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게 종말은 게임이다-106화 (106/224)

106. 송하나

“왜 이래, 이거.”

고천수가 엔진 레버를 조작해 보았지만 구명정은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래요? 뭐가 잘못됐나요?”

송하나가 놀란 듯 물었다.

고천수는 대답하지 않고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이…….’

날이 밝아 있었다. 날이 좀 어둡긴 했지만, 먹구름들 사이로 간간히 햇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도초과가 열었던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이랬는데도 아무 일도 없던 건가?’

고천수는 문으로 가 밖을 살펴보았다.

바다는 잔잔하기만 했다.

크라켄도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고천수 씨?”

“구명정이 고장 난 것 같습니다.”

고천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송하나를 돌아보며 답했다.

“망망대해에 떠 있게 됐다는 뜻이죠?”

“네?”

송하나는 엔진 레버 쪽으로 가 자신이 직접 그걸 조작해 보았다.

“아.”

레버를 움직여도 구명정이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고천수의 곁으로 다가와 다시 입을 열었다.

“어, 어쩌죠? 진짜 고장 났네요.”

“그러게요.”

보통 이럴 때는 승무원이 더 침착하게 대처해야 하지 않던가.

하지만 고천수는 송하나를 한심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당황하는 게 당연하지.’

고천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상태였다.

오래 자고 일어나서 피로는 좀 풀렸지만, 대신 골치 아파진 상황에 고천수는 이마가 다 지끈거렸다.

“한도초과 님.”

그녀를 불러 봤지만 채팅창에 반응은 없었다.

-팬 미팅 하고 나면 3일 후에나 채팅방에 돌아올 수 있을걸.

-대기 시청자로 빠져서 보고는 있을 테니까, 함 물어볼까?

-못 물어봄. 커뮤니티 갠톡도 막힘.

커뮤니티도 따로 있는 것이던가.

하긴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채팅방 외에도 시청자들끼리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건 고천수도 생각했었다.

-모임장에 호출하면 볼 수 있지 않나?

-오프에서?

-한도초과가 너희가 부른다고 나오겠냐. ㅋㅋㅋㅋ

‘오프? 오프라인?’

시청자들끼리는 실제로 볼 수도 있는 건가.

고천수는 탄식하면서 다시 구명정 안을 둘러보았다.

목이 몰라 구명정 수납 공간에 비치돼 있던 물을 꺼내 마시면서, 고천수는 보온용 천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뭐야, 너.”

들춰보자 거기에는 몸을 웅크리고 있는 흑구가 있었다.

“또 여기 들어가 있었냐?”

대체 한도초과가 얼마나 위압적으로 느껴졌기에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와. 너도 답답하잖아.”

그러고 보니 흑구의 얼굴에는 여전히 마스크가 씌어져 있었다.

고천수는 바로 손을 뻗어 흑구에게서 마스크를 제거해 주었다.

왈!

흑구가 얼굴을 털고는 한 번 짖어 보였다.

“그래,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네.”

고천수는 흑구의 입에도 물을 따라 주었다.

흑구는 위축되어 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잘도 물을 받아 마셨다.

“……참.”

물을 마시는 흑구를 보자니 고천수는 보급함에서 찾아냈던 통조림 캔을 떠올릴 수 있었다.

“너한테 줄 게 하나 있었지.”

고천수는 가지고 있던 통조림 캔을 꺼내, 곧장 따서 흑구 앞에 내려놓았다.

“맛있게 먹어.”

츄릅.

흑구는 주는 음식을 가릴 생각이 없는지 바로 통조림 캔에 주둥이를 박았다.

고천수는 그런 흑구를 놔두고 송하나를 돌아보았다.

“송하나 씨, 뭣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뭐, 뭔가요?”

송하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천수는 그런 그녀를 보면서 한숨을 흘렸다.

“아니, 왜 절 보면서 한숨을 쉬는 거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요.”

“네? 무슨 이유인데요!”

그 내용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고천수는 다른 내용이나 묻기로 했다.

“송하나 씨, 구명정이 고장 났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네? 갑자기요? 한숨을 쉰 이유는…….”

“그냥 이 상황에 답답해서 쉰 것뿐입니다. 우연히 송하나 씨 얼굴을 봤을 뿐이고요.”

고천수는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구명정이 고장 났을 때 대응 방안이 있습니까?”

송하나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고천수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아챈 듯 천천히 답했다.

“뭐…… 조난 신호에 의지하면서 잠시 버텨야겠죠. 여기 안에 있는 물자로.”

“조난 신호?”

“이 구명정에는 조난 신호를 보내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요. 위치 정보도 제공하죠.”

그 말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뱉었다.

송하나는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아뇨, 우스워서요.”

모든 게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조난 신호를 통해서 구조가 되기는 어려울 때가 많은 게 사실이었다.

그런데 크라켄이 유람선까지 집어삼킨 마당에, 이런 세계에서 구조 신호를 보고 남을 도와주러 올 이들이 있겠는가.

“다른 방법은 또 없습니까?”

“글쎄요……. 뭐라도 근처에 오면 조명탄을 쏘고 그래 봐야겠죠?”

대단히 신뢰가 가는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주변에 뭐라도 온다면 말이죠.”

고천수는 한숨과 함께 답하며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는 송하나에게 옆을 가리켰다.

“일단 에너지 쓰지 말고 앉으세요. 빠르게 구조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네, 뭐.”

권유에 따라 옆에 앉은 송하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저, 진짜 기억이 하나도 안 나네요.”

“기절하기 전 기억 말입니까?”

“네.”

송하나는 그게 못내 찝찝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기절하는 바람에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면 죄송하기도 하고요.”

“죄송할 게 뭐 있겠습니까? 자기 의지도 아니었는데.”

그보다는 그냥 바다에 떠 있는 것밖에 할 게 없다는 게 문제였다.

“송하나 씨, 혹시 특기 같은 거 있습니까?”

“네? 특기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는지 송하나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네, 특기. 아무거나 좋습니다.”

“왜 그런 걸…….”

“그냥 한번 말씀해 보시죠.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고천수의 닦달에 송하나는 무척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답을 해 주었다.

“음, 균형 감각?”

“균형 감각?”

“네, 어릴 때 체조를 해서 균형 감각이 좀 있어요.”

고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다른 거요? 그, 글쎄요.”

“판단력도 나쁘지 않아 보이던데.”

선장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 전부터 송하나는 크루즈 선이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걸 보면 기본적인 판단력도 나쁘지 않은 수준으로 보였다.

-소개팅하는 거임?

-취조겠지. 모솔아.

-ㅋㅋㅋㅋㅋㅋ

“형님들, 이건 그냥 조사일 뿐입니다.”

고천수는 송하나를 어떻게든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 말고 유일하게 남아 있는 생존자니까.’

당장 만들 수 있는 일행은 이 사람뿐이었다.

크루즈 선에서 제대로 건진 게 없는 만큼, 이 사람이라도 어떻게 써먹을 수 있으면 제대로 분석해 둘 필요가 있었다.

“송하나 씨, 혹시 그 균형 감각이라는 거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네?”

-ㅋㅋㅋㅋㅋ 여기서?

-천수 많이 심심한가 보네.

-이런 거 할 시간에 노라도 만들자…….

송하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걸 왜 보려고 하시는데요?”

“중요하니까요.”

돌려 말할 건 없었다.

“당분간 같이 지낼 것 같은데, 송하나 씨가 얼마나 생존 능력이 좋은지 아는 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으, 음.”

“장기자랑 하는 것 같아서 싫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잖아요. 징기자랑이라기 보단 오히려 뭔가 시험 보는 것 같아요.”

그 말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예, 시험 맞습니다.”

“네?”

“통과하시면 저도 가능한 송하나 씨의 생존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농담이 아니었다. 짐만 안 된다면, 서로 상부상조하게 될 테니까.

“판단은 송하나 씨가 하세요.”

“…….”

송하나는 쉽게 답하지 못하고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가 고천수의 능력을 모를 리는 없었다.

고천수는 정박하지도 않은 크루즈 선에 올라타 최하층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온, 전무후무한 실력을 가진 생존자였다.

시험이라는 말이 결코 우스갯소리로 들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정도예요.”

송하나는 갑자기 뒤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마치 풍차처럼 거꾸로 회전한 뒤 다시 똑바로 섰다.

-오.

-와, 관절이 무슨 액체로 되어있는 건가?

-겁나 유연하잖아, 어이!

고천수도 놀라서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엄청나잖아?’

숨겨져 있던 장기치고는 상상 이상이었다.

“됐나요?”

송하나는 살짝 창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게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아뇨, 대단합니다.”

잘 달리거나 힘만 강한 것도 좋지만, 생존을 위해선 균형 감각이 필요한 때도 분명 있었다.

‘다행이네.’

한도초과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왈!

그때, 통조림을 먹던 흑구가 고개를 치켜들며 갑자기 짖었다.

“뭐지?”

고천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소리는…….”

바깥에서부터 웬 커다란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설마!”

고천수는 천장의 해치 밖으로 나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부다다다다다다!

모터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돌아가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헬기?

-구조 헬기다!

-여기예요!

바다 쪽으로 비행하면 괜찮은 것인가.

헬기는 공중 몬스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

“송하나 씨!”

“예?”

“헬기입니다! 뭐 합니까!”

그 말에 눈을 크게 뜬 송하나가 구명정에서 조명탄 발사기를 찾아서 가져왔다.

“여기요!”

딸깍.

고천수는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조명탄을 쏘았다.

딸깍. 딸깍.

아니, 쏘려고 했다.

“뭐야.”

탄이 나가질 않았다.

고천수는 발사기를 열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송하나 씨! 탄이 없습니다!”

장전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고천수가 급하게 외치자 송하나는 서둘러 구명정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헬기는 저 멀리로 사라져갔다.

“서두르세요!”

“어, 없어요!”

허둥대던 송하나는 신호용 호루라기 하나를 찾아 측면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

송하나는 있는 힘껏 호루라기를 불었다.

그 짓이 장장 5초간 이어졌지만, 헬기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아.”

한숨을 내쉰 송하나가 다시 호루라기를 불려고 할 때, 해치에서 내려온 고천수가 그녀를 막았다.

“그만!”

헬기는 이미 떠났다.

“그만하세요.”

“5초간 불고 5초간 쉬고. 계속 반복을 해야…….”

“뭡니까, 그건. 구조 신호 매뉴얼입니까?”

고천수는 그녀에게서 호루라기를 빼앗으며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제기랄. 안 보였나.’

분명 아침이 되기는 했지만 아직 주변은 어둡기만 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기에, 하늘을 날고 있는 입장에서는 시야가 좁을 수 있었다.

‘이런 망할…….’

-헬기 엄청 급했나 보네.

-제주도 가는 길이었나.

하필 거리가 엄청 먼 것도 있었다.

회전 날개 소리 때문에 이쪽에서는 헬기를 확인하기 쉬워도, 거꾸로는 어려울 터였다.

“후.”

구명정에 있는 구조 신호기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하긴, 지금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한둘은 아닐 거라는 점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되는 게 아니면 누구도 도움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터였다.

고천수는 이를 악물며 송하나에게 말했다.

“이 주변에 괴물들이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확실하게 구조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건 주의하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조명탄도 없어서…….”

“그러게요. 조명탄은 어디 간 겁니까?”

구명정에 조명탄을 누락할 리는 없었다.

“저도 잘……. 아! 크루즈 선에서 누가 조명탄을 무기로 쓴 흔적이 있었어요.”

“무기로?”

“이 구명정에는 발사기도 두 개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는 걸 보면, 승무원 중에 꺼내간 사람이 있나 봐요.”

하필이면 여기서 꺼내 갔다니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었다.

츄릅.

상황이 나쁘게 돌아간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흑구는 다시 통조림 캔에 주둥이를 박았다.

‘팔자 좋네.’

다른 헬기가 와도 이러고 있다간 놓쳐 버린다.

구명정을 다시 움직이든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응?”

그러던 고천수는 순간 흑구를 보며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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