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34화 (134/224)

134. 광신도 (6)

시계에 적힌 시간은 탑을 올라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함정이었다.

“내려가야 돼, 얼른!”

고천수는 서둘러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고천수님?”

“고천수!”

왈!

일행들이 놀란 듯 외쳤지만 고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시간이 없다고……!’

시계의 흘러가는 시간은 고천수에게만 적용됐다.

다른 일행들은 늦게 오건 말건 지금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탑을 올라가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을 인지했으면서도, 탑이면 일단 올라가야 한다는 선입견 때문에 일을 망쳐 버렸다.

-지금 내려가면 시간이 얼마나 남지?

-필요한 만큼 남을지는 모르겠네.

-흐음. ㅋㅋㅋ

여유로운 시청자들의 반응에 고천수는 표정을 구겼다.

“형님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언질을 해 줬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 됐다.

“체험판용으로 다 쓰라고 시간을 준 건 아닐 테고……!”

위층을 올라가 봤자 미리 볼 수 있는 지형지물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다.

즉, 이 시간은 원래 다른 용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빠져나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않아?

-그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진 마셈.

-맞아맞아.

빠져나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시청자들도 그 점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필수는 아닌 거구나.’

이 탑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챙겨야 하는 물건은 아니라서 이런 반응을 보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시청자들의 관심사는 제나에서 끝났던 것이다.

‘안 되지.’

반드시 얻어야 할 건 아니라고 해도,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뭔가는 결코 사사로운 것이 아닐 터였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공을 들인 탑을 만들어냈을 리도 없었다.

“으으으아아!”

마침내 2층 계단까지 내려와 잠가 놓았던 문을 열고 밀어재낀 고천수는, 아직도 열쇠를 가지고 싸움박질을 하고 있는 많은 신도들을 두 눈에 담았다.

“저리 비켜!”

길까지 막고 있기에 고천수가 주먹을 내지르고 있자니, 뒤에서 쫓아온 제나가 빠르게 달려서 그를 앞질렀다.

퍼억!

그리고 단검을 꺼내 신도들을 찔러서 밀쳐내 버리며 길을 트기 시작했다.

-와 씨, 뭐야.

-ㅋㅋㅋㅋㅋㅋ

-같은 디엔드 아니었음?

고천수도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으려니, 제나가 얼굴에 튄 피를 슥 닦으며 단검으로 길을 가리켰다.

“천수님! 얼른 가세요!”

이걸 고마워 해야 할지.

일단 시간은 없었기에 고천수는 그녀가 터 준 길로 빠르게 내달렸다.

“도차악!”

00:48:37

그렇게 시간을 멈춰 세우며 고천수는 마침내 1층 초원에 내려섰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고르며 고천수가 무릎을 짚고 서 있자니, 뒤늦게 따라온 제나가 다가와 물었다.

“고천수 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지 않았다.

“아, 힘들어.”

몸이 힘들다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좀 많이 받았다. 강화된 신체는 사실 이 정도로 버벅이진 않았다.

“후.”

한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몸에 묻은 피로감을 털어낸 고천수는 넓게 펼쳐진 초원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역시.’

바위들에는 각각 시계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줄 알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1층에 답이 있던 거냐고.’

이 탑은 미완성이었다.

완전본의 체험판 같은 곳.

다만 너무 많은 것을 알아가면 안 되는지, 직접 답사를 해 볼 수 있는 시간은 짧게 제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제한된 것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흐읍!”

고천수는 바로 앞에 있는 바위를 밀어 보기 시작했다.

“흐아압!”

쿠구구.

원래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크기겠지만, 희한하게도 고천수의 몸에 바위가 밀려나갔다.

쿵.

“헉, 휴우.”

고천수는 땀을 닦으며 바위 아래 감추어져 있던 붉은색 종이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꽝.

-ㅋㅋㅋㅋㅋㅋ

-아.

-안 돼. 이러면 천수가…….

고천수는 비어 있는 종이상자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미동도 없이.

콰득!

그러다가 손에 힘을 줘 종이상자를 구겨 버린 고천수는 다른 바위들로 시선을 돌렸다.

00:43:37

무려 5분이나 깎여 나간 시간이 그 바위들에 표시되고 있었다.

‘아, 망할.’

이 바위들은 5분의 시간을 먹고 뭔가를 얻을 기회를 주는 일종의 뽑기였던 것이다.

‘시간을 너무 많이 썼잖아.’

일단 탑이니까 올라가 봐야 한다는 조급함 때문에 쓸데없는 시간을 버려 버렸다.

‘아니, 쓸데없지는 않았지만.’

완성본인 탑을 만나게 되면 분명 미리 익혀 둔 저층부의 내용은 도움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당장 짜증나는 기분이 드는 건 고천수도 어쩔 수 없었다.

‘배분을 잘못 한 것 같단 말이지.’

유일하게 시간이 멈춰 있는 1층의 초원, 그리고 각각 시계가 박혀 있던 이 바위들에 뭔가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진즉에 눈치챘다면, 무작정 위로 올라가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바위에서 전부 꽝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시간을 들여서 위라도 탐사한 게 결과적으로 나았다.

벌써부터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스스로를 책망할 필요는 없었다.

“으으으으!”

고천수가 바위 하나를 더 밀고 있자니, 이번엔 제나가 다가와 힘을 보태 주었다.

“저도 함께 밀겠습니다.”

둘이 같이 밀자 바위는 더 빨리 밀렸다.

00:38:37

시간은 이제 30분대로 줄었다.

고천수는 바위 아래에 있던 붉은색 상자를 꺼내 열어 보았다.

꽝.

“아, 씁!”

고천수는 상자를 내던지고 제나를 바라보았다.

‘얘 능력도 지금은 쓸 데가 없고.’

웃기게도 위의 층들을 겪고 돌아오면서 제나의 활용법이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볼 생각 하지 마. 다른 사람한테 네가 본 걸 말할 생각도 하지 말고.”

일단 제나가 휴한테 엄한 소리라도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다행히도 제나는 고천수의 지시에 순응적이었다.

“형님들, 얘 뭐 노리고 저한테 이러는 거 아니죠?”

다만 처음과 비교하면 고천수는 그녀의 성격 변화가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노리는 게 없진 않겠지.

-제나도 구원에 미쳐 있으니까.

-원래 솔플인데 네가 말도 안 되는 걸 보여 줬잖아. 제나가 어떻게 생각하겠음?

고천수는 채팅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나가 본 것.

그건 바로 이 채팅창일 것이었다.

‘돌겠네.’

자신을 주시하는 제나를 보며 고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야 고천수는 광신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위층에 있는 신도들처럼 서로를 밀치고 물어뜯어야만 광신도가 되는 게 아니었다.

구원의 징표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앞뒤의 일은 바로 다 날려 버리고 이렇게 곧장 누군가에게 종속되는 게, ‘진짜’였던 것이다.

왈!

늦게 내려온 흑구가 고천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천수.”

그 뒤를 따라온 휴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지금 내려오냐?”

고천수가 묻자 휴는 어깨를 으쓱했다.

“다른 사람들이 엉겨 붙길래. 네 개도 다른 사람들한테 깔렸는데 몰랐냐?”

몰랐다.

“깔렸으면 소리라도 지르지 그랬냐.”

고천수가 말하자 흑구가 눈썹을 치켜떴다.

-겁나게 소리 질렀다는 뜻임. ㅋㅋㅋㅋ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소리가 어떻게 들리냐.

-네가 챙겼어야지.

“하. 인정합니다.”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다른 바위로 향했다.

“휴! 너도 와서 도와!”

흑구한테까지 도우라고는 못하겠지만, 휴는 충분히 손을 거들 수 있었다.

“뭔데?”

“바위 좀 같이 옮겨. 안에서 찾을 게 있으니까.”

“집안 인테리어 꾸미기 같은 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천수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옮긴다.”

고천수가 앞에 있는 바위를 잡자 휴와 제나도 손을 보탰다.

왈!

흑구는 버프라도 주듯이 옆에서 고개를 흔들며 들썩거렸다.

-흑구 이거 티배깅 아니냐? ㅋㅋ

-일해라, 주인아!

-엌ㅋㅋㅋㅋㅋ

“끄으응.”

대응하지 않고 그대로 힘을 준 고천수는 또 하나의 바위를 밀어내고 새로운 붉은색 상자를 찾았다.

꽝.

“아아아아아!”

00:33:37

고천수는 머리를 쥐어 잡았다.

“제기랄!”

금쪽같은 시간이 날아갔다.

“뭐야. 안 좋은 거 나온 거야?”

“그래.”

휴의 물음에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시간은 30분 남짓.’

이 초원에서 탑의 입구까지 가는 동안 시간이 또 흐른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바위를 열어 볼 수 있는 횟수는 이제 6번이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미리 알았다면……!’

횟수를 약간이나마 더 늘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천수야, 이거 랜덤박스 같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고천수는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아냐. 큰일 날 뻔했네.’

미리부터 알았다면 시간을 여기에 전부 쏟아 부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시청자의 말대로 이건 랜덤박스와 같았다.

뭐가 나올지 모르면 본인이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자꾸만 열어보게 되어 있었다. 잘못하면 시간을 도박에 날리듯이 쓸 수도 있는 것이었다.

“다음!”

고천수는 일행과 함께 바위를 또 열었다.

꽝.

남은 기회는 5번.

이번엔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바위를 열었다.

꽝.

기회는 4번.

꽝, 꽝, 그리고…….

“꽝!”

고천수는 상자를 내던지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제기랄!”

남은 기회는 이제 한 번이었다.

‘뭔가 힌트는 있을 거야.’

고천수는 넓은 초원 위에 수도 없이 박혀 있는 바위들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많은데 2시간으로 찾으라고 뒀을 리 없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것이었다.

‘뭐냐고!’

근데 알 수가 없었다.

‘다 똑같다고!’

2층에서처럼 문고리처럼 돌려보고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문고리를 잡을 기회는 무한히 있으니까.

“아.”

고천수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뜨며 바로 옆에 있는 바위에 손을 짚었다.

“다들 도와!”

휴와 제나가 달라붙었다.

쿠궁.

이번에도 바위는 시원스럽게 옆으로 밀렸다.

00:03:37

고천수는 휴에게 지시했다.

“휴! 이것 좀 들어 봐!”

“응? 내가?”

“얼른!”

고천수가 닦달하자 휴가 붉은색 상자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끙. 뭐야, 이거.”

하지만 휴는 상자를 들지 못했다.

“안 들리는데?”

“그렇구나……!”

고천수는 제나에게도 지시했다.

“제나! 상자를 들어 봐!”

“네.”

하지만 제나도 상자를 들지는 못했다.

덜컥.

고천수는 상자를 꺼내 열어젖혔다.

역시나 꽝이었다.

“알았다……!”

꽝이 나온 상자는 여태까지 전부 붉은색이었다.

당첨인지 아닌지는 색깔로 판별할 수 있다고 한다면…….

“휴, 그리고 제나.”

이 둘에게 일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각각 나 대신 바위를 옮겨서 상자를 찾아 줘.”

고천수가 바위를 움직이면 시간이 떨어진다.

상자는 고천수가 반드시 습득해야 하는 시스템이었지만, 노동은 본인이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상자하고 색깔이 다른 것만 찾으면 돼.”

“저기, 천수야?”

휴는 초원 위에 널린 바위들을 내다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바위가 몇 개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적어도 수백 개. 혹은 그 이상이었다.

“도와줄 수는 있는데 한 스무 개 정도만 할게. 여기서 너무 힘을 빼면 말이야. 다른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어지거든.”

여태 웃기기만 했던 놈이 제법 섬뜩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그게 휴의 본질이었다.

고천수는 제나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알게 된 녀석인데…….’

과연 지시대로 해 줄 것인가.

“하겠습니다.”

제나는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을 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뭔데.”

고천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묻자 제나가 담담히 답했다.

“한 번만 더 천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엿보기. 제나는 잠깐밖에 보지 못했던 존재들을, 더 확실히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좋아.”

여기서 빼면 손해 보는 건 고천수였다.

“대신 너도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증명해야 될 거야.”

이때까지만 해도 고천수는 그녀가 하게 될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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