“살려 줘.”
“에이 씨.”
그냥 가기는 뭐해서 고천수는 거적때기를 들춰내려다가 올라오는 채팅들을 확인했다.
-노노! 걷지 마!
-심의 기준 충족하셈.
-ㅋㅋㅋㅋ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진지한 의견도 있었다.
-[한도초과] : 별로 안 보는 게 좋을걸. 아무리 너라도 정신에 타격 와.
대체 희생자를 어떻게 만들어 놓은 걸까.
고천수는 거적때기를 살짝 들어 올리고 일부만 살펴보았다.
“아, 씁.”
다리만 봐도 각이 나왔다.
여기저기 잘리고 꿰매진 몸에 옷감까지 덧대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기괴한 작품 그 자체.
“살려 줘…….”
이 상태에서는 살릴 수도 없었다.
고천수는 거적때기를 내려놓았다.
슥.
그저 가지고 있는 도끼로 조용히 끝장이나 내 줄까 하는데, 갑자기 희생자의 입에서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그 자식도 똑같아.”
갑작스러운 얘기였다.
고천수는 희생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자식도 똑같아. 다 똑같아. 약해. 그런데 나만. 똑같아.”
정신이 나가기 직전인지, 아니면 이미 나간 것인지 희생자는 거친 목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똑같아, 똑같아, 똑같아. 똑같아아아! 아아…… 컥.”
비명까지 지르던 희생자의 머리에 도끼가 찍혔다.
“아,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지랄.”
고천수는 식겁한 표정으로 계단 쪽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재단사는 이미 이곳을 떠났을 수도 있지만 근처에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비명 소리를 듣고 다시 올 수도 있는 만큼, 고천수가 도끼를 휘두른 건 어쩔 수 없던 일이었다.
“천수 님, 이 사람이 한 말에 뭔가 의미라도 있을까요?”
“글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이런 게임에서는 헛소리만큼 사실 많은 내용을 내포하는 게 없었다.
고천수는 도끼를 정돈해서 다시 차고 총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살금살금.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 고천수의 눈에 다시 양복점 1층의 모습이 들어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재단사는 이곳에 없었다.
고천수는 계산기 안쪽에서 무전기를 다시 켰다.
“아아. 여기는 알파 제로. 재단사 위치 확인되는지.”
고천수가 무전기에 대고 말하자 이내 답변이 돌아왔다.
『알파 제로. 여기는 알파 포. 재단사, 양복점에서 나와 북쪽으로 이동 중.』
“북쪽으로?”
거기에 뭐라도 있는 걸까.
“알파 포. 재단사 목적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재단사가 향하는 방향에 작은 공장이 보임. 어떤 공장인지는 아직 파악 불가.』
플랜트.
살인마가 나오는 창작품이면 으레 나오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재단사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니 의외였다.
‘아.’
아니, 완전히 의외는 아니었다.
재단사가 남겨 놓은 쪽지, 그리고 희생자의 모습과 그 증언을 봤을 때 떠오르는 것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면…….’
양복점이 재단사의 약점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재단사를 해치울 수 있는 장소는…….
“아아, 여기는 알파 제로.”
고천수는 무전기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단 기계 좀 돌려 본 적 있다, 하는 사람 응답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