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항해길 (3)
‘캡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작은 상자에 든 수십 개의 캡슐.
‘뭐지?’
캡슐 중 하나를 들어 올린 고천수는 곧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건……!”
그물이었다.
캡슐 표면에 그물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함께 쓰여 있는 사용법에는, 던지면 자동으로 50m 크기의 그물이 전개돼 물고기들을 봉쇄한다고 되어 있었다.
-50m면 대형 그물이네.
-스피어피시도 묶어 둘 수 있겠음.
-당장 쓰자!
하지만 상자를 든 고천수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 아직은…….’
그물을 이곳에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좁은 수로에서 사용한다면 유람선이 나아갈 길이 막힐 수도 있던 것이다.
‘상황은?’
곳곳에서 총성과 비명 소리가 들렸다. 스피어피시들의 공세는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우우우웅.
쫓아온 스피어피시의 물량이 워낙 많아 측면을 틀어막고 앞뒤만 열어놓은 지금의 상황이 무조건적으로 유리하지는 않았다.
큰 어류들이 몰려다니면 그 자체로 물살을 만든다. 앞뒤를 가로막고 물살을 만들며 달려드는 스피어피시 때문에 유람선은 쉽게 전진하질 못하고 주춤대고 있었다.
쿵!
심지어 유람선은 방향을 잃고 옆쪽의 암석에 몸을 틀어박기까지 했다.
“고천수 님!”
선교 쪽에서 선장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배가 앞으로 나가질 못합니다!”
“제기랄!”
고천수는 기어가 앞을 바라보았다.
-와, 시발!
-저 정도로 많다고?
스피어피시들이 급류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고천수는 그쪽도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으아아아아아! 이쪽이다, 물고기 새끼들아!”
어그로를 끌어보기 위해 무작정 소리부터 질러 보았지만 생각대로 될 턱이 없었다.
스피어피시들은 그저 유람선으로 달려들 뿐이었다.
‘유입부터 차단해야 한다!’
고천수는 얼른 아래를 내려다보며 외쳤다.
“흑구야!”
흑구가 고천수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나서 줘야겠다!”
상자를 챙겨 흑구가 있는 쪽으로 내려선 고천수는, 그 안에서 십 수 개의 캡슐을 꺼내서 온리베어에게 전해 주었다.
“흑구한테는 암석을 타고 위로 올라가게 할 거야. 네가 가서 이 수로 앞뒤로 캡슐을 던져. 너라면 이 아이템을 어떻게 써야 할지는 알겠지?”
그러자 온리베어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 수로의 출입구를 막으면 안 된다는 건 명심해. 추가로 유입되지 않게만 막으려는 거야. 적당히 막았다고 생각되면 근처로 돌아와. 알았지?”
이어서 한 경고에도 온리베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끝났다.
고천수는 흑구와 온리베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잘 부탁한다.”
툭.
그러자 온리베어가 흑구의 목에서 목걸이를 분리해 주었다.
크르.
흑구가 이죽거린 주둥이 밖으로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왔다.
대형화.
커지기 시작한 발로 유람선에서 튀어 오른 흑구는 양쪽의 암석을 좌우로 밟아 오가며 위쪽으로 올라갔다.
“선장님.”
선교로 들어간 고천수는 그런 흑구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선장에게 말했다.
“방금 본 녀석은 다시 나타나도 쏘지 말라고 방송을 통해 전해 주십시오.”
“예? 방금 그 괴물이요?”
“네. 그냥 괴물은 아니고 우리 편이니까요.”
흑구가 저렇게 된 모습은 아직 몇 명밖에 보지 못했다.
혹시나 누가 공격하지는 않도록 조치는 취해야 했다.
“아, 알겠습니다.”
선장은 고천수의 요청대로 서둘러 방송했다.
『전파합니다! 방금 위로 올라간 괴물은 공격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돕는 괴물입니다! 고천수 님의 지시사항이니 모두 실수하지 않도록…….』
‘제대로 들어야 할 텐데.’
고천수는 아직도 총성이 울려 퍼지고 있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정신이 없을 터라 고천수는 몇 번이고 방송을 반복하게 했다.
‘부탁한다, 이놈들아.’
위를 올려다본 고천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는 이제 두 몬스터에게 달려 있었다.
퍼엉!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에선가 폭발음이 들렸다.
‘수류탄?’
아니었다.
그런 것과는 좀 달랐다.
끼에에엑!
끼엑!
끼아악!
어디선가 스피어피시의 비명이 들렸다.
유람선이 나가야 할 전면의 수로 출구와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였다.
펑! 퍼엉!
뭔가가 터질 때마다 스피어피시들의 괴성이 울려 퍼졌다.
고천수는 오래잖아 폭음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캡슐!’
안에 그물이 들어 있다는 아이템.
그게 바다에 내던져진 뒤, 차례대로 터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위이이잉!
스피어피시의 유입량이 줄어들면서 유람선이 조금 앞으로 전진했다.
‘하지만……!’
고천수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앞에 있는 스피어피시들이 많았다. 저것들을 좀 더 치워내지 않으면 유람선이 제대로 나아갈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
그때, 흑구가 돌아왔다.
“괴, 괴물……!”
일부 사람들이 뒤늦게 흑구를 보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행히도 군인들의 발포는 없었다.
“쏘지 마!”
“쏘지 마라!”
“고천수 님의 지시다!”
송하나, 최형식 병장, 제나를 필두로 방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주위의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그사이 두 암석을 타고 내려온 흑구가 유람선 앞의 스피어피시들을 잔뜩 물어서 출구 방향으로 내던지기 시작했다.
“오, 오오!”
“물고기들을 치워 주고 있어!”
“앞으로 갈 수 있어!”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이 곧 환호성을 질렀지만 고천수는 흑구를 보며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흑구야……!’
팍! 푸학!
흑구의 주둥이와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아무리 송곳니가 길어지고 몸도 단단해졌다고는 하지만 스피어피시들의 꼬챙이는 여전히 살벌했다.
흑구가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크우우우우!
어디선가 또 다른 괴성이 들렸다.
“응?”
전면의 수로 출구 쪽에 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나 있었다.
“뭐, 뭐야!”
“괴물이다!”
“또 다른 게 나타났어!”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을 보며 고천수도 눈을 크게 떴다.
출구에 나타나 암석에 매달려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한 곰이었다.
“설마!”
고천수는 흑구의 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있어야 할 온리베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너지가 난다고 했잖어.
-마스터 효과 덕분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따라할 수도 있음.
-이 경우엔…….
온리베어도 흑구처럼 대형화가 가능한 것이었다.
크우우우우!
온리베어는 갈고리처럼 뻗어 나온 발톱으로, 흑구가 날려 보낸 스피어피시들을 찍어서 출구 밖으로 내던지고 있었다.
팍! 파악! 퍼억!
순식간에 길이 정리되는 것을 감탄하던 사람들이, 순간 고천수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외친 말에 정신을 차렸다.
“뒤! 뒤를 막아야 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뒤쪽은 스피어피시들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잠시 멍하게 있던 사람들은 상황을 깨닫고 다시 전열을 재정비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뒤를 막자!”
“여기서 살아 나가는 거야!”
투다다! 투다다다다!
잦아들던 총성이 다시 한번 커졌다.
위이잉!
힘차게 돌아가는 스크루에 의해 유람선은 점점 더 속도를 붙이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크우우우우!
두 마리 몬스터들이 암석 위로 올라가며 포효를 터뜨릴 때, 유람선은 마침내 출구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사, 살았다!”
“빠져나왔다!”
유람선이 암석들 밖으로 빠져나가자 사람들이 기쁨의 함성을 내질렀다.
‘후우, 죽다 살았네.’
고천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서 다행이야.’
사람들이 스피어피시를 상대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혼란에 빠져 우왕좌왕했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함께 탑을 찾으며 일해 왔던 사람들을 데려온 거라 합이 어느 정도 잘 맞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고무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타닥!
어느새 다시 소형화된 흑구가 등 위에 온리베어를 태운 채 고천수의 곁에 나타났다.
고천수는 둘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덕분에 살았다.”
푸하학!
그때, 다시 너른 바다로 나와 항해를 시작한 유람선에 거센 물살이 와 닿았다.
“더 온다.”
고천수는 헤엄치며 다가오는 수많은 스피어피시들을 발견하고 캡슐을 꺼내 손에 쥐었다.
“흐으으읍!”
그러고는 힘을 줘서 멀리 캡슐을 날려 보냈다.
퍼엉!
마치 수류탄이 폭발한 것처럼 그 자리에 물기둥이 크게 치솟더니, 허공에서 거대한 그물이 넓게 펴지며 아래로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랬군.’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 그물인지 알았다.
지금은 작은 캡슐에 들어찬 상태로 무게도 가볍지만, 안에서 튀어나오면 반전된 무게로 곧장 심해에 끌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저 앞!
-옆에도!
-빨리 던져, 고천수!
시청자들이 닦달하지 않아도 캡슐을 던질 곳은 정해졌다.
고천수는 팔에 힘을 줘 곳곳에 캡슐을 날려 보냈다.
펑! 퍼엉!
곳곳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르고, 그물이 넓게 퍼져 나갔다.
끼엑!
끼에엑!
그물에 몸뚱이가 얽매인 스피어피시들이 발악하며 괴성을 질러댔다.
‘끔찍하네.’
물속에서 괴성을 내뱉는 것조차 들릴 정도여서 고천수는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펑! 펑…….
물기둥이 솟아오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달려들던 스피어피시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던 것이다.
“괴물들이 점점 없어진다!”
“조금만 더 하면 안전해!”
“다들 힘내라고!”
위험한 시간은 벗어났다고 여긴 건지, 사람들의 목소리에 희망이 차 있었다.
슥.
고천수는 하나 더 캡슐을 던지려던 손을 멈춰 세웠다.
‘됐나?’
스피어피시가 더 이상 유람선 위로 뛰어오르지 않았다.
몇 마리가 남아 있는 듯했지만, 기세가 꺾인 건지 그냥 옆으로 지나치고 있었다.
“하아.”
끝났다.
고천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고천수 님!”
그사이, 돌아온 제나가 외쳤다.
“공격이 끝났습니다! 몬스터들이 더 이상 몰려오지 않습니다!”
환희에 차 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고천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확인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네.’
그녀는 고천수를 믿음으로써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었다고 보는 듯했다.
틀린 건 아니었지만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다.
‘기대에 계속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잖아.’
물론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수는 있기에 고천수는 딱히 제나의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기로 했다.
-고비는 넘겼네.
-여기서부터 탑까지는 금방이던가?
-항구에서 배만 잘 세우면 큰 위기는 없지 않나 싶은데.
‘항구라.’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바다 위에는 이 유람선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배들은 어디로 갔을까.’
스피어피시에 이미 당했을 수도 있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듯했지만 사실 다른 쪽으로 빠졌을 수도 있었다.
고천수가 스피어피시를 정리했기 때문에 이쪽 항로는 이제 깨끗했다. 누가 따라올지도 모르므로, 경계를 할 필요는 있었다.
[항로가 설정됩니다.]
다른 인원들과 함께 쉬고 있는 사이, 갑자기 알림이 떠올랐다.
‘항로?’
그러고 보니 암석 사이를 통과할 때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항로가 설정된다는 말이 있었다.
고천수는 유람선의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이이이이.
그러자 신기하게도, 유람선 앞으로 반투명한 붉은 선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내비게이션의 화살표와도 같았다.
“고, 고천수 님. 저건…….”
심지어 그 선은 고천수에게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살짝 당황했지만 고천수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배를 조정하는 건 내가 아니니까, 나한테만 보이면 오히려 곤란했겠지.’
고천수는 빠르게 마이크를 잡고 선실에 방송했다.
『여러분, 유람선 앞의 선이 보이십니까?』
그리고 태연하게 이 상황을 자신에 맞게 끌고 들어왔다.
『시련에서 살아남았기에, 저희에게 약속된 보상이 주어졌습니다.』
“보상?”
“보상이라고?”
“그게 뭐지?”
사람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고천수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