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성역 (4)
“고천수 씨, 반갑습니다.”
호텔의 어느 객실.
군인의 안내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간 고천수의 눈에, 광장에서 보았던 그 사단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일단 그 앞에 앉으시죠.”
여러 명을 상대하고 있어서일까, 사단장은 잠시 일어나지도 않았다.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자리를 가리키는 그를 보며 고천수는 안내를 받은 자리에 앉았다.
-역시 별로 포스 있지는 않은데.
-걍 푸근한 인상임.
채팅창에 사단장의 분위기에 대한 의견들이 올라왔다.
‘글쎄.’
고천수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시청자들은 고천수와 비슷하게 긴장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시면서 조금 설명을 받으셨겠지만, 저는 이곳을 담당하는 7.5사단의 사단장, 백경연이라고 합니다.”
“네, 사단장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고천수라고 합니다.”
백경연은 손에 들고 있는 서류를 넘겨보며 고천수에게 말했다.
“서로 소개나 하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고천수 씨에게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뭐죠?”
“고천수 씨는 정말로 대전에서부터 여기까지 온 겁니까?”
정적.
고천수는 그 질문에 잠시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떠보는 걸까?’
믿기 어렵기 때문에 물어보는 것이라면 문제는 없었다.
“네. 거기서부터 왔습니다.”
“정말 대단하군요.”
백경연은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저희 군대의 호위 없이 이곳까지 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인데 말입니다.”
“…….”
고천수의 표정이 굳었다.
말이 호위지 7.5사단은 사람들을 공물처럼 취급했다.
여기까지 데려오면 좋긴 하지만, 호송이 필수인 건 아니었던 셈이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시군요.”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그걸 지적해 주고 싶었지만, 이곳에서 괜히 백경연과 대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대화를 돌리려고 하자 오히려 백경연이 이렇게 물었다.
“혹시 7.5사단에게 불만이 있으신 겁니까?”
순간 고천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뭐 하자는 거지?’
표정만 보면 정말 순수하게 묻는 듯해서 더 의도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형님들, 이 사람 지금 뭐 하자는 것 같습니까?”
시청자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비슷한 답변이 돌아왔다.
-네 진짜 생각을 듣고 싶은 거인 듯.
-사단장에 대한 네 선입견이 좀 센 거 아님?
-편하게 대화해 보셈.
‘선입견?’
7.5사단은 지금까지 각종 폐해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 부대의 수장이라고 하면 선입견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던 것이다.
“역시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때, 백경연이 오히려 먼저 한숨을 내쉬며 분위기를 전환했다.
“별다른 일이 없던 분에게는 이 말을 하진 않지만, 저희 7.5사단에 문제가 생기긴 했습니다.”
“문제……?”
“고천수 씨가 겪었을 바로 그 문제 말이죠.”
백경연은 7.5사단이 저질렀던 만행에 대해 스스로 언급했다.
“제 명령을 받고 움직였던 부대원들이, 공적에만 열을 올려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소홀하거나 오히려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대전에서부터 오셨다면, 분명히 본 게 있으시겠군요.”
“…….”
본 건 많았다.
하지만 고천수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러는 거지?’
사람들을 구해 오라는 명령을 내린 건 다름 아닌 이 사람이었다.
붙잡아서 심문했던 7.5사단의 군인이 했던 말로 봤을 때, 단순한 공적 올리기에 열중했다기엔 조금 광적인 면도 있던 터였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저희 7.5사단의 잘못에 대해서는 회피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본 게 없진 않지만 말하기가 조심스럽군요.”
고천수는 결국 그가 언급한 주제에 조금 어울려 주기로 했다.
“저는 여기까지 오면서 생존에만 집중했을 뿐입니다. 7.5사단이 무슨 일을 하건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렇기에 불만을 가진 건 아닙니다. 그저 여기 와서 조금 놀라기는 했죠.”
“어떤 부분에서 말입니까?”
“제가 봤던 7.5사단 부대원들보다는 확실히 온화했거든요. 환경이든 아니면 다른 뭐든.”
그건 지휘관도 포함해서 하는 얘기였다.
“사단장님께서는 어떤 방향을 추구하시는 편입니까?”
굳이 자극하지 않으면서 돌려 물었다.
그 의도를 눈치 챘는지 백경연이 살짝 미소를 그리면서 답했다.
“저는 국가를 재건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고천수 씨는 잘 몰랐을 테니 제가 일단 설명을 드리죠.”
그러면서 백경연은 뒤에 있는 벽을 가리켰다.
“일단 여기를 봐 주시겠습니까?”
고천수는 그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그게 평상시 저희 7.5사단이었습니다. 세계가 이렇게 되기 전까진, 그냥 없는 단체나 다름없었죠.”
백경연은 7.5사단이 비밀리에 창설된 비상 전력이라는 점을 고천수에게 밝혔다.
“저희 7.5사단은 국가가 비상사태에 빠져 제 기능을 못하게 됐을 때, 빠르게 기능을 회복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그게 어떤 상황에서든 말이죠.”
즉, 사조직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다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로 오래 존속하다 보니, 부대원들의 일탈이 심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 점은 고천수 씨에게 명확히 사과드리겠습니다.”
“음…….”
고천수는 잠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다고 치고 몇 가지 좀 물어도 되겠습니까?”
“뭡니까?”
“일단 그럼 7.5사단은 다른 일반적인 부대와는 서로 소통하는 창구가 없는 겁니까?”
7.5사단의 부대원들이 다른 일반 군인들을 이용하려고 한 적은 있어도 정식적인 협력을 한 적은 없었다.
사조직이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저희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부대였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연락망 구축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아예 서로 연락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보니까 서로 충돌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네, 그랬을 겁니다. 어차피 같은 군인이라고 증명하기도 어려우니.”
사실 7.5사단의 행태 때문에 아군임을 증명 못 하고 충돌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었지만, 고천수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지금은 더 알고 싶은 궁금증이 있었다.
“네, 좋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사단장님은 제주공항에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어차피 대전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한 이상 제주공항을 거쳐 왔을 거란 추측을 피할 수 없었다.
고천수는 이 사실을 먼저 언급해서 이쪽에서 굳이 숨기는 건 없다는 점을 어필하고 백경연의 태도도 다시 점검할 요량이었다.
“제주공항이라. 어느 정도의 사람이 있던가요?”
“아주 많았습니다.”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수였다.
“7.5사단이 두고 갔다고 하면서 거기서 기다리고 있던데…….”
“정말입니까?”
백경연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제 부하가 분명히 다 데려왔었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제가 눈으로 본 건만 수백 명이나 됐어서……. 그럼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군요.”
뭔가 백경연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고천수는 이쯤에서 말을 흐렸다.
하지만 백경연은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옆에 있는 군인에게 손짓했다.
“수송중대장 호출해.”
그 명령에 군인이 곧장 무전기를 꺼내들고 누군가를 불러들였다.
똑똑.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딸깍.
안에서 대기하던 군인이 문을 열어 주자, 한 대위가 경례를 붙이며 들어왔다.
“충성! 수송중대장 양구선! 사단장님의 부름을 받고 왔…….”
타앙!
총성이 울렸다.
“크, 컥!”
종아리에 총알을 맞은 양구선이 바로 바닥에 쓰러져서는 신음을 토해냈다.
‘뭐야, 이거.’
그때 고천수는 백경연의 뒤로 와 있었다.
백경연이 권총을 꺼내려고 했던 순간, 몸을 던져 그의 뒤로 가 도끼까지 빼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와, 고천수 미쳤냨ㅋㅋㅋ
-반응 속도 돌았네.
-야야, 너 노린 거 아니니까 치지 마.
이 와중에 백경연은 고천수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백경연의 옆에 있는 군인이 고천수에게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는 듯 고개를 저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주공항에 있던 인원들의 수송에 문제가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 거지, 중대장?”
“예? 그, 그건…….”
“확인 않고 바로 쏴 버려서 미안하긴 하네만, 솔직히 자네는 전적이 있지 않은가?”
백경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양구선을 바라보았다.
“성역에 사람을 더 들이면 안 된다면서 이만 빗장을 걸어 잠그자고 했었으니까.”
“그, 그건 어디까지나 인원 수용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물자가 부족해서…….”
“입 다물도록.”
백경연은 여전히 총구를 양구선에게 향한 채로 말했다.
“우리는 여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원하는 자에 한해서 성역 재건에 중개하고 있는 것뿐이다. 실제 탑이 내려올지 안 내려올지는 우리가 맹신할 내용이 아니야. 그런데 자네는.”
백경연은 총구를 까딱이며 양구선의 목을 가리켰다.
“군번줄이 아니라 또 그걸 차고 있군.”
“헉.”
양구선은 급하게 자신의 목을 가렸다.
하지만 고천수는 그가 무엇을 차고 있던 것인지 이미 알아본 상태였다.
‘탑…….’
분명 탑 모양을 한 목걸이였다.
“자네는 일단 군인으로서의 수칙을 어겨서 총을 맞은 거야. 그리고 일단 다시 물어야겠지.”
“자, 잘못…….”
“제주공항의 인원, 탑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이 선착순이란 사실을 듣고 안 데려온 게 맞나 아닌가.”
“잘못했습니다.”
백경연은 그 대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야.”
타앙!
총알이 한 발 더 발사됐다.
“크악!”
양구선은 두 다리에 다 부상을 입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내보내. 더 문책할 테니까 치료해서 가둬 놓고.”
“네.”
옆에 있던 군인이 양구선에게 다가가 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고천수 씨? 그만 앞으로 나와 주겠습니까?”
“총을 치워 주시면요.”
고천수의 답에 백경연은 총을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올려놓고 멀찍이 밀어놓았다.
“자, 됐습니까?”
“후.”
고천수는 그제야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말했다.
“다음부턴 이럴 거면 미리 언질 좀 부탁드립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저도 좀 저돌적인 면이 있어서 말이죠.”
백경연은 아직도 남아 있는 화약 냄새를 풍기며 의자에 푹 몸을 기댔다.
“옆에 있는 저것 때문에 요새 기강이 말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빛줄기를 말하는 듯했다. 고천수는 지체하지 않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씀하시기엔 무슨 중개를 언급하시지 않았습니까?”
광신도 에피소드와 엮여 있는 게 확실했다. 고천수는 이곳에 무엇이 있는 건지 확실히 알아야만 했다.
“……고천수 씨, 종말을 맛본 인간이 얼마나 쉽게 미치는지 모르시지는 않을 겁니다.”
백경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도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조차도 그렇죠. 사람들은 끝없이 완벽한 피난처를 찾는 중입니다.”
“…….”
“물론 전 이곳을 안전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실제로 고천수 씨가 눈으로 확인한 그 환경을 만들어냈죠. 인재들도 제법 모았으니, 적당히 버티다가 제주도만 정화할 수 있어도 뭔가를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정화.
고천수는 크라켄을 떠올렸다.
‘설마 그거, 여기까지 따라오지는 않겠지?’
괜한 불안감에 고천수가 잠시 침음하는 사이, 백경연이 말을 이었다.
“고천수 씨,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이니까 그냥 미리부터 얘기해 두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냥 고천수 씨의 선택입니다.”
그렇게 조언하는 백경연은 고천수가 당장에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을 뉴타운이 아니라 성역이라고 부릅니다.”
백경연은 고천수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말했다.
“아마 하루면, 고천수 씨도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