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26화 (126/224)

126. 성역 (3)

“이야.”

현관에서 안으로 들어선 고천수는 방의 내부를 확인하고 탄식을 뱉었다.

“5성인가?”

광활하게 넓은 내부에는 퀸사이즈의 침대가 놓여 있고, 창문 너머로는 커다란 테라스까지 마련돼 있었다.

내부를 비추고 있는 은은한 조명 아래를 걸으며 고천수는 계속 입을 벌렸다.

-천수 이런 데 처음 와 봄?

-ㅋㅋㅋㅋ 첨인 거 너무 티 나잖아.

-3성도 안 와 봤을 듯.

“형님.”

고천수는 채팅창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떴다.

“솔직히 3성은 가 봤을 겁니다.”

-가 봤으면 가 본 거지 가 봤을 겁니닼ㅋㅋ

-알았다, 알았어.

왈!

옆에 선 흑구도 쾌적한 실내 환경에 만족한 듯 밝은 표정을 지었다.

“천수야. 근데 개도 데리고 들어와도 되는 거야?”

따라 들어온 송하나가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

“프론트 데스크에서 제지는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괜한 걱정하지 마.”

고천수는 가져왔던 가방을 구석에 내려놓고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아, 세상에.”

얼마만에 이런 침대에 눕는 것이던가.

확실히 호화로운 호텔답게 침대의 푹신함도 상상을 초월했다.

“하…….”

애써 미뤄 놨던 피로감이 갑자기 온몸을 덮쳤다.

“천수야?”

눈이 살짝 감기려고 할 때쯤, 송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근데 네가 여기서 자면 나는 어디서 자?”

“넌 바닥.”

-ㅋㅋㅋㅋㅋ 바닼ㅋㅋ

-천수 거의 눈 풀렸네.

까딱 잘못하면 바로 잠들어 버릴 듯했다.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며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아니지.”

그는 아직 잠들 때가 아니었다.

“이 상태로 잘 수는 없지.”

호텔이야 원래 관광단지 안에 있던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 아직도 제 기능을 유지하게 만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7.5사단이었다.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확인하기 전엔 편히 쉴 수 없었다.

“송하나.”

“응?”

“프론트 데스크에 전화 걸어서 엑스트라 베드라도 신청해 봐. 바닥에서 자기 싫으면.”

고천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카드키 하나를 챙겨가지고 나가면서 말했다.

“난 잠시 근처 좀 살펴보고 올 테니까 넌 이 안에 있고. 혹시 뭐라도 연락 오면 나중에 알려 줘.”

“자, 잠깐……!”

쾅.

문이 닫혔다.

홀로 복도로 나온 고천수는 다리 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내려 보았다.

왈!

흑구였다.

“넌 따라오겠다는 거냐.”

하긴 흑구에게는 남아 있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좋아, 같이 주변 좀 돌아다녀 보자.”

그렇게 걸음을 옮겨서 호텔 밖으로 나가는 동안 제지하는 인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 이렇게 자유로워, 여기.’

고천수는 호텔 앞에 있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이곳은 지나가던 새가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갈 정도로 평화로웠다.

‘예상과는 많이 달라서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네.’

여태까지 7.5사단이 했던 일로 생각하자면, 여기는 완전히 지옥 같은 곳이 아닐까 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지금까지 거쳐 왔던 어떤 곳보다도 안전해 보였다.

-조금 쉬고 생각해도 되는 거 아님?

-어차피 당장 별 일도 없는데.

몇몇 시청자들이 계속 쉬라고 권유하는 걸 보면, 아직은 별다른 위험이 없는 듯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대비는 해야지.’

유비무환.

아무 일이 없을 때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 놔야 진짜로 움직여야 될 때 허둥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과는 다르다지만…….’

공포 게임에서 이런 환경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오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저희 뉴타운은 무너진 세상을 재건하고, 사람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소리가 좀 더 명확하게 들렸다.

『여러분은 여기서 편안한 생활을 영위하시게 될 겁니다.』

계속해서 걸어가던 고천수의 눈에 광장 같은 것이 들어왔다.

그 넓은 공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군인은 몇 명 없었다. 대부분 일반인들로 보였다.

‘저건……!’

고천수는 단상 위에 서 있는 노령의 군인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군인은 머리 위에 별이 두 개나 박혀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단장!’

여태까지 주워 듣기만 했던 7.5의 사단장인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순간 고천수와 눈이 마주치며 멈칫했던 사단장이, 다시 마이크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이곳에서 원하시는 대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연설은 그걸로 끝이었다.

사단장이 마이크를 다른 군인에게 건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재빨리 박수갈채를 보냈다.

“감사합니다, 사단장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사단장님, 만세!”

곳곳에서 쏟아지는 환호를 받으며 사단장은 미소와 함께 단상에서 내려왔다.

“새로 들어오신 분인가 보군요.”

사단장은 고천수에게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 네.”

“그 개도 본인 겁니까?”

사단장이 흑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뭐. 제가 데려오긴 했죠.”

“애완동물까지 같이 챙겨서 오시다니, 아주 훌륭한 분이군요.”

흑구는 여기까지 오는 도중에 만나서 데려온 놈이긴 했지만, 고천수는 그걸 사단장에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것보다 이제 시작인가?’

사단장과의 1대1 면담이 예정돼 있었다.

아직 어떤 대화를 나눌지 제대로 고민해 두지는 않았기에, 고천수는 살짝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 오신 분들은 전부 저와 1대1 면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그때 또 뵙도록 하죠.”

하지만 사단장은 한 번 살짝 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어디론가 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뭐야, 지금이 아니었나?’

무엇보다 고천수는 사단장이 남긴 말이 신경 쓰였다.

‘새로 온 사람은 전부 1대1 면담이라니.’

선택지를 고를 때는 엄청 중요한 특전이라도 주는 건가 했는데, 이래서야 별 것도 없지 않은가.

-사단장 표정 엄청나게 밝네.

-7.5사단 사단장 맞냐?

-다른 사람 아님?

채팅창에 올라오는 의견대로 7.5사단의 사단장이 너무 임팩트가 없다는 것도 고천수를 짜증나게 했다.

‘뭐야, 대체.’

계속해서 부딪히게 됐던 7.5사단의 수장인 만큼 엄청난 분위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직접 본 사단장은 예상보다 훨씬 푸근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냐, 아직 단정지을 수는 없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만 보이는 표정이 따로 있을 수 있었다.

포커페이스 부류는 어떤 게임에서든 자주 등장하는 만큼, 안심하기엔 아직 일렀다.

왈!

그때, 흑구가 짖는 소리에 고천수는 앞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잠시 헤어졌던 전병훈과 휴가 서 있었다.

“고천수!”

떨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반가운 표정을 짓는 휴를 보며 고천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무슨 못 볼 거라도 본 것 같고만?”

휴는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고천수는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는 적응이 잘 안 돼서 말이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같이 적을 상대했으면 동료 같은 거니까.”

-ㅋㅋㅋㅋㅋ 제대로 코 꿴 듯.

-근데 얘 쓸모 많음. 넘 찝찝해 하지는 마셈. ㅋㅋㅋ

고천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 휴의 옆에 있는 전병훈을 돌아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몰려 있던 광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병훈 씨?”

고천수가 부르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네.”

고천수의 물음에 전병훈은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답했다.

“저희가 길을 지나오면서 봤던 그 남자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봐도 정상은 아니었죠.”

“저도 기억합니다.”

“뭔가 이상한 빛줄기 아래에서 사람들이 일하고 있던 것도 그렇고…….”

전병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신경 쓰입니다.”

“예, 마찬가지네요.”

고천수는 사단장이 사라진 방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장소에 대해서 설명해 줄 사람이 아까 전의 그 사람인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미심쩍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는 도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좀 물어봤습니다.”

진중한 표정만큼이나 역시 허투루 사는 사람은 아닌 듯했다.

고천수는 만족한 표정으로 전병훈을 닦달했다.

“좋습니다. 뭐든 좋으니까 빨리 말씀해 보세요.”

“일단 여기는 성역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성역?”

고천수가 여기에 오면서 한 번 들었던 단어와 똑같았다.

“네, 아무래도 저것 때문인 듯합니다.”

전병훈은 여기서도 보이는 하늘의 빗줄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빗줄기 아래에 지반을 다져 놓으면 기다렸던 일이 일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뭔가가 일어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탑이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탑.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 튀어나왔다.

고천수는 빠르게 전병훈에게 물었다.

“탑이라니, 무슨 탑을 말하는지도 들었습니까?”

“망해 가고 있는 세계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통로라는데, 정확하게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들은 내용은 이게 전부입니다.”

“흐음.”

고천수는 턱을 만지며 살짝 한숨을 흘렸다.

‘탑…….’

예전 같았으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하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몬스터들이 즐비한 말도 안 되는 세계기도 하고, 하늘에 폭포 같은 빗줄기가 실제로 내리쬐고 있지 않은가.

거기다가 시청자들이 이미 성역을 언급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 있기에, 그냥 넘겨 버릴 수는 없는 얘기였다.

“형님들, 여기 뭐, 사이비 단체랑 엮여 있다든지 그런 겁니까?”

다만 채팅창에 누가 광신도 에피소드에 대해서 써 놓았던 적이 있었다.

광신도라는 건 누군가 종교에 미쳐 있다는 뜻.

그렇기에 여기서 사람들이 떠드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미친 사람들에 의해 왜곡돼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함구하겠음.

-일단 7.5사단하고 면담부터 하셈.

-차근차근히 진행하는 게 좋다구.

시청자들은 굳이 고천수가 묻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순서를 지켜서 일을 진행하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예, 도움 됐습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대답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경우가 있다.

고천수는 시청자들의 태도를 보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었다.

“고천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천수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둘러서 달려오는 송하나를 목격할 수 있었다.

“여기 있었네!”

“뭐야. 왜 따라 나왔어.”

고천수가 날선 목소리로 말하자 송하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답했다.

“아니, 나는 무슨 허락을 맡아야 나올 수 있는 거냐? 맘대로 나올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래. 부정하진 않을게.”

하지만 송하나는 결코 그냥 나온 걸로 보이지는 않았다.

“용건이 있긴 한 거지? 그렇게 급하게 달려오던 걸 보면 말이야.”

송하나도 그점을 부정할 수는 없는지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렇긴 해.”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들어보자.”

이렇게 급하게 달려올 일이 무엇이었는지, 고천수는 바로 듣고자 했다.

“말해 봐.”

“면담이 있대.”

송하나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관리하는 총책임자랑 면담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 1대1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괜찮은 건지 모르겠어.”

“…….”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라, 고천수는 뭐라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혹시 언제 면담해야 한다고 시간은 안 알려 줬나?”

“아, 그거.”

송하나는 주머니에서 뭔가 메모해 둔 쪽지 하나를 꺼내더니 말해 주었다.

“나는 30분 뒤에. 그리고 너는 47분 뒤.”

“47분 뒤?”

분 단위로 쪼개져 있는 걸 보니, 면담에 그다지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는 않는 듯했다.

‘면담이라.’

솔직히 여기까지 오면서 7.5사단과 꽤나 큰 악연을 쌓았다.

면담을 하며 뭔가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지, 고천수도 조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뭐, 좋아.’

고천수는 몸을 움직이며 관절을 풀었다.

‘어떤 전개로 흘러가게 되더라도, 다 기꺼이 맞이해 주겠어.’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 47분 뒤, 고천수는 사단장으로부터 예상외의 말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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