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나, 강림
탑의 1층 복도.
그곳에는 출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제기랄. 이거 열리긴 하는 거야?”
“괜히 들어왔어. 가짜 탑에 속아가지고.”
“배고파…….”
한 번 닫힌 문은 사흘 가까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식량은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그나마 동굴과도 같은 복도에 고이는 물이 없었다면, 진즉에 서로를 죽이고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우리가 속은 걸까?”
“그럴지도. 애초에 외국인 관리자라니 뭔가 수상했잖아.”
“제나? 난 서울에서 같이 내려왔는데, 걔는 이미 교주 눈 밖에 나 있었어.”
정신력이 한계에 몰린 사람들은 이제 분풀이할 대상이 필요했다.
“이미 교주 눈 밖에 나 있었다고? 근데 넌 여기 왜 온 거야.”
“그냥 짐만 같이 옮겨 주는 줄 알았지. 나도 갈 길이 끊길 줄은…….”
“근데 탑은 나타나서 뛰어 들어왔던 거고? 좀 수상하다고 해 주지, 다 같이 죽게 생겼네.”
1층 초원에는 뭐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여기서 이탈했다가 탑의 출구가 열렸다 닫혀 버리면 낭패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다시 이쪽으로 오기만 해 봐, 제나.”
“우리를 속인 죗값을 치르게 할 거야.”
사람들은 이곳에 없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만 불태우고 있었다.
그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탁탁탁.
모두가 다시 침묵에 빠졌을 때였다.
복도 끝에서 들리는 걸음소리에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탁탁. 탁탁탁.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쪽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설마…….”
“그년 아냐?”
“지도 나가고는 싶어서 돌아온 건가?”
굶고 분노한 사람들에게 제나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횃불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그녀는 곧장 붙잡혀 사정없이 얻어맞을 수도 있었다.
탁, 탁.
걸음소리가 느려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앞에, 정말로 그녀가 나타났다.
“뭐야!”
“진짜 그년이잖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나를 붙잡을 준비를 했다.
“네가 무슨 낯짝으로 여길 와!”
“우릴 속였지? 2층에서 다른 사람 공격하는 거 봤어!”
“우리를 관리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던 거잖아!”
제나는 우뚝 멈춰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공격할 듯했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탑이 무너질 때부터 이렇게 될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신도들 중에 이성적인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뭐 해! 다들 잡아!”
하지만 알았다고 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곳에 몰려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수 백 명.
그 중 10%만 달려들어도 그녀가 상대할 수는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스스스스.
순간 그녀의 등 뒤로 몰려오는 안개를 보고 사람들이 순간 흠칫했다.
“뭐, 뭐야.”
“웬 안개가…….”
먼저 그녀의 뒤에 모습을 드러낸 건 고천수였다.
“음?”
사람들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는 사이, 휴와 흑구도 나타났다.
흑구는 뒤쪽에서 나타났으면서도 금방 앞으로 나와 사람들 앞에 이빨을 드러냈다.
으르르르.
그런 흑구를 보며 사람들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저, 저 개새끼가!”
“지금 우리를 위협하기라도 하는 거야?”
“아니.”
그런 그들을 보며 고천수가 답했다.
“아직 위협은 하지도 않았는데.”
“뭐?”
물음표를 그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고천수는 뒤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람들이 예상하지도 못했던 존재가 이 자리에 나타났다.
크우우우우.
거적때기를 두른 해골.
거대한 낫을 든 채 붉은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는 그 모습은 분명 인외의 것이었다.
“저, 저건……!”
게다가 그 해골은 한 번도 다른 이에게 알려진 적이 없는 몬스터였다.
아무런 몬스터가 없던 탑에서 나타나기도 한 만큼, 모여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물러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 몬스터!”
“몬스터다!”
“으아아악!”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뛰어갔다.
“도, 도망쳐!”
“살려 줘!”
순식간에 어수선해진 광경을 보면서 고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피할 곳도 없을 텐데.”
그의 말대로 사람들은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고천수 일행이 있는 곳에서 반대편이라면 출구뿐이었다.
쾅!
하지만 출구는 아직도 닫혀 있었다.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쾅! 쾅!
“열어 줘!”
“몬스터가 나타났어!”
“저리 비켜!”
문을 두드리는 사람, 그리고 최대한 출구 쪽에 붙으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아비규환이 연출됐다.
“그만하지.”
고천수는 그런 그들에게 접근하며 한 마디 했다.
하지만 워낙 많은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소리를 지르는지라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가 닿지는 않았다.
-천수 무시당함. ㅋㅋㅋㅋ
-개쪽. ㅋㅋㅋ
채팅창이 불타올랐지만 고천수는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해골, 한도초과에게 말했다.
“형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좋다. 맡겨 둬라.”
한도초과는 고천수 일행의 앞질러가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으, 으아아아!”
“살려 줘!”
“오지 마아아아!”
그러자 사람들이 기겁하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조용.”
한도초과는 그런 그들을 향해 한 마디를 흘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한도초과의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우왕좌왕해 댔다.
“조용!”
콰아아아아.
열이 오른 한도초과가 크게 내지르자 그 외침이 천둥처럼 복도에 쏘아졌다.
비명을 지르며 저마다 난리가 나 있던 사람들은 움찔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뭐, 뭐지?”
“방금 몬스터가 말을…….”
경악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 사이를 거닐며 한도초과가 말했다.
“내 탑에 들어온 것에도 모자라 소란스럽기까지 하구나.”
탑의 주인.
한도초과는 그렇게 자처하며 낫을 허공에 휘둘렀다.
“단죄라도 받고 싶은 것이냐? 그렇다면 먼저 내 앞으로 나서도 좋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마른침만 삼킬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일단 말해 두겠다. 너희는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
“너희는 탑의 주인인 내게 인사를 하지 않고 마음대로 이곳에 침입했다. 누가 너희들이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을 해 주었더냐?”
둘째.
“탑이 가짜라서 무너진 게 아니라 너희가 용도를 몰랐던 것이다. 이곳은 훈련장. 나약한 자들이 진짜 탑에 오르기 전에 정신 무장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란 말이다.”
사실과 거짓의 적당한 조화.
그럴 듯한 이야기와 압도적인 분위기에 사람들은 이제 다른 방향의 두려움을 갖게 된 듯했다.
“그, 그럼…….”
“다, 당신은 탑의 수호자?”
“수호?”
한도초과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듣고 말하는 것이지?”
“교, 교주님이 말씀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수호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에 한도초과가 고천수를 돌아보았다.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적당히 말해 놨었나 보네.’
교주도 탑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는 것은 탑에 대한 전반적이고 대략적인 지식일 터.
한도초과가 교주가 그런 말을 지껄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거고, 지금 쳐다보는 건 그저 고천수가 어떤 방향을 원하는지 묻고 있는 것이리라.
끄덕.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주자 한도초과는 다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런 식으로 탑을 어지럽혔다는 말이냐?”
“죄, 죄송합니다!”
“탑에 들어올 때 아무것도 안 보여서……!”
시야가 가려져 있는 사람은 단순해지기 마련이었다.
몇 사람이 한도초과 앞에서 교주의 말을 언급하며 쩔쩔매자, 나머지도 똑같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다시 한번 탑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시길!”
한도초과를 피했던 사람들은, 이제는 도리어 한도초과 앞에 모여서 엎드려 절을 했다.
“용서라니, 이미 너희의 잘못으로 탑은 무너졌다.”
한도초과는 그들을 탓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너희를 잘못 이끌었던 자가 있는 것이겠지. 내가 공인한 자는 한 명뿐. 그 자의 말을 들어야만 한다.”
“예?”
사람들이 고개를 치켜들고 물었다.
“그, 그게 누구입니까.”
“교주님이 아닙니까?”
한도초과는 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러고는 팔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아……?”
“저건…….”
고천수였다.
“저자가 공인된 자라는 말입니까?”
“그래. 이름은 고천수. 나를 만나려고 제대로 된 방식으로 노력한 유일한 사람이다.”
한도초과는 고천수의 위치를 곧장 확정해 주었다.
“고작 훈련장에서조차 실패한 너희들이 다음 탑으로 가려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사람들은 모두 고천수를 쳐다보았다.
딱히 고천수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쿠궁.
지면의 울림이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그쪽으로 향했다.
“문이 열렸다. 이제 다들 재시험을 위해 움직여라.”
***
“…….”
“…….”
“…….”
문이 열리고 탈출이 끝나고 난 뒤, 사람들은 모두 말없이 고천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 이런 기분이었나?’
고천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사람들을 살짝 둘러보았다.
경외심을 느끼는지 아니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지 모를 그들은 고천수의 눈짓 한 번에도 움찔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탑의 문이 열리는 시간이 딱 맞았다.
한도초과는 자신이 문을 부숴 주면 그만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건 솔직히 말해서 모양 빠지는 일이지 않은가.
“저, 천수 님. 그 분은…….”
“쉿.”
한도초과는 뒤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고천수는 손가락을 검지에 올렸다.
“굳이 지금 얘기하지 마라.”
사람들의 관심은 고천수에게 쏠려 있는 상태였다.
다시 한도초과를 상기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한도초과는 거기 남아 있어야 해.’
주목도 때문에도 그렇지만, 빙의란 게 한도 끝도 없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고천수가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는 한도초과가 쉐도우의 몸을 붙잡고 있어 줘야만 했다.
‘나중에 적절한 보상은 해 줘야겠네.’
이렇게나 굴려 먹으면서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면 한도초과라고 해도 기분이 상할 우려가 있었다.
한도초과의 말에 따르면 사람 빙의는 악역 NPC와 플레이어를 제외한 대상에게만, 몬스터 빙의는 자아가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놈한테만 가능하다고 했다.
이때 기계적인 몬스터에 빙의하는 건 그녀로서도 시스템과 불협화음을 내는 기분이라 불쾌감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그 와중에 지금은 그 빙의 때문에 채팅창에 복귀하지도 못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거라도 물어봐야 하나.’
한도초과가 원하는 거라면 뭔가 제법 곤란할 듯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니, 주변으로 다가오는 자들이 좀 보였다.
모두 탑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있는 자들이었다.
‘탑에 못 들어왔던 사람들인가?’
며칠이 지난 만큼 백경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그대로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군인들…….’
하지만 이곳에도 군인들은 있었다. 7.5사단이 아니라 디엔드를 택한 자들일 것이었다.
“이봐, 안에서 뭔 일이…….”
그렇게 묻는 그들에게, 탑에서 나온 자들이 달라붙어 뭐라고 속닥거렸다.
“아아!”
그러자 그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고 고천수는 속으로 미소를 그렸다.
‘됐다.’
제주도가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면 고천수는 향후 앞날을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스킬과 능력이 있다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타파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게…….’
바로 세력.
굳이 영구적인 세력까지도 필요 없었다.
고천수는 자신을 위해 나서 줄 부나방들이 필요했다.
“제나.”
“네.”
“관리자로 얼마나 오래 있었냐?”
고천수의 물음에 제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10살이 넘어서부터는 계속 이 일을 해 왔습니다.”
“그래.”
그런 것치고는 장악력이 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와 보좌 능력은 분명 쓸 만할 터였다.
“그럼 도움 좀 받자.”
“네! 얼마든지!”
제나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나나 여기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나, 원래 고천수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제나, 여기에 있는 사람들 수부터 파악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