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성역 (5)
그렇게 고천수가 돌아가고 난 뒤, 백경연은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후.”
백경연은 예상과는 좀 달랐던 고천수의 태도에 살짝 알 수 없는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대전에서부터 여기까지 살아온 기개가 있는 건가?”
평범한 사람이면 군인들의 도움 없이 거기서 여기까지 온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이곳에 모여 있는 인원도 원래 제주도에 있었거나 7.5사단이 데려온 사람이 전부였다.
“역시 물어보는 게 좋았을지 모르겠군.”
백경연은 고천수에게 대전의 상황을 물어보려고 했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나서 금방 이곳에 틀어박혔던 백경연은 자신의 부하들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잘 알지 못했다.
7.5사단의 인원 중에 이곳 뉴타운에 들어온 수는 전체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둘 중 하나였다.
죽었거나 임무를 망각하고 일탈을 하고 있는 중이거나.
“넌 어떻게 생각하지?”
백경연은 옆에 서 있는 군인에게 물었다.
“돌아오지 않는 녀석들은 어디로 간 것 같나.”
“…….”
군인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래,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거겠지.”
백경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몇 놈은 서울에 갔을 거라고.”
백경연이 안전지대로 삼은 것은 바로 이 제주도였다.
당연하게도 7.5사단의 전병력을 움직여 사람들을 이곳에 피신시키려 했었다. 그게 그가 생각했던 첫 번째 재건 계획이었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제기랄.”
사람들을 제주도로 끌어 모으는 와중에 제주도보다는 다른 곳이 안전할 수 있다는 제보가 몇 들어왔다.
서울이나 백두산 부근에 이상하게 몬스터가 잘 모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제주도가 제일 안전할 텐데.”
몬스터의 먹이가 제일 많을 수밖에 없는 서울이 제주도보다 안전하다는 건 딱 보기에 그냥 개소리였다.
백두산은 군대를 끌고 가는 것부터가 다른 나라들과 충돌을 일으킬 수 있는 일이었다.
국가를 재건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제주도만 한 곳이 없었다.
“그 남자에게 확실하게 다시 묻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군인이 입을 열고 백경연에게 조언했다.
“물으면 좋긴 하겠지.”
하지만 백경연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아.”
고천수는 대전에서 제주도로 온갖 위험을 뚫고 내려왔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사내였다. 그런 남자가 다른 곳 대신 자신이 만든 뉴타운에 찾아왔다는 것이, 백경연은 무척 마음에 들고 만 것이었다.
“굳이 쓸데없는 걸 물어서 그 남자를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
고천수는 백경연에게 트로피와 마찬가지였다.
괜히 그의 마음에 의구심을 심어 넣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성역’으로도 불린다는 점이었다.
좀 예민하게 굴긴 했지만 백경연도 그 성역이라는 개념을 배제할 수만은 없었다.
‘망할 종교쟁이들 같으니.’
뉴타운의 결속력을 다지는 것에는 사람들의 환심을 살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탑에 대한 신망은, 백경연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고천수.’
백경연은 한숨을 흘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 병솔로 삼기에도 괜찮은지, 어디 한번 보자고.’
***
“에취!”
호텔 방.
고천수는 기침을 하며 채팅방을 바라보았다.
“형님들, 누가 제 얘기 하나 봐요. 기침이 나오네요.”
-귀가 간지러워야 얘기하는 거 아님?
-자의식 과잉임.
-네가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아는 것?
“주인공 맞잖아요. 플레이어면.”
고천수는 침대에 늘어진 채로 한숨을 내쉬었다.
‘적응 안 돼.’
편안해서 좋긴 한데, 마음이 그렇게 안정적이진 않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으으음.”
옆에서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누가 갖다 놓은 다른 침대에 송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세상 참 편하게 사네.”
왈!
홀로 현관문을 지키고 있던 흑구가 고개를 치켜들고 짖어 보였다.
왈왈!
누가 밖에 서 있기라도 한 걸까.
고천수가 몸을 일으키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세요.”
고천수가 걸음을 옮겨 인터폰을 들고 묻자, 밖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룸서비스입니다. 식사를 가져왔어요.』
“룸서비스?”
그런 걸 시킨 기억은 없었다.
“저 녀석인가…….”
초인종 소리에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 송하나가 뭐라도 시켜 놓은 듯했다.
‘그래, 배라도 채워야지.’
아직 이곳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고민만 하고 있을 바에는 힘이라도 비축해 두는 게 나을 듯했다.
덜컥.
그렇게 문을 열어 주자 직원처럼 차려입은 여성 두 명이 밀차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들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해 주고는 말했다.
“자, 다 됐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들이 다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점에 있었다.
“……뭡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그녀들은 활짝 웃어보였다.
“저희는 고천수 씨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심부름을 맡아 드리려고 합니다.”
“편안하게 식사하세요.”
편안한 식사.
말도 안 되는 소리에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나가 주시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편안하게 식사를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거랑 엮였네.’
이름까지 알고 있던 걸 보면 백경연이 보냈나 싶어 고천수는 그녀들을 내보내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네, 그럼 잘 먹을 테니까 그냥 거기 얌전히 서 계세요.”
고천수는 그러면서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쩔긴 하네.’
여태까지는 배고플 때마다 가방에 있던 통조림이나 과자를 조금씩 까 먹었던 터다.
하지만 지금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건, 정말 호텔식 요리 그 자체.
숟가락을 들어 스프부터 입에 떠민 고천수는 불편한 상황이고 뭐고 간에 탄식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고작 스프인데도 맛이 굉장히 좋았다.
달그락.
고천수가 손을 내미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 번 입에 음식을 밀어 넣기 시작한 고천수가 멈추는 일은 없었다. 옆에서 흑구가 와서 혀를 낼름거리는데도 고천수는 계속 숟가락으로 음식을 퍼 올렸다.
“흑구 너는 사람 음식 먹으면 안 돼.”
-ㅋㅋㅋㅋ
-하나도 안 주려고.
애잔한 눈빛을 보내는 흑구와 시청자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식사하던 고천수는, 여태 그냥 서 있기만 하던 여자들 중 푸른 머리띠를 한 쪽이 품에서 뭘 꺼내는 걸 목격했다.
“저, 고천수 씨.”
여자는 고천수에게 웬 종이 한 장과 탑 모양의 목걸이를 하나 내밀었다.
“……!”
고천수가 놀라며 숟가락을 내려놓자, 여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당황하진 마시고요. 저희는 그냥 좋은 얘기를 전하러 온 것뿐이니까요.”
“아, 쉣.”
포교 활동이었다.
고천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 여기가 어딘지도 잘 모릅니다. 포교하지 마세요.”
“딱히 포교는 아닙니다.”
여자는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라는 듯 말했다.
“저희 디엔드에서 각종 작업에 필요한 역군을 모집 중에 있거든요. 이곳 성역에 당당히 기여 할 수 있는 역할로요.”
쿵.
고천수는 순간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멈칫하며 탄식했다.
“예?”
“아, 역군을 모집 중에 있다는…….”
“아니, 그전에 말한 거요!”
고천수는 급하게 외쳤다.
“그전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희 디엔드에서 각종 작업에 필요한 역군을 모집한다고…… 뭔가 잘못됐나요?”
온화한 표정으로 말하는 여자를 보며 고천수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침음했다.
‘뭐야, 이거.’
디엔드.
처음 장서연을 만났을 때 시장이 기관차를 뒤쫓아 오면서 외쳐 댔던 암호명이었다.
7.5사단의 무언가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봤건만, 지금 이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탁!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고 여자에게서 종이를 낚아채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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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엔드의 역군 모집서.
1. 수색대원
2. 건축공
3. 잡부
* 역할을 수행하시면 탑에 오를 때 은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 역군 지원과 동시에 구원의 탑을 신봉하는 디엔드의 신도로 자동 가입됩니다. 가입 이후에 필요한 역량에서 미달하면 교단에서 퇴출되니 유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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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게 없어 보이지만, 필요한 내용은 다 적혀 있었다.
‘디엔드가 사이비 단체명이었다고?’
이 게임의 초기부터 나왔기에 디엔드는 중요한 단서가 틀림없었다.
그런 중요한 단서가, 생각보다 어설픈 단체의 이름으로 부여되어 있던 것이다.
“마음에 드시는 역할이 있으면 언제든지 참여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종이를 보고 있는 고천수에게 멋대로 계속 말을 붙였다.
“저희가 현재 추천드리는 건 수색대원이에요. 다 같이 열쇠를 하나 찾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제는 너를 이 사이비 단체에 집어넣어야겠다는 듯, 여자가 기다리지 않고 고천수를 자극했다.
“탑의 지반을 다지면서 나온 열쇠 구멍이 있습니다. 분명히 탑에 관련된 거예요. 고천수 씨는 얼른 열쇠를 찾아서 완벽한 탈출로를 찾고 싶지 않나요?”
여자는 확실히 자신이 믿는 것에 심취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저희 디엔드는 어디까지나 구원의 길을 찾는 신도들일 뿐이에요.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교리도, 강요도 존재하지 않아요.”
“…….”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말에도 고천수는 잠시 동안 멍하니 종이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 드신 듯하니까 저희는 일단 물러나겠습니다.”
여자들은 테이블 위에 있던 식기를 치워서 밀차에 실었다.
“혹시 관심 있으시면 저희를 또 찾아 주세요.”
그러더니 그대로 밀차를 밀고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딱히 고천수를 붙잡고 더 떼를 쓴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다.
“으음. 뭐지? 뭐 먹었어?”
뒤늦게 일어난 송하나가 방 안에 남은 냄새를 맡으며 뒷북에 가까운 소리를 늘어놓았다.
왈!
흑구만이 계속 굳은 상태로 있는 고천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
한참이 흐른 뒤에야, 고천수는 경직을 풀고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백경연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는 알 듯했다.
디엔드는 딱히 포교에 열중하지는 않았다. 그냥 이곳조차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역할을 맡김으로써 자기네 단체에 끌어들이는 거였다.
그냥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여했다가, 자기가 들인 시간에 비례해서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구조가 분명했다.
관을 지고 가던 그 남자는 부여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쫓겨났다가 미쳐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왜 그럼.
-단서가 나와서 너한테는 좋은 거 아님?
다만 문제는 바로 그 단서가 너무 적나라하게 고천수에게 주어졌다는 데 있었다.
‘탑, 진짜 있는 거냐고.’
여태까지는 어떤 미치광이 에피소드가 기다리고 있었나 했는데, 이건 예상외의 문제였다.
‘루트가 여기로 잡히면…….’
일단 차귀도로 갈 일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부모님을 놓치는 건 자명하고, 더 큰 문제는 이 게임의 공략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어쩐지 쉬게 해 주더라니!’
7.5사단은 그냥 무대를 가리고 있던 장막이었다. 고천수가 지나왔던 길은 필드, 즉 이동로에 불과했다.
메인 무대는 다른 쪽이었다.
-천수 네가 들고 온 열쇠 찾는 거 아님?
-제주공항에 꼭 필요한 물건이 있을 거랬잖아.
-네가 찾았고.
고천수가 헤맬까 봐 염려가 되는지 시청자들이 친절하게 계속 푸시를 해 주었다.
-솔직히 전반부만 하다가 뒈지는 애들도 많은데.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온 건 정말 대단하다.
-마음 단단히 먹으셈.
“하.”
백경연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겠지만, 선택은 확실히 필요하게 됐다.
“뉴타운이 아니야, 여긴…….”
탑이 나타나면 7.5사단이 만들고 있던 기반은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그때 튀어나오게 되는 게 고천수가 진짜 상대해야 할 대상이었다.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