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차귀도 (3)
“도착인가?”
고천수는 트럭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역시 봉화였어.”
이곳에 있는 봉화에 불이 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이 주변에…… 응?”
고천수는 풀숲이 누워 있는 흔적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바스락.
그때였다.
누군가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고천수가 몸을 흠칫했다.
-아, 슈밤. 깜짝이야.
-몬스터인가?
-아냐.
고천수는 튀어나온 것이 뭔지를 확인하고는 가볍게 탄식했다.
“소윤재 씨!”
소방대원 소윤재.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서 나온 건 제주공항에 차를 몰고 왔던 이선웅이었다.
“이선웅 씨도 계시군요. 두 분 다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고천수는 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저도 다시 봬서 반갑습니다.”
소윤재는 그런 고천수에게 답하면서도 이 상황이 의문스러운지 고개를 돌려댔다.
옆에 있던 이선웅은 아예 고천수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기까지 했다.
“고천수 씨? 이 사람들은 다 뭡니까?”
“아.”
고천수는 굳이 숨기지 않고 둘에게 주변 사람들의 정체를 알려 주었다.
“뉴타운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입니다. 중문 관광단지요.”
“네?”
이선웅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을 데려왔다는 말입니까? 거기는 안전한 곳이라면서요.”
“그러게요.”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는 안전하지 않았다고 해 두는 편이 좋겠군요.”
“허어.”
“지금 어쩌다 보니 제가 이끌고 있습니다. 다들 순한 편이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순한 편. ㅋㅋㅋ
-캡사이신도 참기름이라고 할 놈이네.
-뭐, 지금은 순한 거 맞겠지. ㅋㅋ
고천수의 말에 소윤재와 이선웅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중문 관광단지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온 것이라고 말하는 고천수에게, 알릴 사항이 있던 것이다.
“자, 잠깐. 근데 있잖습니까. 여기에 이미 군인들이 왔었는데요.”
이선웅이 먼저 포문을 열자, 소윤재가 정리해서 말했다.
“맞다, 고천수 씨. 이성웅 씨 말대로 아까 여기에 군인들이 들렀다 갔었습니다. 이곳에 있는 군인들과 느낌이 비슷한데, 혹시 고천수 씨와 잘 아는 쪽입니까?”
“예.”
고천수도 이미 백경연이 이곳에 들렀다 갔을지 모른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저랑 같이 있던 군인들입니다. 뉴타운의 실세였죠.”
“그럴 수가……. 그렇다면 거기에도 몬스터가?”
“비슷합니다.”
놀라는 소윤재를 보며 고천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진이 나서 지반이 무너진 일이 있었죠. 좀 더 자세히 얘기하면, 탑이란 게 나타났습니다.”
“탑?”
소윤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탑이라니, 그게 뭡니까?”
“말 그대로 탑입니다. 그냥 갑자기 지반을 뚫고 나타났습니다. 안에 뭐가 있지는 않았는데, 일반적인 탑은 아니었죠. 뭔가 섬뜩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럼…….”
“네, 다들 그걸 피해 달아난 겁니다. 딱 봐도 감당할 수 없는 지물이니까요.”
고천수는 뒤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저와 같이 그 탑에 잠시 갇혔다가 나온 자들입니다. 소윤재 씨가 봤다던 그 군인들은 사람들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 버렸던 거죠.”
“그, 그렇군요.”
“네, 결과적으로 얘기하자면 뉴타운도 안전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고천수가 살짝 고개를 젓자, 여태 놀라서 가만히 있던 소윤재가 슬쩍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안전한 곳은 딱히 없는 거겠죠. 이젠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고천수는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소윤재에게 물었다.
“소윤재 씨, 차귀도에 배편은 충분했습니까?”
“배편?”
“저희 쪽에 사람이 많아서요.”
배가 부족하다고 한다면 사람을 미리 걸러내야만 했다.
인원이 많은 게 누군가와 대적할 때 좋긴 하겠지만, 함께 배에 탈 수 없어 선착장에서 또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면 그만큼 곤란한 일도 없을 터였다.
“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소윤재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말했다.
“크기가 큰 배도 오가고 있어요. 차귀도에 물자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물자?”
“배에 쓸 기름 같은 것들이 많았어요.”
이선웅이 끼어들어 설명을 이었다.
“국가 비상 시에 쓸 것들을 거기에 몰아넣은 느낌이었어요. 그냥 섬이 아니었던 거죠.”
“그렇습니까?”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차귀도라면 자연 경관을 이유로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적도 있던 곳일 텐데, 비상시에 쓸 물품들이 거기에 몰려 있었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함께 이동하기로 하죠.”
“음.”
잠시 뜸을 들인 소윤재는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사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올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는 한데, 일단 차귀도에 연락은 넣어 보겠습니다.”
치이이익.
그렇게 무전기를 켠 소윤재는 차귀도에 있는 누군가와 무전을 나누기 시작했다.
“여기는 봉화, 봉화. 차귀도 나와라.”
『여기는 차귀도. 송신 바람.』
“차귀도로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도 되는지? 응답 바람.”
『숫자는?』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고천수에게서 말을 전해 듣고 차귀도로 들어갈 인원이 150명이 넘는다는 소리를 들은 수신자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설마 저쪽에 보이는 사람들인가?』
“저쪽?”
『건너편 해안가에 많은 수의 군인이 있는 게 보인다. 일행이 아닌가?』
아니었다.
해안가에 몰려있는 군인들은 백경연과 그 부하들이 분명했다.
“여기에 왔던 군인들이 그대로 차귀도로 가려고 하나 보군요.”
고천수의 말에 소윤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인원들을 다 데리고 차귀도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겁니다.”
차귀도는 작은 섬이었다.
많은 병력이 들어가면 그대로 먹힐 가능성이 있었다.
소윤재는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혹시 고천수 씨가 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까?”
“…….”
고천수는 그의 물음에 입을 다물고 잠시 침음했다.
‘설득이 될 리가 없지.’
백경연은 100% 자신의 지휘 체계가 무너지는 것이 싫어서 뉴타운을 떠난 것이었다.
이쪽에서 접근하면 무조건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그들을 치워내야 차귀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규모나 무기나 분명히 이쪽이 열세.
‘형님들 스피어피시를 이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그건 어려울걸?
-해안가로 몰고 오기 어려워.
-그리고 그건 차귀도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에 있는 거라 아주 가까이에 있지는 않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제나.”
고천수는 제나를 불러 물었다.
“혹시 7.5사단이 쓰는 무전 주파수를 알고 있어?”
이쪽이 따라왔다는 걸 알면 무전 주파수를 바꿨을 수도 있지만, 아직 백경연은 이 사실을 모를 테니 그 주파수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었다.
“주파수 말입니까?”
“주파수 도약을 하더라도 너는 어느 정도 패턴을 알지 않을까 해서.”
“아예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제나는 살짝 탄식하더니 달려가 최형식 병장에게 뭐라 묻고 돌아왔다.
“천수 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근데 무전 연결을 하면 무슨 얘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그 질문에 고천수는 소윤재를 돌아보았다.
‘내가 직접 무전을 할 수는 없지.’
여기서는 제일 백경연의 의심을 사지 않을 만한 사람이 무전을 하는 것이 좋았다.
“소윤재 씨, 무전을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그 군인들은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거짓으로 꾀어서라도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저희가 차귀도로 들어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이동시키면 됩니다.”
“흐음.”
소윤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해 보긴 하겠습니다만, 그 군인들을 잠시 치워낸다고 해도 여기 있는 인원들이 차귀도로 들어갈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지…….”
그건 고천수도 걱정이 되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냥 그 걱정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했다.
“소윤재 씨, 저는 이곳에 있는 인원들과 함께 차귀도로 들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네?”
고천수의 말에 소윤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들어가지 않는다고요……?”
“네. 어차피 배만 같이 타면 되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곳의 사람들은 배를 태울 수 있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키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차귀도에 들어가 배를 얻어오거나 선장을 포섭해 오는 것은 고천수와 몇 명만으로 족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소윤재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얼굴에서 근심을 지우지는 못했다.
고천수는 그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그만한 배를 쉽게 내어주려고 하지 않는다는 거지.’
사람들을 데리고 차귀도에 들어가면 고천수가 쓸 수 있는 힘도 더욱 커졌다.
머릿수가 곧 힘이니까.
‘하지만 애초에 이 두 명이 우리의 신원을 보증해 준다고 해도 문제다.’
차귀도에서는 현재 백경연 일행을 경계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곳의 사람들도 경계할 수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소윤재, 이선웅이 신원을 보증한다고 할 수 있다는 점인데, 그래도 수가 너무 많았다.
고천수를 포함해서 몇 명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소윤재 씨, 그럼 부탁합니다.”
고천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소윤재는 제나와 최형식 병장의 안내에 따라 백경연 무리와 무전 주파수를 맞췄다.
“아아. 여기는 차귀도. 주파수 탐색기로 무작위 무전 발신 중입니다. 혹시 들리시는 분 있습니까?”
그러고는 고천수가 부탁한대로 무전을 시작했다.
『치이이익! 여기는 7.5부대. 수신됨.』
“아! 닿았군요!”
소윤재는 운 좋게 주파수가 연결된 척 말했다.
“무전이 불안정합니다. 혹시 지휘관님 계십니까? 끊기기 전에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소윤재의 말에 상대는 잠시 뜸을 들이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저쪽도 무전이 끊기는 걸 바라지는 않았는지,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를 냈다.
그렇게 이윽고, 소윤재가 요구했던 대로 지휘관을 연결해 주었다.
『반갑습니다. 부대장 백경연이라고 합니다.』
7.5사단의 사단장인 백경연이었다.
『차귀도에 계신 분이라고요? 마침 저희가 지금 그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는지.』
그 말에 소윤재는 고천수에게 시선을 던졌다.
고천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윤재가 다시 말했다.
“네, 안 그래도 누구든 돕기 위해 무전을 돌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백경인이 안심한 듯 한숨을 흘렸다.
『방법이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을 하던 도중이었습니다.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말투는 자못 신사다웠다.
7.5사단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받아 줄 수도 있을 정도였다.
“일단 배를 댈 수 있는 접안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현재 계신 곳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너무 노출이 잘 되는 곳이라, 저희는 배를 다른 곳으로만 보내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알려 주시면 그쪽으로 병사를 움직이도록 하죠.』
다행히 잘 풀렸다.
소윤재는 이선웅과 눈짓을 주고받고는, 현실성 있게 가장 먼 곳으로 7.5사단을 인도했다.
“거기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용수항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용수항?』
“달리 지도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거기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있는 곳입니다.”
『쉽게 갈 수 있는 곳인가 보군요.』
“그쪽에 도착하면 어업인 복지 센터로 가서 대기해 주세요. 아래층에 편의점이 있는데 아직 남은 게 많아서 요기를 때우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소윤재가 워낙 상세하게 안내를 해서인지 백경연은 의심을 품지 않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그쪽에서 뵙죠.』
툭.
무전이 그대로 종료됐다.
“된 걸까요?”
“훌륭했습니다.”
소윤재의 물음에 고천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제 저희가 차귀도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겠군요.”
고천수는 차귀도 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그가 만남을 기대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