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퇴거 조치 (2)
쿠쿠쿠쿠.
다가오는 그 촉수 괴물의 위용을 보고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위이이이잉!
조종사는 곧장 헬기를 이륙시켰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송하나가 깜짝 놀라며 외쳤다.
“얼른 다시 내려가요!
“꽉 잡기나 하세요!”
조종사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있다간 어차피 헬기도 휩쓸려 버릴 겁니다!”
바다 위로 올라온 괴물.
그건 분명히 비행기들을 쫓아오던 그것이었다.
“누굴 기다려 줄 여유는 없…….”
그렇게 말하던 조종사가 몸을 흠칫했다.
흑구가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입을 벌렸던 것이다.
“그만둬!”
조종사는 그런 흑구를 설득하듯이 소리쳤다.
“난 이미 결정했다! 괜히 방해해서 헬기를 추락시킬 일은 하지 말라고!”
으르르!
“못 들었어? 차라리 이럴 시간에 네 주인을 찾아와!”
그 외침에 흑구가 순간 멈칫했다.
“일단 이륙하고 기다려 볼 테니까! 찾아올 수 있으면 옥상으로 데려오라고!”
그것이 조종사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얼른!”
그러자 흑구는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흑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어차피 헬기를 움직이려면 조종사가 필요한 만큼, 그와 대치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었다.
으르르…….
결국 이빨을 입안으로 숨긴 흑구는 송하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에게 이 약속에 대해 보증을 맡기듯 그렇게 눈도장을 찍은 흑구는, 바로 헬기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앗!”
송하나가 급하게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헬기가 아직 높이 뜨지 않아서인지 흑구는 추락으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영리하게 근처에 있는 버스 천장으로 착지해 충격을 줄인 흑구는, 바로 밑으로 또 한 번 내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왈……!
송하나와 헤어져 계단을 타고 올라가 2층을 내달리기 시작한 흑구는 크게 짖기 시작했다.
왈왈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시간이 없는 탓이 컸다.
근처에 있다면 빨리 불러내 함께 위로 올라가야 하고, 아직 1층에 있다면 다른 위험한 사람들을 유인해 고천수가 출구로라도 나갈 수 있게 해야 했다.
쿠우웅.
뒤쫓아 오는 괴물은 여태까지의 다른 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끔찍하고 강력한 녀석이었다.
흑구는 그 괴물과 맞서는 게 아니라, 고천수에게 도망칠 틈을 벌어 주어야 했다.
“엥? 뭐야!”
그때, 그런 흑구를 발견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흑구, 너냐?”
고천수였다.
***
왈왈왈!
미친 듯이 뛰어오는 흑구를 보며 채팅창도 함께 불타올랐다.
-야, 뭔 일 났나 본데?
-존나 열심히 뛰어오고 있어.
-뭔 일인지 딱 봐도 감이 오네.
그건 고천수도 느끼고 있었다.
쿠우웅.
활주로 쪽에서부터 울림이 있었다.
헬모스들 때문에 밖이 잘 안 보이지만, 분명 고천수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설마 했는데 말이지……!”
크라켄.
그놈이 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놈만 아니길 바랐건만!”
가장 최악의 상황으로 상정한 게 크라켄의 등장이었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육지까지 올라오지는 않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보기 좋게 당했지 뭐야.
-누가 크라켄이 바다 속에만 있는다고 했냐.
-ㅋㅋㅋㅋ 얼른 도망쳐라.
“천수야.”
고새 뒤따라온 휴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
“설마 이 공항 무너져 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내가 지내는 곳인데?”
“…….”
친근하게 부르라고 한 적도 없건만, 휴는 주워들은 고천수의 이름을 마음대로 입에 담고 있었다.
“너 진짜 뒈지고 싶냐?”
-ㅋㅋㅋㅋㅋ
-천수 급발진. ㅋㅋㅋㅋ
고천수는 휴를 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누가 내 이름을 그렇게 막 불러도 된다고 했지?”
“지,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휴 옆에서 숨을 헉헉대고 있는 소방대원이 급하게 말했다.
“이 건물은 뭔가 위험해요!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요!”
“하.”
고천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근데 어디로 가냐고.’
걸음을 옮기고 있지만 생각이 머릿속에서 꼬였다.
‘잠깐.’
흑구는 왔는데 송하나는 없었다.
그렇다는 건…….
“야, 흑구!”
왈!
“송하나는 어떻게 됐어!”
왈왈, 왈왈왈!
“뭐라는 거야!”
흑구가 열심히 짖었지만 고천수는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 씨밬ㅋㅋㅋㅋ
-개한테 묻지 말고 그냥 추측하면 안 됨?
“쯧.”
고천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헬기 조종사랑 만났냐?”
간단한 질문.
흑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경로는 정해졌다.
고천수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들 활주로로!”
왈왈!
흑구가 그런 그의 앞으로 달려 나오며 진로를 방해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왈왈왈!
바짓가랑이까지 턱하고 물어 버린 흑구 때문에 고천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멈춘 정도가 아니었다.
쿠당탕!
발이 꼬인 고천수는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크악!”
그렇게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고서야 고천수는 멈춰 설 수 있었다.
“무, 무슨 짓이야, 너……!”
그렇게 외치는 고천수를 보며 흑구가 천장을 바라봤다.
“뭐야.”
왈!
흑구는 한 번 짖더니, 고천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비상계단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며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왈왈!
“뭐?”
고천수는 흑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내 알아차렸다.
“올라가야 된다고?”
왈!
“이런, 망할!”
고천수는 그제야 상황을 알아차렸다.
“벌써 이륙했구나!”
기본적으로 소음 차단이 되어 있는 공항 건물에 창문까지 가려져 있으니 활주로 쪽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땅의 진동까지 계속돼 오감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니, 흑구를 송하나에게 붙여 전령으로 보낸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알았다!”
고천수는 자신을 넘어뜨린 흑구를 되레 칭찬하며 일어나 경로를 바꿔 달렸다.
“옥상으로!”
“저기 있다!”
그때, 앞쪽에서 자경단원들이 12명이나 나타났다.
“잡아!”
“아, 썅.”
-앞질러 왔네?
-1층 천장에서 빠져나오는 데 시간을 너무 썼음.
-다른 계단 썼나 봐.
우루루.
뒤쪽 멀리서도 자경단원들이 나타났다.
-쌈 싸 먹을라고 작정했고만.
“어딜 도망가는 거지?”
앞쪽에는 자경단의 단장이 서 있었다.
“너희 같은 불순물들은 이곳에서 마음대로 빠져나갈 권리도 없다.”
“하, 참.”
고천수는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쪽들끼리 오순도순 살라고 나가 준다는데 뭐가 불만이야? 난 여기서 볼 일 다 봤다니깐?”
“너희는 우리를 농간했다.”
단장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하나도 살려 줄 수 없어.”
“아이 씨. 야!”
고천수는 휴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얘만 넘겨주는 건 안 되냐?”
-아니, 미친 ㅋㅋㅋㅋㅋ
-이 와중에 협상.
단장이 그 외침을 듣고 표정을 구기는 사이, 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수 이거 완전, 못 믿을 놈이었네. 이럴 거면 역시 지하로 갈걸.”
휴는 공항에서 빠져나갈 곳을 묻는 고천수에게 지하를 추천했었다.
‘지하는 무슨.’
H. H. 홈스의 이름을 달고 있으면서 지하로 가자는 것부터가 고천수를 질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똑같은 약자를 썼던 먼 과거의 살인마는 지하에서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으니까.
“젠장…….”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혹을 달고 가건 뭐건, 일단 명백한 적부터 상대해야 했다.
“좋아.”
고천수는 표정을 정리했다.
“가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며 고천수는 흑구에게 말했다.
“흑구야, 갑자기 네 옆에 적이 나타나도 당황하지 말고 물어 버려.”
왈?
순간, 고천수는 일부러 몸의 균형을 잃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억?”
그리고 고천수가 있던 자리에 웬 자경단원이 하나 나타나, 균형을 잃던 동작을 이어 받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끄악!”
모두를 당황케 하는 상황.
푹!
갑자기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린 전방의 자경단원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떻게!”
“뭐야!”
고천수가 바로 옆에 나타나 도끼를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뭐긴 뭐야.”
그는 눈을 번뜩이며 단장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같은 코스튬 플레이어지!”
이제 배지의 남은 사용 횟수는 4번.
푸학!
고천수는 단장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든 단원 한 명을 또 찍어 버리며 헛웃음을 뱉었다.
“숨지 말고 나와, 이 새끼야!”
“으, 으아!”
놀란 단장은 단원들을 떠밀며 어디론가 혼자 달려갔다.
-헐. 부하들 버리고 간다.
-겁쟁이 쉑.
-야, 조심해!
단장이 자리를 내뺐음에도 단원들은 고천수에게 달려들었다.
“장난하냐?”
고천수는 다시 위치 교환을 사용하고 도끼를 휘두르며 말했다.
“자기만 살겠다고 내뺀 놈을 돕는다고?”
푹!
“멍청하긴.”
단장은 그냥 이 공항의 인간들을 휘두르기 위해 위악의 우두머리가 된 것뿐이었다.
하지만 단원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의심이 없는지, 계속해서 고천수에게 곤봉과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팍! 푸학!
고천수는 남은 배지 기능을 3번 사용해 삼각형을 그리며 이동했다.
“끅!”
“끄악!”
“이 새끼…… 컥!”
단원들은 그런 고천수의 모습에 경악하며 하나둘씩 쓰러졌다.
으르르르!
그사이, 흑구는 자신의 옆에서 넘어졌던 단원 하나를 물어뜯어서 끝내며 몸을 뒤흔들었다.
“다들!”
전방의 적을 정리한 고천수는 손을 뻗어 흑구와 소방대원을 호출했다.
“빨리 오세요!”
물론 부르지 않은 이도 한 명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함께 열심히도 뛰어왔다.
‘어휴, 진짜.’
고천수는 입술을 깨물며 단장이 사라진 비상구로 향했다.
아마 이쪽이 곧장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뚫려 있는 계단일 터였다.
덜컹.
하지만 단장은 들어가서 안에서 문을 잠근 상태였다.
“이 새끼, 진짜 가지가지 하네.”
『저, 저리 가라! 이 불순물 찌꺼기 새끼야!』
이런 건 기다려 줄 필요도 없었다.
훅.
마지막 남은 횟수를 사용해 위치를 바꾸자 문 밖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뭐, 뭐야! 내가 왜 밖에!”
덜컹.
고천수는 잠금을 풀고 문을 열고 나가 말없이 도끼를 단장에게 휘둘렀다.
콰작!
“끄, 끄아아아악!”
어깨에 도끼날이 박힌 단장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천수는 그런 단장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누가, 찌꺼기라고?”
파악!
도끼를 빼내서 다시 다른 쪽 어깨를 찍어 버리자 단장이 몸을 뒤틀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 악마!”
“저 새끼는 악마야!”
도끼를 맞고도 아직 살아 있는 단원들이 바닥을 기며 소리쳤다.
뒤쪽에서 쫓아오던 다른 멀쩡한 단원들도 고천수의 기상천외한 능력을 보고 멈춰서 주춤대고 있었다.
-야!
-능력은 다 썼잖아!
-다른 놈들 오기 전에 서두르라고!
쏟아지는 채팅을 본 고천수는 도끼를 회수하며 단장에게 인사말을 남겼다.
“단장은 공항에 살아. 손님은 갈게.”
그렇게 계단으로 향한 고천수의 뒤로 흑구와 소방대원, 휴가 따라왔다.
“넌 안 남냐?”
고천수가 기겁해서 휴에게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노숙자도 집은 신중하게 고르는 법이거든. 그리고 방금 보여 줬던 네 마술이 궁금해서 말이지.”
“어휴.”
일일이 상대해 줄 시간은 없었다.
고천수는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그렇게 옥상 문 앞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고천수는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여기겠지……!’
탈출로에 사용하는 열쇠라면, 분명 이곳에서 사용해야 하는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덜커덩.
하지만 문은 잡자마자 그냥 열려 버렸다.
고천수는 깜짝 놀라며 비척거리듯 옥상 위에 올라섰다.
“……뭐지?”
여기서 사용하는 열쇠가 아니었단 말인가.
우우우우.
그런 고천수의 눈에 활주로에 올라오고 있는 몬스터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런, 제기랄.”
쿠우웅.
크라켄이 거대한 발을 천천히 움직이며 공항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그 다리의 움직임을 따라 흩뿌려졌다.
“아, 이런 세상에.”
뒤늦게 올라온 휴가 그 광경을 보며 놀란 눈을 그렸다.
“이거 완전 끝장이네.”
“괴, 괴물이……!”
소방대원도 무척이나 놀란 듯 말을 잇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쿠앙! 쿠아앙!
활주로를 부수며 다가오는 크라켄의 위용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이 공항은 이제 곧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게 될 것이었다.
“아.”
고천수는 그런 크라켄을 내다보면서 탄식했다.
“헬기는 어디 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