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22화 (122/224)

122. 애써 잊고 있던 것

“오케이.”

휴는 고천수의 부름에 응하며 남자를 끌고 왔다.

“으, 으앗! 으아아!”

강제로 끌려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남자는 휴의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쿠웅!

크라켄의 다리가 제주공항을 넘어 지면에 찍혔다.

고천수는 둘을 태우고 빠르게 문을 닫았다.

“출발하십쇼!”

붕! 부우우우웅!

승합 택시가 급하게 바퀴를 굴리며 출발했다.

쾅!

주변으로 잔해가 날아왔다.

쾅! 콰앙!

“다들 꽉 잡으세요!”

운전석에 앉은 조종사는 이리저리 핸들을 돌리며 바로 앞에 떨어진 잔해들을 피해 곡예 운전했다.

콰직!

잔해들이 떨어지며 여기저기서 충격에 튀어 오른 돌멩이들이 앞 유리를 깨부쉈다.

부아아아아앙!

그 와중에 조종사는 승합 택시의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가속 페달을 더 세게 밟았다.

쿵! 콰앙! 쾅!

-크라켄 화난 거임? 아무데나 왤케 던져댐.

-항상 화나 있는 놈 아님?

-근데 운전하는 놈 실력 쩌네.

고천수도 동감이었다.

조종사는 신들린 듯이 핸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헬기를 조종할 때부터 알았지만……!’

뭔가 잘못된 헬기를 그 정도 띄워서 기동한 것부터가 보통 실력은 아니었다.

만약 그 정도 실력이 아니었다면, 운전대를 잡았을 때부터 고천수가 말리고 자신이 앉았을 것이었다.

쾅…….

잔해들이 떨어질 때 나는 충격음이 점점 멀어졌다.

승합 택시는 성공적으로 크라켄의 마수로부터 벗어났다.

“하아.”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송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아.”

“후우.”

소방대원도 입을 벌리며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저 괴물이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꼼짝없이 박살 나는 줄.”

휴가 다소 능글맞은 표정으로 답했다.

“으, 으음.”

그런 휴에게 붙잡혀 있는 남자는 안심하지만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고천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운전석에 앉아 있는 조종사에게 말했다.

“덕분에 살았네요. 탈거는 다 잘 다루시나 봅니다.”

“웬만한 거는요.”

여전히 답변하는 투가 딱딱하기는 했지만 그리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송하나가 호소했겠지만, 어쨌거나 다른 사람을 구하러 돌아오지 않았던가.

“좀 늦었지만 절 도와주신 분의 이름은 좀 들어도 되겠습니까?”

고천수가 묻자 조종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전병훈입니다.”

“그렇군요. 저도 이제야 정식으로 소개하네요. 고천수입니다.”

-서로 악수라도 나눠야 할 것 같은 분위기.

-소방관하고도 통성명해야 하지 않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 보는 사이에 계속해서 이름도 모른 채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확실한 인연이지.’

고천수는 바로 소방대원에게도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 소방관님도 이름을 알려 주실 수 있다면 좋겠군요.”

“저, 저도요? 전 소윤재라고 합니다.”

“고천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고천수가 손을 내밀었다.

소윤재는 잠시 당황하다가 곧 그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뭔가 선거 유세 같다.

-진즉에 좀 소개하지.

-잘못해서 이 사람 죽었으면 이름 몰라서 그냥 뭐시기 사망이라고 하고 추모했을 듯. ㅋㅋ

이제 막 위기에서 벗어난 상황치고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고천수가 아직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운전기사…….’

제주공항으로 승합 택시를 몰고 온 남자였다.

유니폼 같은 깔끔한 차림새를 보면 택시를 운행하는 기사로 보였다.

다만 이런 위험한 시국에 왜 택시를 몰고 제주공항으로 왔는지는 의문이었다.

“기사님.”

그렇기에 고천수는 통성명보다 앞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누가 돈 주고 보내서 왔다고 했죠?”

이런 경우에는 의뢰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했다.

“혹시 7.5사단이 보냈습니까?”

“예?”

남자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게 무슨…….”

“누가 보내서 왔다고 했지 않습니까. 제주공항에 누가 남아 있는 줄 아는 사람이 시켰을 것 같아서 말이죠.”

상식적으로 7.5사단이 겨우 이런 기사 한 명에게 돈까지 주며 특정한 누군가를 태우고 오라는 요청을 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7.5사단이 뭔지 잘 몰라요. 다른 사람이 시켜서 왔습니다.”

“다른 사람?”

역시나 7.5사단이 아니라는 소리를 하는 남자를 보며, 고천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누구입니까. 누굴 데려오라고 시킨 게. 그리고 데려가야 했던 손님은 또 누구고요.”

“그냥 어떤 부부였습니다. 어르신 좀 데려와 달라고 했어요.”

“어르신?”

그냥 노인을 구하러 이런 위험한 곳까지 왔단 말인가.

“보상으로 얼마나 주기로 했는데 여기까지 온 겁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남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답했다.

“30만 달러……입니다.”

“30만 달러?”

예상치 못한 단위가 튀어나왔다.

“원화가 아니라 달러입니까?”

고천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묻자 남자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달러 맞습니다.”

“흠.”

나라가 이렇게 되었으니 원래 쓰던 원화가 별 가치가 없게 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미국이 멀쩡하지 않으면 달러도 원래 가치를 유지하지 못할 텐데.

금도 아니고 달러에 목숨을 걸었다니 고천수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달러는 여기서 아직 통용되어서요. 제 가족을 데리고 배라도 타 보려면 돈이 좀 필요했습니다.”

남자가 먼저 다시 입을 열었다.

고천수는 그 말에도 의문을 표했다.

“설마 제주도에서 나가려고 했던 겁니까?”

“네, 네.”

“7.5사단이라는 군부대가 제주도에 거점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저, 전 잘 모릅니다. 전 그냥 차귀도에서 여기로 의뢰받고 온 것뿐이에요. 그쪽도 상황은 별로 좋지 못하고요.”

“이상한데.”

휴가 손에 깍지를 끼고 머리에 대며 끼어들었다.

“공항에 있는 사람을 찾으러 왔다면서 7.5사단에 대해서는 모른다니, 말이 되나?”

“아니에요! 정말입니다!”

남자는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보세요! 이분이 제가 찾아야 했던 사람이에요!”

“어?”

그 사진을 본 소윤재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건……!”

“왜요. 아는 분입니까?”

고천수가 묻자 소윤재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네네. 한 번 만났던 사람이에요.”

“예? 정말요?”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요? 어디서 보셨습니까?”

“제가 갇혔던 데 옆에 있었어요.”

“그럴 수가……!”

남자는 절망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근데도 같이 나오지 못했다는 건 거기서…….”

“너무 아쉬워할 건 없어요.”

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 양반, 내가 발견했을 때 이미 죽어 있었거든요. 맞죠, 소윤재 씨?”

“……네.”

소윤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도와주려다가 죽었어요.”

“아.”

남자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 희망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천수는 잠시 침음했다.

‘이 남자,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한데.’

한국 자체가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떠나려고 하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가족을 위해 큰돈이 필요해서 여기에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다만 휴의 말대로 공항에 있는 인물을 구하러 왔다면서 7.5사단에 대해서 모른다는 건 석연치 않았다.

“좀만 더 묻겠습니다.”

고천수는 남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노인을 구해 달라고 한 부부는,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습니까?”

“예?”

“어디서 온 사람들이었냐고요.”

남자는 당황하며 답했다.

“제주공항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요.”

“제주공항?”

“같이 온 사람들이 뭔가 이상해서 자기네들끼리 도망쳐서 온 거라고 그랬어요. 그 노인하고는 친해졌는데, 그 양반이 몸이 안 좋아서 바로 같이 데리고 나오지는 못했다고 하더군요. 대신 당부는 해 놨대요.”

남자는 침을 꼴깍 삼키고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공항에 남아 있으라고.”

“음.”

“그러면 금방 차편을 구해서 보내 준다고 했대요.”

그렇게 구한 차편이 바로 이 승합 택시인 듯했다. 그 부부가 7.5사단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단순히 그들을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면, 이 남자가 7.5사단을 모른 채로 이렇게 나선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어라.”

그때, 소윤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어르신은 7.5사단이 있는 중문 관광단지로 가라고 했는데요. 거기에 뉴타운이 있다고 했어요.”

“뉴타운이요?”

송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소윤재가 바로 설명했다.

“네. 거긴 안전할 거라고 했어요.”

그 말대로라면 앞뒤가 안 맞았다.

노인이 부부를 따라갈 생각이었다면 과연 그런 말을 했을까.

-그 노인은 부부를 믿지 않았다는 얘긴가?

-솔직히 어떻게 믿음. 자기네들끼리 떠난 사람을.

-소윤재한테 그거 믿고 남아 있으라고 할 수도 없으니까 그냥 뉴타운 얘기한 듯.

고천수는 채팅창을 차분히 지켜보았다.

‘그래, 그렇네.’

시청자들의 의견을 보니 납득이 갔다.

노인 입장에서는 다 죽어 가는 마당에 그런 약속이나 믿고 있지는 못했을 터,

소윤재를 돕기 위해서였다면 훨씬 더 확실한 정보인 뉴타운을 행선지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

-차귀도로 갈 거야 뉴타운으로 갈 거야?

당연히 7.5사단이 있는 뉴타운이 고천수가 당장 갈 곳이었다.

‘그놈들이랑은 결착을 맺어야 하니까.’

부모님이 있는 곳도 찾고, 무엇보다 이 게임을 깨기 위한 노선을 확실히 인식하고 필요한 목적들을 달성해 나가야 했다.

그냥 살아남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게임이었다면 이렇게 고천수를 어딘가로 유도하는 장치들이 계속 존재할 이유도 없었다.

“참, 차귀도 사람들은 그러면 전부 제주도에서 떠나려고 하는 겁니까?”

추가적인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고천수가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다는 아니고요. 뭍에서 온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밖은 훨씬 심각한 것 같더라고요. 차귀도는 아직 괴물이 드물어서요.”

“그럼 어디로 간다면 외국만 고려하는 거군요.”

“그렇죠. 근데 외국도 얼마나 안전한지는 아직 잘 몰라요. 그냥 괜찮다는 소문만 있고요. 저는 이제 돈도 못 받게 되었으니, 가족이랑 해외 상선을 얻어 탈 시도조차 못하게 됐어요.”

내용이 좀 두루뭉술했다.

그냥 해외로 나가려다가 사망하는 류의 엑스트라들이 모여 있는가 싶던 고천수는 단순한 궁금증으로 한 가지를 더 물었다.

“근데 그 부부들이 더 뭔가를 알고 있다거나 그런 건 없었습니까?”

“네, 더 얘기를 나눈 건 없어서. 그냥 거래 징표라면서 저한테 물건 하나 더 준 것밖에 없어요.”

그러면서 남자는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건네주었다.

“……!”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예, 보시다시피 명함입니다. 별다른 건 없…….”

탁!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천수는 그 명함을 빼앗아들었다.

“이럴 수가…….”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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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

강사 고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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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학원명과 이름.

고천수는 탄식을 토해냈다.

“말도 안 돼.”

“천수야?”

송하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하지만 고천수는 거기에 답하지 못했다.

-천수 완전히 눈 뒤집힐 듯.

-이렇게까지 놀랐던 적이 있었나?

-진심인 건 이번이 처음일 듯.

‘아버지의 명함……!’

그랬다.

이 명함은 바로 고천수 아버지의 것이었다.

“이거!”

고천수는 남자를 붙잡아 끌었다.

“어떤 부부가 줬다고요?!”

“네, 네? 네네! 맞아요!”

“두 분 다 멀쩡했습니까?!”

날선 외침에 남자는 주춤하며 답했다.

“그, 그랬는데요. 뭐죠? 아는 사람인가요?”

알다마다였다.

고천수는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제주도에 계셨단 말인가……!’

어차피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부모님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이렇게 소식을 듣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이다.

-과연 좋은 일일까.

기쁜지 아닌지는 고천수도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건 고천수가 생각했던 조우의 타이밍이 아니었으니까.

[선택지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천수의 심정을 읽은 듯, 알림창이 하나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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