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제주공항이라는 이름의 감옥 (2)
배지의 남은 위치 교환 횟수는 9번.
이걸 적절하게 활용할 수만 있다면, 분명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잠시 침음할 수밖에 없었다.
‘뭘 어떻게 활용해야 하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무슨 기회를 잡아야 하는지 자체도.
“형님들, 좀 묻겠습니다.”
고천수는 시청자들을 호출했다.
“여기서 탈출하려면, 제가 뭘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 자식. ㅋㅋㅋㅋ 날로 먹으려는 거임?
-그런 건 혼자 생각해야지. ㅋㅋㅋㅋ
-우리가 정보를 막 기부할 순 없잖아?
“기부가 아니라 기브 앤 테이크.”
고천수는 지금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머리가 굳어서 생각이 막혔으니 환기만 좀 시켜 달라는 겁니다.”
-……환기?
-흠. 다른 꿍꿍이는 없고?
“있으면 좀 어떻습니까.”
고천수는 살짝 미소를 그렸다.
“우리 사이에 말이죠.”
-ㅋㅋㅋㅋ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시청자들은 결국 하나씩 의견을 던져 보았다.
-그럼 자경단이 가로막고 있는 출입문 쪽을 노려보든가. 제일 정석적이잖아.
1. 자경단이 가로막고 있는 출입문 쪽을 노린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었지만, 가장 어려운 방법이었다.
자경단이 공격당하면 주변에 있는 인간들도 그들을 도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그로 스킬을 발동시키지 못한다면 이렇게나 많은 인간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 침구가 널려 있는 걸 보니까 자경단 외의 사람들도 1층에 지내는 듯합니다. 쉽게 문으로 빠져나가려고 할 수는 없겠네요. 사방이 적이라.”
-아이템을 찾는 방법도 있지.
-아직 1층에 남아 있는 보급함이 있을 수도 있잖아.
2. 새로운 보급함을 찾아본다.
“그건 각하네요.”
현재 남은 재산은 6젠뿐이었다.
다른 아이템들이 남아 있다고 해도, 써 보기에 애매한 금액이었다.
“6젠에 목숨을 걸 수는 없으니까요.”
쉐도우에게 대항하기 위한 아이템이 고작 5, 6젠.
그런 만큼 6젠이라고 해서 필요 없는 아이템이 나오는 건 아니겠지만, 그것 때문에 위험 행동을 자처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나가는 데 활용할 만한 아이템은 지금 주머니에 챙겨 넣고 있는 열쇠가 전부일 확률이 높았다.
-그럼 달리 다른 방법이 있어?
있었다.
잠깐의 환기를 하니 굳었던 머리가 풀리면서 내용이 정리됐다.
‘요컨대 빠져나가라고 만들어 놓은 환경이 아니다.’
동선으로 따져 봤을 때, 여기까지 오면서 얻은 것들에서 이미 탈출에 대한 힌트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청자들은 굳이 그 방법을 언급하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고.’
환기 차원도 있지만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고천수는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시청자들은 확실히 짓궂은 면이 있었다.
“형님들, 솔직히 이 정도 헤매고 있으면 알려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닙니까?”
-흠. ㅋㅋㅋ
-글세.
“그렇다는 건, 힌트를 줬을 때 너무 쉽게 풀 수도 있어서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ㅋㅋㅋㅋㅋ
-진짜 물건은 물건이네.
[띠링! 새로운주인 님이 1젠 후원! - 내가 알려 주려고 했는데.]
“예, 알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좀 더 위험에 빠졌으면 나섰을 수도.
‘한도초과면 훨씬 더 일찍 도와줬겠지만.’
한도초과가 조용하니 매니저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약간 빈자리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좀 얘기가 가능할 듯한 시청자라면…….
“새로운주인 님, 제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쓸 만한 곳이 있는 겁니까?”
-그냥 편하게 주인님이라고 불러.
-ㅋㅋㅋㅋㅋ
-닉 일부러 저렇게 지은 거임. 극혐.
“첫 글자 따서 그냥 새님으로 타협하시죠.”
-…….
-ㅋㅋㅋㅋㅋ 새.
-샌님이냨ㅋㅋㅋㅋㅋ
“새님, 답 안 주실 겁니까?”
대답이 없었다. 역시 한도초과와는 좀 다른 계열이었다.
“한도초과 님이 없어서 좀 아쉽네요. 항상 현명하게 도움도 줄 줄 아는 분이었는데.”
혹시 몰라서 한번 떠보았다.
그러자, 예상보다 빠른 반응이 돌아왔다.
-누가 안 알려 준대? 열쇠는 분명 쓸 곳이 있어. 하지만 지금은, 네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과연…….’
처음부터 약간 예상하긴 했지만 새로운주인은 한도초과에게 뭔가 자극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불편함인지 경쟁심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천수는 한 가지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대용으로는 충분해.’
한도초과와 비교당하기 싫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활용해 볼 수 있었다. 너무 자극하는 건 안 되겠지만.
“좋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단계로 가죠.”
공항이라는 넓은 공간과 자경단, 아이템을 비롯한 많은 요소들 때문에 헷갈리지만 이런 생존게임에서는 모든 걸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게 없었다.
단순화.
생존하기 위해서 가장 간단하게 선택해 볼 수 있는 걸 먼저 확인해야 한다.
크루즈 선에서 구명정을 떠올렸던 것처럼.
“천수야?”
가만히 서 있자니, 아무것도 모르는 송하나가 옆에서 이름을 불렀다.
고천수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하나야, 넌 헬기가 있는 곳으로 가.”
“헬기? 갑자기?”
갑자기 웬 헬기냐는 듯 송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종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
소방대원은 잡혀 있는데, 조종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시 헬기로 돌아가 있을지도 몰라.”
고천수는 헬기의 상태를 보고 다시 탈 수 없을 거라 판단했다.
헬기 조종사도 거기서 내려 공항으로 향했으니, 그 이상을 생각지는 않았던 것이다.
“헬기로 돌아가다니. 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송하나의 물음에 고천수는 담담하게 답했다.
조종사가 헬기에서 내려서 공항으로 향한 건 어디까지나 공항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였을 터.
공항의 상태가 그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다시 헬기로 돌아갔을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다시 쓸 수 없는 헬기여도 그 사람 눈에는 다를 수 있지.”
어떤 상태든 잠깐만이라도 비행해서 이 공항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되는 일이었다.
“가서 헬기에 아무도 없더라도 잠깐 거기서 대기하고 있어.”
“대기?”
“그래, 대기.”
송하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곤봉을 들어 보였다.
“혹시 나 거기다가 두고 가려는 건 아니지?”
-ㅋㅋㅋㅋㅋ 천수야, 말 잘해라.
-어머 얘. 천수 머갈통 후리려나 봐!
“내가 널 왜 두고 가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말 그대로 가서 대기하라는 거야. 그리고 혹시 뭐라도 나타나면 안으로 들어오고.”
“뭐?”
송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거기 뭣도 있는 거야?”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해 두는 거니까 알아만 둬.”
그러자 송하나는 굉장히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넌 뭘 할 건데?”
“나?”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 소방관을 찾으러 가 봐야지.”
“아.”
송하나는 괜한 걸 물었다는 듯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지. 구하러 가야 할 테니까.”
“…….”
“알았어. 그러면 난 거기 가서 대기하고 있을게. 신경 쓰지 말고.”
그러면서 그녀는 흑구를 가리켰다.
“얘는 어떻게 할까?”
“데려가. 너 혼자는 불안하니까.”
어차피 배지가 가진 기능을 생각하면 지금은 혼자서 행동하는 편이 나았다.
“됐지?”
고천수는 송하나를 떠밀었다.
“이제 가 봐.”
“으, 응.”
송하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흑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럼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꼭 와. 기다릴게.”
둘은 고천수를 두고 곧 자리에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그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천수 대단하네.
-저 여자도 계산해서 보낸 거 맞지?
고천수가 채팅창을 바라보자 시청자들이 더 떠들어댔다.
-헬기 조종사가 있으면 말로 잡아 둘 사람이 필요하고.
-뭔가 문제가 될 만한 게 나타나면 속도가 빠른 흑구가 얼른 경고를 해 주러 와 주겠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방대원 쪽으로 가는 건, 구해 주려는 건 아니지?
“…….”
송하나에게는 답변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뭐, 그렇죠.”
-역시 인성. ㅋㅋㅋㅋ
-소방대원이 잡혀 있는 곳에 이미 조종사가 잡혀 있을까 봐 그런 거네.
-ㅋㅋㅋㅋ 미친.
겸사하여 구할 수만 있다면 고천수도 그러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근데 진짜 괜찮겠어?
-괜히 무리했다가 큰일나면 안 되잖아.
“걱정 마세요, 형님들.”
고천수는 배지를 만지작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동선은 이미 다 계산해 뒀습니다.”
하지만 고천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준비한 그에게, 어떤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될지를.
***
“어,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소방대원은 1층 도착장 안쪽의 어느 창고를 향해 자신을 끌고 가고 있는 자경단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체 뭘 원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시끄러워!”
퍽!
단원 중 한 명이 소방대원을 때렸다.
“크, 헉…….”
신음을 내뱉는 소방대원에게 단원들이 소리쳤다.
“너 같은 외부인은 벌을 받아야 해.”
“그래도 법대로는 하는 거니까 바로 안 죽는 걸 다행인 줄 알라고.”
궤변이었다.
소방대원은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단원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흘렸다.
‘이 사람들, 제정신이 아니야.’
몰려 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죄다 어딘가 맛이 간 표정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일단 이 단원들은 딱 봐도 진짜 경찰은 아니었다.
그저 경찰복을 입고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었다.
“도착!”
단원 중 한 명이 외친 소리에 소방대원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건……!’
철창이었다.
하지만 사람용은 아니었다.
“들어가!”
단원들은 놀라고 있는 소방대원을 바로 철창 안으로 밀어넣었다.
“자, 잠깐…….”
반항해 봤지만 역시 소용은 없었다.
소방대원은 바로 대형 동물이나 사용할 법한 우리에 넣어졌다.
“운 좋은 줄 알라고. 저놈 거보다는 나으니까.”
단원의 말에 소방대원은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는 다른 작은 우리에 노인 한 명이 들어가 있었다.
“흐아, 흐아아아.”
심지어 그 노인은 이미 빈사 상태에 가까웠다. 구타의 흔적이 몸에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아아아……!”
소방대원이 절망하며 비명과도 같은 탄식을 내뱉는 사이, 단원들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뭐, 옆자리 친구랑 잘 지내고 있어 보라고.”
“우리는 담배나 한 대 빨고 올 테니까.”
그러더니 그들은 유유히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헉, 허억.”
소방대원은 그들이 사라진 틈을 타 얼른 철창을 살펴보았다.
동물을 항공으로 실어 나를 때 쓰던 것인지, 제법 견고해 보였다.
쾅!
“큭!”
몸으로 쳐 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단원들이 문도 잠가 놓아서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냥 공항을 통과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 사람, 따라갈걸……!”
헬기 조종사는 소방대원과 다른 곳으로 향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잡지도 않았다.
그는 정식 구조 헬기 조종사는 아니었다. 어쩌다 합류한 사람이었기다.
바다에서 같이 사람을 구한 것도, 소방대원이 저 사람을 구해야 헬기 조종도 계속 맡기겠다고 엄포를 놓자 마지못해 응했던 것이었다.
“믿었어야 했는데!”
하지만 엄포를 놓았다고 해도 오히려 그 사람이 역으로 협박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조종사가 그 한 명뿐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좀 믿고 따라붙었어도 될 텐데, 그러지 못해 결국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저, 저기요!”
소방대원은 옆 우리에 있는 노인에게 소리쳤다.
“제 말 들리나요?”
“으, 으음…….”
“들려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간 죽는 결말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 여기에 오래 계셨나요? 혹시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으.”
“둘이니까 뭔가 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알려 주…….”
“흐흐흐흐.”
순간, 갑자기 노인이 웃기 시작했다.
“흐흐흐흐흐.”
꿀꺽.
소방대원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노인은 계속 웃었다. 비좁은 우리 안에 웅크리고 앉아서는, 질척하고 비릿한 웃음을 계속 흘렸던 것이다.
“아.”
그리고 그 웃음이 끊겼을 때, 노인은 탄식처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