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성역 (2)
“성역?”
고천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순간 보호 구역 같은 것을 말하나 싶었지만, 고천수는 시청자들이 그걸 말한 게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그때, 정체 모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비켜.”
첫인사치고는 무척이나 과감한 언사였다.
“갈 길이 바쁘다.”
남자는 고천수를 향해 손짓해 보였다.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당장 뚜렷한 적의가 보이지는 않았다.
“예, 바빠 보이긴 하는데요.”
고천수는 그가 짊어지고 있는 관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제가 그쪽이 걸어온 길로 가고 있어서 말이죠. 안전한지 좀 묻고 싶은데.”
“……안전?”
고개를 갸웃거린 남자는 곧 시선을 내리깔며 말했다.
“안전하긴 하지. 몬스터들은 대부분 정리돼 있으니까.”
몬스터.
그 표현을 들은 고천수는 몸을 흠칫했다.
“몬스터? 괴물 말입니까?”
“그렇게 부르지. 7.5사단은.”
7.5사단.
역시나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나랑 똑같은 표현으로 부르는 건가.’
별거 아닌 듯하지만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갈 거면 가고 길이나 비켜. 나는 마저 속죄를 해야 하니까.”
“속죄? 그 관을 끌고 가는 게 말입니까?”
“그래.”
고천수는 관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거기에는 뭐가 든 겁니까?”
“아무것도.”
남자는 관을 열어 보였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들어갈 관이지.”
고천수가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남자는 왜 안이 비어 있는지 알아서 털어놓았다.
“난 주어진 임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어. 죽을 자리를 찾아서 스스로 땅에 들어갈 거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고천수가 더 질문을 던질 틈을 주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드르르륵.
남자는 간신히 트럭을 피해서 관을 끌고 이동했다.
-그냥 냅둬.
-이미 정신이 나갔음.
고천수는 걸어가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형님들, 성역이라는 곳이 뭐죠?”
괜히 건들지 말라고 해서 남자를 보내 버리긴 했지만,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많았다.
-직접 가 보면 알게 될 거임.
-어차피 7.5사단 사단장하고도 안전하게 만날 수 있잖음.
“흠.”
당장 답변을 해 주기는 어려운 내용이라는 걸까.
‘어쨌거나…….’
7.5사단이 중문 관광단지에서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내게 됐다.
‘일단 가 보자.’
고천수는 다시 트럭에 올랐다.
***
중문 관광단지.
트럭을 좀 몰고 가다 보니 그곳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로는 5분이면 도착하겠는데.’
고천수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승합 택시에 신호를 한 뒤, 트럭을 멈춰 세웠다.
“형님들, 왜 아무 말도 없습니까?”
중문 관광단지에 거의 다 다다랐는데도 시청자들에게서는 아직 경고의 말이 없었다.
“여기 차 타고 들어가도 되는 겁니까?”
상식적으로는 차를 세워 놓고 주변을 살피며 목적지로 향하는 게 안전했다.
하지만 호들갑 떠는 걸 좋아하는 시청자들이 별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어서일 터.
“그냥 들어가도 되냐고요.”
-음.
-내려, 걍.
-난 글쎄.
답이 좀 모호했다.
“글쎄는 뭡니까, 형님.”
-몰래 잠입하고 싶으면 내려서 가는 게 맞긴 한데.
-어차피 사단장 만날 거 생각하면 그냥 가도 됨.
-의외로 당장은 안전함.
‘의외로 당장은 안전하다’는 표현 때문에 더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차에서 내리라고 하는 사람보다는 좀 더 믿음이 갔다.
어차피 사단장과의 안전한 만남이 기획되어 있는 이상 괜히 돌아서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속죄를 한다며 관을 지고 가는 미친놈이 이쪽에서 걸어온 이상 한 번쯤은 경계를 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흠칫.
고천수는 그렇게 운전석의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아, 이런 망할.’
트럭 몇 대가 나타나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뭐임.
-순찰대네.
-7.5사단 부대원들인 듯.
타이밍 안 좋게 7.5사단의 부대원들을 만나 버렸다.
‘밟아야 하나?’
고천수는 브레이크에 두고 있는 발을 떼고 가속 페달을 밟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띠링! 새로운주인 님이 1젠 후원! - 괜찮으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그때 후원 알림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믿어 보셈.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도 이런 걸로 장난은 안 침.
-뭔데. 정말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 것?
설왕설래가 있긴 했지만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고천수에게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것을 제안했다.
-[울부짖는정신병자] : 남으셈. 너라면 별 문제 없음.
거기까지였다. 마지막까지 갈등하던 고천수는 순간 핸들에서 손을 놓았다.
“후. 어쩔 수 없네요.”
군용 차량들이 다가오는데도 고천수가 차를 움직이지 않자 뒤에서 멈춰 있던 승합 택시가 전조등을 몇 번 깜박였다.
정말로 가만히 있겠느냐는 신호인 듯했지만 고천수는 애써 모른 척했다.
끼이익.
달려온 군용 트럭들이 고천수가 타고 있는 트럭 앞에서 일제히 멈춰 섰다.
총 3대.
많지는 않지만 적지도 않은 수였다.
우르르.
트럭에서 군인들이 십수 명 내려섰다.
뚜벅뚜벅.
그들 중 장교 한 명이 운전석 쪽으로 다가왔다.
“재건!”
그러더니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고천수를 바라보면서 다짜고짜 이마에 경례를 올렸다.
“……음?”
“반갑습니다, 순찰대 김학용 중위입니다.”
그는 예상외의 호의적인 태도로 고천수를 맞았다.
“혹시 이 앞이 어떤 곳인지 알고 오셨습니까?”
“예, 뭐. 안전한 지역이라고 하길래 이쪽으로 왔는데요.”
“그렇군요. 그럼 어디서 오셨는지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답하기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고천수는 살짝 눈썹을 움찔거렸다.
‘뭐지? 기만 작전 같은 건가?’
지금까지 한 짓을 보면 아이러니하긴 했지만, 대전터미널에서나 대전역에서도 처음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모았을 것이므로 태도가 이상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그저 조금 기분이 꺼림칙할 뿐이었다.
“……전 대전에서 왔습니다.”
적당한 출발지를 갖다 대자 김학용 중위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전에서?”
“예, 운 좋게 살아남아서 여기까지 왔죠.”
“대단하군요.”
김학용 중위는 순수하게 감탄을 표하는 듯했다.
“이름은 어떻게 되십니까?”
“고천수입니다.”
“고천수 씨…….”
들고 있던 종이 위에 고천수의 이름을 적어 넣은 김학용 중위가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가시죠. 고천수 씨 같은 분은 저희 부대에서 언제든지 환영하고 있습니다.”
“엥.”
“음?”
고천수가 이상한 소리를 내자 김학용 중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네? 아뇨, 뭐.”
고천수는 마른침을 살짝 삼켰다.
‘아 씨, 적응 안 되네.’
기만 전술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7.5사단의 부대원과 이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ㅋㅋㅋㅋ 넘 경계하지 마.
-7.5사단은 인재를 좋아하잖아.
-거기서 여기까지 알아서 온 놈이라니, 아주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는 거라고.
“그런 겁니까?”
그래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7.5사단을 적대해서 좋을 건 없었다.
단서를 얻기 위해 중문 관광단지로 들어가야 하는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조금 성격을 죽이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고천수가 가만히 있자니 김학용 중위가 이내 다른 군인들을 향해 손짓했다.
부르릉.
군인들이 다시 올라탄 트럭들이 핸들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좋아. 갈 데까지 가 보자.”
고천수는 그 뒤를 따라가고자 자신의 트럭을 출발시켰다.
***
그리고 도착한 중문 관광단지.
“뭐야, 저건……!”
김학용 중위를 앞세워 간단히 검문소를 통과하면서,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쿵! 쿵! 쿵!
공사장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빌딩의 기초를 다지듯 수백 명이 각종 연장을 가지고 거대한 땅덩이를 파헤치는 중이었다.
“대체…….”
하지만 고천수가 놀란 건 그런 숨겨진 공사장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위에 있는 정체불명의 자연 현상이 그에게 경악을 선사했던 것이다.
화아아아아.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줄기.
마치 황금빛 폭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법한 거대한 빛줄기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고천수는 할 말을 잊어버렸다.
여기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보이지도 않던 빛줄기였다.
가깝게 접근해야만 보이는 현상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와, 천수가 여기까지 오다니 감개무량하네.
-진짜 엄청 빨리 온 거임.
-대단대단.
시청자들이 치켜세워 주고 있었지만 고천수는 채팅을 제대로 볼 정신이 없었다.
“형님들, 저게 뭡니까.”
-다음 단계 스테이지 같은 거지.
-미리부터 알려고 하진 마~.
미리부턴 알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신경이 쓰였으니까.
“정지! 정지!”
그사이, 어느 호텔 앞 주차장에 도착한 고천수는 경광봉을 들고 소리치는 군인의 지시에 따라 차를 멈춰 세웠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군인은 고천수에게 호텔 안으로 들어갈 것을 안내했다.
김학용 중위와 다른 군인들은 먼저 그 호텔로 들어간 상태였다.
“세상에.”
고천수는 흑구와 함께 차에서 내려서 주변을 돌아보면서 탄식했다.
“여긴 뭐냐고.”
하늘에 떠 있는 빛줄기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지만, 놀랄 만한 것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위이잉.
분수대가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호텔의 문 앞으로 걸어가자, 자동문이 움직이며 고천수와 흑구를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허락했다.
‘전기가 들어오잖아.’
발전기를 쓴다든가 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호텔 내부의 분위기는 고천수가 상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어서 오십시오.”
프론트 데스크에서 깔끔하게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고천수를 맞았다.
종말과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
익숙하지 않은 전개에 고천수가 탄식을 흘리고 있자니 직원이 입에 미소를 걸며 물었다.
“고천수 씨?”
직원은 김학용 중위가 들고 갔던 종이를 들고 있었다.
“고천수 씨 맞으시죠?”
“아, 네.”
엉겁결에 고천수가 대답하자 직원은 데스크에 있던 서류에 뭔가를 체크하고는 똑같은 카드키를 두 개 건넸다.
“묵으실 곳은 임의로 지정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음.”
“동의하신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직원의 거듭된 질문에 고천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키를 받아 들었다.
“성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멍하니 카드키를 살펴보던 고천수에게 직원이 인사까지 건넸다.
‘성역?’
들어본 적이 있는 단어였다.
‘그 남자가 얘기했던…….’
“고천수!”
그때, 송하나가 호텔로 들어서며 외쳤다.
“같이 들어가야지 혼자 먼저 가면 어떡해!”
질타가 있었지만 고천수는 그녀에게 제대로 반응해 주지 못했다.
“어, 그래. 혼자서도 잘 왔네.”
“제대로 들은 거야?”
불만을 토로하는 송하나의 뒤로 무심코 시선을 돌린 고천수는 갑자기 눈썹을 움찔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나야.”
전병훈과 휴가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둘은 어디 갔냐?”
“나머지 둘?”
송하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군인들이 다른 호텔로 데려가던데. 나만 이쪽으로 보냈어.”
“그랬냐? 둘 다 별 소리 않고 따라갔고?”
“전병훈 씨는 별 말 없었고 휴는 좋은 집이네 하고 웃으면서 따라가던데.”
휴는 역시나 소름끼치는 놈이라 생각하며 고천수는 발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송하나.”
카드키에 적힌 호수는 110호였다.
엘리베이터를 탈 것도 없이 복도를 걸어 지정된 호수 앞에 도착한 고천수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긴장되네.’
지금까지 겪었던 것과 많이 다른 환경이었다.
겉은 멀쩡해도 이 안은 어떻게 되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형님들, 저 들어갑니다?”
-이번엔 의심 없이 가 봐.
-잘만 하면 여기만 한 곳이 없을 테니까.
떠보기 위한 발언이었지만, 시청자들 중 제대로 말리는 이는 없었다.
삐리릭.
그렇게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간 고천수는, 여태껏 맛보지 못했던 것을 맞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