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광신도 (2)
쿠웅.
갑자기 지면이 미친 듯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땅이……!”
“지진인가?!”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 와중에 고천수만 침착한 표정으로 주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정답이었다.’
열쇠는 탑을 불러들이는 도구가 맞았다.
다만 어떤 형태로 탑이 등장하는지는 아직 고천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면이 흔들리는 것을 보니 탑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지는 대략적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왈! 왈왈!
옆에 서 있던 흑구가 고천수를 돌아보며 짖어댔다.
“왜? 위험해?”
탑이 나타난다면 열쇠를 꽂는 자리를 피해서 나타나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
왈왈!
흑구는 그게 아니라는 듯 고천수의 팔을 붙잡고 끌어댔다.
“아, 오케이.”
흑구가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고천수는 흑구와 함께 열쇠를 꽂은 문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둘이 말이 잘 통하네.
-친구 먹은 듯.
콰앙!
그사이, 지면에서 무언가가 땅을 파고 올라왔다.
“우왓!”“으아아악!”
“피해!”
건축물이었다.
검은 벽돌로 된 탑이 땅을 부수고 올라오고 있었다.
“야, 흑구야!”
열쇠가 있던 곳은 진즉에 사라졌다.
땅이 무너지며 바로 뒤로 절벽이 생기는 것을 돌아보면서 고천수는 흑구에게 급하게 소리쳤다.
“나 좀 태워 줘!”
타다다닥!
흑구는 오히려 속도를 내서 누구보다 앞서서 도망갔다.
-ㅋㅋㅋㅋㅋㅋ
-미쳤네.
-그 주인의 그 개.
고천수는 좀 더 속력을 높이며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콰과과과.
조금만 느리면 솟아오르는 탑에 맞거나 땅 밑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우아아아악!”
부우우웅!
그때, 승합차 한 대가 정면에서 나타나 유턴하며 문을 열었다.
“고천수!”
휴였다.
“여기다, 여기!”
“저놈은 왜 또 저기에……!”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여유는 없었다.
고천수는 곧장 차로 달려가 열린 뒷문으로 몸을 날렸다.
부우우웅!
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괜찮으신가요, 고천수 씨?”
그렇게 묻는 운전사는 다름 아닌 정병훈이었다.
“드라이브라도 하던 중이었습니까?”
그렇게 묻던 고천수는 창문 밖에서 익숙한 존재를 발견했다.
왈왈!
“어유, 저 망할 놈.”
이제 와서 차를 태워 달라고 하는 눈치였다.
“얼른 와, 자식아!”
문은 아직 열려 있었다.
고천수가 손짓하자 흑구는 빠르게 달려와 승합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왈!
품에 안긴 흑구가 혀로 고천수의 얼굴을 핥았다.
-음, 그래, 역시 이 맛이지.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 맛!
하지만 아직 태울 사람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저기! 저기 저 사람!”
금발 벽안의 여자였다.
“꼭 태워야 돼요!”
그녀는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빠른 속도기는 했지만 이대로는 붕괴하는 지반에 먹혀 버릴 것이었다.
“타세요!”
고천수는 여자를 향해 외쳤다.
여자는 고천수를 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타라니까요!”
서로 좋지 못한 첫 만남을 가졌지만 이대로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병훈이 근처로 차를 몰고 가자, 그녀가 고천수가 내민 손을 잡고 승합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콰드드득!
차바퀴가 잠시 절벽 끝에 걸쳤지만 다행히도,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아.”
고천수는 안심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예?”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그녀를 보며 고천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말하려고 살렸어요. 후. 속 시원하네.”
-아니, 이 미친놈. ㅋㅋㅋㅋㅋ
-돌았냐, 진짜?
-대체 어디까지 발전하는 거냐. ㅋㅋㅋ
어이가 없는 건 같이 차에 타고 있는 휴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뭐야, 땅이 무너질 거라고 예견이라도 했어? 이 여자가 안 믿었나?”
그러면서 휴는 아리송한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살리는 건 별로 안 좋은 선택 같은데.”
휴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고천수는 쓸데없는 이유 때문에 그녀를 구한 건 아니었다.
‘중요한 인물인 거잖아.’
시청자들이 이 여자를 발견하고 보인 반응은 예사롭지 않았다.
중요한 역할로 쓰임새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첫 만남이 매끄럽지 않았다고 해서 그대로 비명횡사하게 놔둘 수는 없던 것이다.
“…….”
구해 줬음에도 그녀는 고천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는커녕 그냥 멍한 표정이나 짓고 있었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거려니 생각하며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쿠구궁.
이제 지면의 울림도 잦아들고 있었다.
치솟던 먼지가 점점 걷히며 드러나는 탑의 위용에 고천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야,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잠실에 있는 타워를 몇 개는 합쳐놓은 듯한 크기.
높이가 조금 낮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굉장한 위압감을 가진 것만큼은 분명했다.
“저게 뭐야.”
“세상에.”
정병훈과 휴가 탑을 확인하고 각각 놀란 표정을 지었다.
“탑…….”
뒤늦게야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다만 그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꽤나 놀란 듯하기는 했다.
‘알고 있던 나도 놀랐으니.’
탑이 나타날 거라는 건 예측했지만 실물로 보니 감상이 남달랐다.
-이제 저거 올라가야 하는 건가?
-엄청난데.
-입구부터 장난 아닐 듯.
탑은 판타지 세계에 나오는 어둠의 탑처럼 왠지 모를 음산함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디엔드가 생각하는 구원의 탑이 맞을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촤아아아.
빛줄기가 사라지고, 대신 탑 주위에는 옅은 안개가 깔렸다.
“도, 도와줘.”
“크윽.”
“아파…….”
정병훈이 차를 세우자 주위에 고통에 신음하는 많은 사람이 보였다.
지반이 무너짐과 동시에 탑이 튀어 오르는 바람에 날아온 돌들에 맞은 부상자도 많은 듯했다.
‘음.’
고천수는 옆에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디엔드의 관리자인 그녀는 웃기게도, 다른 신도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했다.
“타, 탑이야!”
“탑이다!”
“구원의 탑이 나타났다!”
그리고 부상을 당한 이들과 다르게, 자신들이 기다리던 탑이 나타났음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신도들도 있었다.
“가, 가자!”
“내가 먼저야!”
“저리 비켜!”
그들은 서로를 밀치며 앞 다투어 달려 나갔다.
탁.
여자도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는지, 바로 차에서 내려 탑을 향해 뛰쳐나갔다.
“다들 요란하네.”
고천수는 차에서 내리며 정병훈에게 물었다.
“정병훈 씨는 저런 거에 관심 없죠?”
“예. 엄청나게 위험해 보이네요.”
아무래도 정병훈은 같이 가지 못할 듯했다.
“나는?”
휴가 고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아.”
고천수가 한숨을 쉬자 휴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뭐지? 설마 나랑 같이 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그럼 좋겠냐.”
이왕이면 좀 더 멀쩡한 놈이랑 가면 좋을 텐데, 이놈이 그냥 자기 취향에 맞아서 자신에게 달라붙는다고 생각하니 고천수는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따라오려면 맘대로 해.”
고천수는 흑구와 함께 자리에서 내려 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형님들, 저 탑 진짜 선착순입니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시청자들의 반응이 너무 얌전했다.
-뭐, 사실 선착순은 아니지.
-가 보기만 해도 알 거임, 너라면.
-너무 조급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너무 늦지도 마.
부우우웅.
고천수가 걸어가고 있으려니 차 한 대가 근처에 와 섰다.
거기에서 내린 것은 다름 아닌 백경연이었다.
“이럴 수가.”
그는 진짜 탑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진짜로 나타나다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일단 탑이 나타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다, 다들 수색해! 탑에 대해서 조사해라!”
주위에 있던 군인들의 그의 명령을 듣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탑은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이야, 이러다가 꼴등하겠네.”
좀 더 서두르는 게 좋겠지만, 고천수는 뭔가 약간 이상한 불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뭐지, 대체.”
설명할 수는 없어서 묘한 표정이나 짓고 있자니, 옆으로 휴가 따라붙었다.
“역시 날 데리고 가지 않으니까 찝찝해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거지?”
“아, 미친.”
“조심하라고 고천수.”
휴는 키득거리면서 고천수에게 말했다.
“그 여자, 딱 봐도 감이 안 좋아.”
“무슨 감.”
“살인마로서의 촉이 딱.”
휴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런 게 느껴졌거든.”
“느끼긴 뭘 느껴.”
그렇게 말하면서도 고천수는 눈썹을 치켜떴다.
‘아 씨, 또 그런 쪽인가?’
휴는 살인마를 잡는 살인마라고 했다.
헛소리처럼 들릴지라도 휴의 말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형님들, 살인마를 저랑 엮어 주려고 하는 거면 진짜 그건 섭섭할 겁니다.”
-ㅋㅋㅋㅋㅋ 또 뭐가 섭섭해.
-아니, 너한테 득만 되면 되는 거 아냐?
-맞아맞아.
“잘 때 저한테 칼 꽂을 사람만 아니면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휴와 달리 그 여자는 고천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휴와는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칼은 안 꽂을 걸.
-근데 머. ㅋㅋㅋㅋㅋ
-평범하지는 않을 거야.
재미 들린 듯 시청자들은 고천수를 놀려대기만 했다.
“예. 그렇게들 하십쇼.”
당장은 탑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음.”
길을 걷던 고천수는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배낭을 하나 주워, 노동자 신도들이 바닥에 떨어뜨려 놓은 간식이나 물병을 챙겨서 집어넣었다.
혹시라도 살펴보러 들어갔다가 갇힐 때를 대비해서였다.
“내가 먼저!”
“아냐, 내가 먼저야!”
“비켜어어!”
신도들은 같은 종교를 믿고 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밀치며 탑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네.”
고천수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탑의 입구를 살펴보았다.
무슨 고성의 입구라도 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후.”
숨을 한 번 몰아쉬고 고천수는 사람들을 따라 탑의 입구로 들어갔다.
휘이이잉.
분명 내부인데도 서늘함이 느껴졌다.
저 멀리 먼저 뛰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고천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은 괜찮은 것 같은데…….’
함정은 없는지 앞서나간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몬스터의 기척도 전혀 없었다.
‘묘하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시련을 줄 것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왈!
그때, 먼저 달려간 흑구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고천수. 저기 뭐가 있는 것 같은데?”
옆에서 휴가 거들었다.
고천수는 흑구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 뭐가 있길래……. 음?”
중얼거리던 고천수는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웬 전자시계를 발견했다.
“뭐야.”
거기에는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01:58:03
뭘 표시하나 싶었던 고천수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01:58:02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다.
“카운트다운……!”
뭔가 실행되기 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2시간 안에 올라가라는 뜻임?
-글쎄.
-흐음~. ㅋㅋ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탑이 아직 얌전한 걸 보니 무슨 시간을 나타내는 건지는 고천수도 알 듯했다.
‘이 시간이 지나면 탑의 위협이 시작된다는 거겠지.’
문제는 그 안에 올라가라는 것인지 다른 무언가를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형님들, 문제가 좀 어려운데, 일단 탑 위로는 올라가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은 가 보길 추천함.
-너라면 알 수 있을 거야. 가다 보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는 그 재미로 볼 거라서.
일단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은 안내받았다.
고천수는 그대로 탑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흑구야, 가자.”
고천수가 흑구만 데리고 가자 휴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위험하니까 나도 같이 가야지.”
“그럼 뒤따라 붙지 말고 네가 좀 앞서가 봐.”
고천수는 횃불만이 주변이 밝히는 어두운 앞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신도들은 안전한지 좀 보고.”
“뭐, 그래.”
웃기게도 휴는 거부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안 보일 만큼 빨리 가라는 건 아니었는데.”
-여차하면 고기방패로 삼을 거였는데.
-눈치 못 채고 완전 멀리 가 버리네.
-ㅋㅋㅋㅋㅋ
그러려는 건 아니었다.
01:54:01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불안하네.’
아직 탑에서는 뭔가 나타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갖고 계속 걷고 있으려니, 고천수의 눈앞에 순간 푸른 초원이 갑자기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