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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14화 (114/224)

114. 자경단 (2)

촤아악!

면세점 근처의 화장실.

“컥…….”

흑구에게 물려 얼굴이 피투성이였던 남자는, 고천수가 흩뿌리는 물을 맞고 겨우 눈을 떴다.

“아직 정신 차리려면 멀었어?”

고천수는 그렇게 물으며 남자의 눈을 붙잡고 크게 벌렸다.

“끄아악!”

“정신 차렸네.”

눈 근처의 상처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놔주며 고천수가 말했다.

“기침만 하고 도통 말을 안 하기에 죽은 줄 알았잖아.”

“끄, 헉.”

남자는 가늘게나마 겨우 다시 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여기가 어딘지 궁금해?”

고천수는 남자의 얼굴을 붙잡고 돌려 주었다.

“화장실이야, 화장실.”

그러면서 그는 손에 든 물통을 보여 주었다.

“공항이 좋기는 좋네. 물도 잘 나오고. 수조 시설이 건재하니까 너희도 머무를 수 있던 거겠지만.”

“뭐, 뭐야.”

남자는 악에 받친 듯 말했다.

“너, 뭐냐고.”

“나?”

고천수는 헛웃음을 뱉었다.

“뭔지 안다며. 너네가 외부인이라고 불렀잖아.”

“이 새끼가……!”

덜컹.

남자는 곧장 고천수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뭣……! 뭐야!”

그는 변기에 온몸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속옷만 입은 채로.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냐?”

고천수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너 지금 개털된 거야.”

그제야 남자는 고천수가 뭘 입고 있는지를 깨달은 듯했다.

“너, 너!”

“거, 참. 빨리도 아네.”

고천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슥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때. 어울리냐?”

“그건……!”

남자가 입고 있었던 경찰복이었다.

-ㅋㅋㅋㅋㅋ 캬. 천수 경찰복도 잘 어울리네.

-맞춤 옷이냐? 왤케 잘 맞음. ㅋㅋㅋ

-요놈이 알까? 천수가 얘 여기다가 데려다 놓느라 고생한 거.

“아, 형님들. 모양 빠지게.”

남들의 눈에 띄지 않는 적절한 심문 장소로 옮기기 위해 고천수는 힘들여서 남자를 여기까지 옮겨야 했다.

거기다가 면세점에서 챙겨 온 옷들로 매듭을 만들어 묶느라 또 고생을 해야 했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가 됐든지 간에, 내가 묻고 싶은 건 이거야.”

고천수는 남자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자경단이라니, 왜 멋대로 그딴 걸 만들고 운영하고 있단 말인가.

“그냥 여기 짱박혀서 지내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시끄러!”

남자는 반항적으로 외쳤다.

“너한테 내가 말해 줘야 할 의무는 없어.”

“하.”

고천수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의무는 없겠지? 하지만 무섭지 않아?”

“뭐, 뭐가.”

“너랑 같이 있는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 말에 그제야 깨달은 듯, 남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뭐야! 그 녀석은 어디 간 거야!”

“어디 갔겠어.”

고천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랑 똑같이 굴길래 보내 줬지.”

“뭐?!”

“솔직히 난 별로 시간을 쓰고 싶진 않아. 많이 바쁘거든. 지체하는 것도 질색이고.”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남자를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흘렸다.

“너도 말해 주지 않으면 나도 별 수 없지, 뭐.”

그리고 그의 손에는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냥 어디 가서 나에 대해서 떠들지 않게 입단속이라도 해야지.”

“자, 잠깐…….”

“아무튼 깡은 잘 봤다. 잘 가.”

“아니, 야!”

그렇게 당황하는 남자를 무시하고 고천수가 도끼를 위로 치켜들 때였다.

“잠까아아안!”

남자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왜?”

고천수가 멈칫하며 고개를 갸웃하자, 남자가 말했다.

“뭐, 뭔데, 궁금한 게!”

-ㅋㅋㅋㅋㅋㅋ 존나 나약해.

-기습해 놓고 지는 죽기 싫다는 거임? 언젠 천수 즉결 처분해 버리겠다더니.

-즉결 처분해 버리겠다규. ㅋㅋㅋㅋ

고천수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 그 친구처럼 되지는 않아서.”

솔직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면 고천수도 곤란했을 것이었다.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공항에서 보고 들은 거라고는 수상한 노숙자인 휴와 이 자경단이 전부였다.

이 공항이 현재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움직여야 고천수도 안전할 수 있었다.

물론 안전이란 것 자체가 이런 세계에서는 어폐에 가깝지만.

“그럼 차근차근 하나씩 물을게. 여기 지금 사람 많아?”

휴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맞닥뜨린 건 경찰 사칭범 두 명이 전부였다.

“마, 많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한, 100명 정도……?”

“100명?!”

고천수의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근데 다들 어디에 있는 거야? 안 보이던데.”

“1층에 있으니까.”

남자는 체념한 듯 말했다.

“다들 거기에 몰려 있어.”

“거기서 뭘 하는데?”

생활 공간이라면 이 위쪽도 잔뜩 있었다.

거기에만 모여 있을 필요가 없었다.

“버스를 기다리지.”

“버스?”

“그래.”

남자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7.5사단이 보내 주는 버스.”

7.5사단.

그 단어를 듣고 고천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그 녀석들하고 관련된 건가.’

같은 목적지인 제주도로 왔으니 앞으로 더 많이 듣게 될 놈들이었다.

‘앞으로는 더 골치 아파지겠네.’

여태까지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해 왔다지만, 제주도에서는 정면으로 마주칠 가능성이 컸다.

대비가 확실히 필요했다.

-근데 이놈은 너무 술술 털어놓는 거 아님?

-7.5사단이라고 그냥 말해 버리네.

-그러게. 커넥션이 있으면 입조심은 해야 할 텐디.

“형님들, 각 안 보입니까?”

고천수는 턱짓으로 남자를 가리켰다.

“이 새끼, 선민의식 같은 거 있는 겁니다.”

말해 줘 봤자 네가 가지지 못할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

7.5사단은 선별된 인원만 데려가려고 버스를 보낸다.

외부인인 너는 그 버스를 탈 티켓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야.”

고천수는 남자에게 말했다.

“그럼 외부인은 왜 공격하는 거야? 버스인지 뭔지 잘 타면 되잖아?”

“그야 이제 버스를 안 보내 주니까.”

남자는 다시 날 선 표정을 지었다.

“너 같이 출처도 모르는 놈들이 섞인 탓이야. 선별되지 않았던 놈들은 솎아내야 돼……!”

공포에 잠식됐던 광기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선별, 이라고?’

고천수는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래, 김하령도 그랬지.’

선택받지 못해서 그녀는 혼자 남아 있었다.

7.5사단은 사람을 골라 필요한 인원들만 데려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이놈은 선별됐었던 인원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7.5사단이 여기에 없다면 얘기는 뻔했다.

“너도 솎아내진 거 아냐?”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7.5사단이 널 여기에 데려다 놓고, 그냥 떠난 거 아니냐고.”

“뭐……?”

“이쪽으로 다시 버스 보내 주기로 한 거, 확실히 약속된 거 맞는 거야?”

고천수는 담담하게 물었지만, 남자는 뭔가 흥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내가 없는 얘기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뭐.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어깨를 으쓱하며 고천수는 한 가지를 더 질문했다.

“근데 그럼 여기에 있는 인원들은 다 너하고 생각이 같은 건가?”

그게 중요했다.

무련 100명의 인원이 있으니까.

“그래.”

남자는 입술을 이죽이며 말했다.

“다들 너 같은 놈들을 솎아내고 버스에 타길 기다리고 있지.”

“그렇구나.”

“근데 혹시 너도 몰래 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마.”

피를 뱉어내며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다들 1층 문 걸어 잠그고 있으니까.”

“…….”

고천수는 말없이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해했다.’

여긴 감옥형 스테이지였다.

수많은 간수들 사이에서 탈옥해야만 하는, 그런 종류의 서바이벌 게임.

“오지도 않을 버스 얘기를 참 길게도 얘기하네.”

다 알아냈기에, 고천수는 더 이상 시간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자기도 솎아내진, 떨거지 새끼가.”

“뭐?”

“버스 오면 니들끼리 순서 정해서 타려고 1층도 걸어 잠갔어? 활주로 쪽 통로는 열려 있던데, 무슨 통발이냐. 외부인 들어오면 그제야 잡아 올려서 대가리 깨 버리게.”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은 그대로 들어왔다가 죽는 덫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상종 못할 놈이었고만. 갑자기 달려와서 송하나 붙잡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이놈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면역이 아니라서 필요한 정보를 술술 불었다는 데 있었다.

“어쨌든 고맙다? 덕분에 좀 더 조심할 수 있게 됐어. 은혜는 갚을게.”

물론 일반적인 방식으로 갚을 수는 없었다.

“네 동료들 만나면 네가 얼마나 입을 잘 털었는지 알려 줄게.”

“뭐……?”

“선민의식만 갖고 있지 아주 그냥 잘 쫄아서 그냥 다 불어 버렸다고. 동료 팔아 버렸다고 말이야.”

“이 자식이……!”

팍!

그때, 고천수가 휘두른 도끼뿔이 남자의 얼굴에 박혔다.

“끄, 컥?”

“너 까먹었냐?”

고천수는 싸늘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너하고 난 적이야.”

남자가 즉결 처분을 운운했을 때부터, 그리고 고천수의 일행인 송하나를 실제로 죽일 뻔했을 때부터,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팍! 콱!

“네가 뭐로 뽑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이 좋아서 뽑혀 오지는 않았나 보네.”

파악!

도끼뿔을 몇 번이나 휘둘러 남자를 맞히고, 고천수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어떤 놈을 건들지 말아야 하는지 몰랐던 걸 보면 말이야.”

대답도 없었다.

-ㅋㅋㅋㅋㅋ 그러게 왜 나대가지고는.

-항상 이렇게 되어버린다니깐.

-끝장났네.

“후.”

고천수는 옆에 놔두었던 천으로 남자의 입을 둘러서 묶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입구에 있었던 송하나가 그를 맞았다.

“다 끝났어?”

“그래, 잘 처리했지.”

그러면서 고천수는 송하나의 차림새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품이 큰 경찰복 상의를 입고 있었다.

기절한 상태에서 깨지 않는 탓에 그냥 화장실의 다른 칸에 미리 처박아 놓은 다른 놈의 상의를 뺏어서 착용한 것이었다.

“넌 그거 안 크냐?”

“그냥저냥 괜찮아. 어차피 상의만 입은 거니까.”

바지는 근처 면세점에 있던 청색의 여성 유니폼의 것이었다.

색깔이 비슷해서 그리 상의와 그리 어긋난 조합은 아니었다.

“그래, 잘 어울려서 다행이네.”

고천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흑구는 어디 갔지?”

“흑구는……. 아! 저기 온다!”

송하나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흑구가 뭔가 반짝이는 것을 물고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뭐야, 이건.”

선글라스였다.

택을 보니 애완견용이어서 고천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흑구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거 씌워 달라는 거냐?”

흑구는 그렇다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ㅋㅋㅋㅋㅋ 흑구가 주인 닮아가네.

-요상한 것까지 비슷해지는 듯.

하늘에서 시켰던 일의 항의성 행동처럼도 보였지만, 흑구의 표정이 밝아 보여 고천수는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그래그래, 쓰고 싶으면 써라.”

슥.

선글라스 착용 완료.

흑구의 패션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근데 천수야, 이젠 뭐 할 거야?”

그때, 송하나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거 보면 여기도 위험한 거 같은데.”

맞는 말이었다. 고천수는 잠시 침음했다.

‘휴가 자경단 얘기만 했었지.’

100명이 전부 한통속은 아니고, 자경단이 강제로 다른 사람들을 통솔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휴 그놈도 믿을 만하지는 않지만.’

그냥 풀네임으로만 보면 문제가 없지만, 휴의 이름을 약자로 만들면 찝찝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기분 탓이면 좋으련만.’

고천수는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송하나, 따라와.”

고천수는 면세점으로 들어가 말했다.

“너도 나처럼 가방 하나 챙겨.”

각각의 가방 한 개씩은 필요했다.

그리고 필요한 건…….

“네 무기도 준비해야겠지.”

경찰복을 입고 있는 주제에 남자들은 곤봉조차 없었다.

7.5사단이 여기 있는 동안 무기를 다 수거했던 게 아닐까 싶지만, 어쨌거나 노획한 게 없으므로 뭐라도 만들어야 했다.

찰칵.

고천수는 체인백에서 체인만 따로 떼어내 송하나에게 건넸다.

“이거 손수건이라도 대서 손들에 둘러메. 반지 몇 개 끼는 것보다 강할 거야. 풀어서도 쓸 수 있을 거고.”

물론 이건 몬스터를 상대하라고 준비해 주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대인용.

“널 보고 방심하는 놈들이 달려들면 인중 때리는 용도로 주는 거야. 다른 객기는 부리지 마.”

그렇게 송하나와 같이 면세점을 빠져나온 고천수는, 이제 위를 올려다보았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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