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차귀도 (5)
질문 자체는 간단했다.
‘호의인가 아닌가.’
다만 고천수에게는 그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되려나?
-아, 이장 겁나게 수상하게 생겼는디. ㅋㅋ
-ㅋㅋㅋㅋ
“서울입니다.”
수상함을 느끼긴 했지만, 고천수는 답을 미루진 않았다.
“서울?”
빨리 대답한 데다가 목적지가 의외의 장소였는지 이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국에 서울이라, 무슨 이유라도 있나?”
“일행들이 그쪽에 갔습니다. 안전한 곳이 있는지 찾으려고 합니다.”
정보에는 양민철 일행이 서울로 갔다고 되어 있었다.
안전한지는 알 수 없지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참, 희한한 친구군.”
이장은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시며 말했다.
“패기 있게 들어온다 했더니 목적지도 아주 특이해. 서울이 정말로 안전할 것 같나?”
“제주도까지 왔는데,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지 않습니까. 오히려 서울이 방비가 잘 돼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뭐, 그럴 가능성이 없지야 않겠지.”
하지만 이장이 보기엔, 그건 상식적이지 않은 듯했다.
“이쪽으로 오가는 배가 많네.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위험하지 않은 곳은 거의 없는 것 같아.”
“그렇군요.”
“대부분은 해외로 나가길 바라지. 거기는 또 어떨지 모르니까.”
이장은 서울행을 원하는 고천수를 부정적인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서울이라. 배를 빌려줬다간 아까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는걸?”
첫인사에 비해서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고천수는 나름 이 대화에 만족했다.
‘빌려줄 배는 있다는 거군.’
그냥 알선만 해 주는 역은 아닌 듯했다.
태도야 어쨌든 간에 고천수는 배만 빌릴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이장님, 그럼 배는 빌릴 수 있겠습니까?”
“…….”
이장은 고천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빌려줄 수야 있네만.”
“그렇다면 빌리고 싶습니다.”
가급적 큰 배면 좋았다. 신도들을 싣고 서울로 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빌릴 수 있겠습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이장은 피식 웃더니,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재밌구만. 아주 재밌는 친구가 들어왔어.”
그러더니 이장은 어딘가를 보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다가와 그에게 카탈로그를 건네주었다.
“자. 배야 많지.”
그는 테이블 위에 카탈로그를 펼쳐 놓았다.
거기에는 수많은 배가 가격표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원하는 놈으로 골라. 빌려줄 테니까.”
제법 인심을 썼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그런 이장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카탈로그에 나와 있는 배의 대여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작은 배부터 큰 배까지, 거리에 따라 최하 수십 만 달러부터 시작했다.
“보이겠지만 배를 빌리는 비용은 그 정도야. 매매는 안 되고. 빌릴 때 내 부하들이 탑승할 수 있다는 내용도 동의해야 하네. 그래야 돌려받으니까.”
“싸지는 않네요.”
“이 정도면 싼 거지.”
이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고.”
고천수는 다시 한번 카탈로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터무니없는 금액이었다.
-그래도 종말 상황에서 이 정도면 싼 거지.
-근데 그냥 해상 택시나 다름없지 않음? 목적지 정해서 빌려주는 것뿐인데.
-글쎄.
시청자의 말대로 어떤 면에서는 해상 택시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택시여도 상관없었다.
고천수는 그저 신도들을 데리고 서울만 갈 수 있으면 됐다.
‘비용을 어쩐다.’
다만 금전 문제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할 때였다.
휴가 나서서 이장에게 말했다.
“비싼데 깎아 주시죠.”
“비싸?”
“예.”
휴의 당돌한 반응에 이장이 혀를 찼다.
“말했지 않나? 합리적인 가격에 운영하고 있다고.”
“이장님께서 더 합리적으로 운영하는 배를 갖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하는 말이 참 당당했다.
고천수는 그런 휴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대체 뭐 하는 거야?’
이장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그리 좋을 건 없었다.
호기롭게 나오는 태도가 좋다고 하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이장이 막무가내로 기어오르는 손님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흠.”
아니나 다를까, 이장이 팔짱을 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더 합리적인 비용에 내놓을 수 있는 배라…….”
이러다가 비용을 더 올리는 건 아닐지 고천수는 잠시 걱정이 됐지만, 곧 생각을 바꾸었다.
‘그냥 이러는 건 아니겠지.’
휴가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모습이 있기는 해도, 머리가 좋지 못한 편은 아니었다.
휴가 이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좋아. 그러면 보여 주지.”
이장은 그런 고천수의 기대에 부응하듯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누군가 또 다가와 테이블 위에 새로운 카탈로그를 내려놓았다.
‘이건…….’
고천수는 거기에 나와 있는 가격을 보고 두 눈이 커졌다.
새 카탈로그의 배들은 빌리는 비용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몇 천 달러에서 몇 만 달러였다.
“뭐, 빌려주는 비용이라고 되어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빌려주는 건 아니야.”
이장은 오해 말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전세 안 내고 다른 사람들이랑 합석해서 타면 가격을 깎아주겠다는 거지. 대중교통처럼 말이야.”
고천수는 다시 카탈로그를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큰 배에 비하면 저렴한 수준의 가격이었다.
“좋네요.”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인천 쪽으로 가는 배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말입니다.”
뭐가 됐든 간에 고천수는 서울로 가야만 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고천수는 어떻게든 그곳으로 가는 길을 찾는 데에만 주력할 뿐이었다.
“대단한 집념이군.”
이장은 두 손 들었다는 듯 말했다.
“자네가 정 거기에 가고 싶다면, 그쪽으로 갈 배를 내가 수소문해 보지. 가능한 싸게 해줄 테니까, 결정이 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라고.”
“감사합니다.”
고천수는 이장의 답변에 고마움을 표현하면서도 속으로는 의문을 가졌다.
‘너무 쉬운데?’
일이 너무 착착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자, 이야기는 끝났으니 쉬러 나가 보게. 나중에 필요할 때 내가 또 부르겠네.”
대화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고천수는 일행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
“휴.”
고천수는 밖으로 나와 건물에서 멀어지자마자 휴에게 물었다.
“뭔가 이상했던 것 같은데, 넌 혹시 그런 거 못 느꼈어?”
그다지 기대하지는 않긴 했지만, 휴가 이장 앞에서 보인 행동은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었다.
왜 그랬는지 한번 확인은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있었지.”
휴는 살짝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냄새가 났어.”
“냄새?”
-그건 흑구 전용 아님?
-ㅋㅋㅋㅋㅋ
고천수는 질문을 고쳐 그에게 물었다.
“냄새라니, 무슨 뜻이야?”
“피 냄새가 났다, 이 말이야.”
휴는 자신이 느꼈던 것에 대해서 설명했다.
“많은 사람을 죽인 느낌이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말이야.”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고천수는 그 말에 소윤재와 이선웅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이선웅이 나서서 말했다.
“사, 사람을 죽였다니? 이장님이 성격이 좀 남다르기는 해도 사람을 죽인 거는 본 적이 없는데.”
“그러게요.”
소윤재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장님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건 못 봤어요.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기는 하지만요.”
적어도 섬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음.”
고천수는 살짝 침음했다.
‘진짜인가?’
휴는 좀 자기 느낌 가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방금 한 말도 그냥 직감에서 한 말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직감이라 더 무서운 것도 있었다.
휴는 살인마 잡는 살인마였다.
같은 살인마를 알아보는 눈은 탁월한 편이었다.
‘배를 알아봐 줄 때까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어.’
아직 뭔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미리부터 대비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이선웅 씨.”
그를 위해서는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제 저희 부모님에게 안내를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
이선웅이 탄식하듯 답했다.
“아, 그, 그렇지. 얼른 데려다줄게요. 따라와요.”
이선웅은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천수.”
그러는 도중 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생각인데 말이야. 배가 수상해.”
“배?”
너무 짧게 얘기해서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고천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배들에 뭔가 감춰져 있다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은 아니고. 행선지 말이야.”
휴는 이장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꺼내놓았다.
“이장이 제일 먼저 행선지를 물었잖아. 그게 이상해.”
“좀 설명을 자세히 하면 안 될까?”
“그냥 감이야.”
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여기까지밖에 얘기할 수 없어.”
“아휴, 참.”
괜한 기대를 했다 싶으면서도, 고천수는 휴의 말대로 이장과의 대화를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행선지. 평범한 질문이었는데.’
배를 제공해 주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물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너무 예민하게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잠깐.’
이장의 얘기를 보면, 차귀도에서 움직이는 배들은 대부분 이미 정해진 행선지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정기선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럼…….’
이장이 고천수에게 물은 내용은 사실 정기선에 탈 것이냐 아닐 것이냐로 볼 수 있었다.
“휴. 네가 느낀 게 사실이라면 한 가지 짚이는 게 있는 것 같아.”
“그래?”
고천수의 말에 휴가 물음표를 그렸다.
“그게 뭔데?”
“당장은 얘기하기 힘들어.”
정기선과 달리 비정기선은 행선지와 목적지가 불분명했다. 그런 배를 타는 사람은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비정기선에 타는 사람들은 수가 적을 수밖에 없고, 빼돌리기 쉬운 인원일 수밖에 없었다.
‘이장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어쨌거나 수상한 것만은 확실했다.
지금부터 할 일은 바뀌지 않으니 너무 머리 아프게 고민을 할 필요는 없었다.
쾅쾅!
그사이 일행은 어느 집 앞에 도착했다.
이선웅은 먼저 뛰어가 그 집의 문을 두드렸다.
“고 선생님! 계십니까!”
이선웅은 문을 두드리며 사람을 찾았다.
고 선생님이라니, 고천수의 아버지를 일컫는 게 분명했다.
“고 선생님?”
하지만 안에서 반응은 없었다.
삐그덕.
이선웅이 무심코 문고리를 돌리자 문이 열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현관 안쪽으로 들어가 고천수의 아버지, 고강연을 찾았다.
“고 선생님!”
“없는가 보군요.”
고천수는 이선웅을 따라 들어가며 말했다.
“어디 외출이라도 하셨나 봅니다.”
그러면서 고천수는 집 안을 둘러보았다.
안에는 사람이 사는 흔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부모님이 있었다는 걸 알아채게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응?’
그러다가 서랍에서 찾은 것이 있었다.
‘일기장?’
촤락.
잠시 내용을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거의 매일같이 이런 말이 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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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보고 싶다.
그러나 이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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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일까.
아들이 죽었다고 너무 굳게 믿어 버리게 된 것일까.
“고천수 씨!”
밖에 있던 소윤재가 안으로 들어오며 외쳤다.
“고강연 씨가 오셨습니다!”
그 말에 고천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일기장을 내려놓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드디어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하지만 결국에 이렇게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고천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밖으로 나가 일행들 곁에 나타난 한 남자와 얼굴을 마주했다.
“아……?”
그리고 탄식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했던 아버지가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