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한도초과 (3)
“흑구?”
구명정 구석에 놓여 있던 보온 덮개 안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흑구를 보며 고천수는 탄식을 흘렸다.
“왜 거기에…….”
잠시 정신이 없어서 흑구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흑구는 고천수가 신경을 썼든지 안 썼든지 간에 그냥 숨어 있던 걸로 보였다.
“설마 내가 좀비로 변했어서?”
그것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눈에 안 띄게 있던 거라면 이해가 가기는 했다.
끼잉.
근데 이건 뭘까.
흑구는 겁먹은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천수가 아끼는 개지?”
한도초과는 흑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봐.”
상냥한 부름이었지만 흑구에게는 그렇지 못한 듯했다.
흑구는 고개까지 뒤로 처박고 뒤로 주춤거렸다.
“대범해 보였는데, 실제로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네.”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흑구는 한도초과를 어떻게 보고 있기에 저러는 것일까.
찰방.
그때, 갑자기 파도소리가 크게 나며 구명정이 기우뚱거렸다.
“뭐, 뭐야.”
고천수는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달려가 해치 근처의 창문으로 밖을 살폈다.
“저건……!”
배 한 척이 곁을 지나치고 있었다.
크루즈 선까지는 아니어도, 꽤나 큰 크기의 유람선이었다.
구구구구구.
거대한 울림을 뱉으며 유람선은 구명정 근처를 지나갔다.
“큭.”
유람선은 이 구명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그냥 제 갈 길을 가며 계속해서 파도를 일으켰다.
-아, 매너 없네.
-여긴 보이지도 않나?
-불빛도 켰음. 그냥 보고도 무시하는 거.
“예의 없는 것들이 있나 보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한도초과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천장의 해치를 열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고천수의 물음에도 한도초과는 잠시간의 망설임도 없이 해치 밖으로 나가 유람선을 바라보았다.
반짝.
해치 방향으로 유람선의 조명이 향했다.
‘뭐지? 발견했나?’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웃음소리였다.
“뭐……?”
유람선의 갑판에 나와 있던 놈들이 이 구명정을 보고 미친 듯이 비웃고 있었다.
-뭐냐, 저거?
-다른 데서 온 배인 것 같은데.
-누가 그걸 몰라서 묻냐?
시청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무례한 놈들에게 불쾌함을 가진 듯했다.
“형님.”
고천수가 부르자 한도초과가 손을 아래로 내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괜찮아, 천수야. 쉬고 있어.”
“네?”
“잠깐이라도 쉬어야지.”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하기만 했다.
“지금은 굳이 네가 직접 나설 것까진 없어.”
채팅만 쓸 때는 그렇게나 조급하게 굴었던 한도초과가 맞는 걸까.
몸을 갖고 직접 참가하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여유롭게 행동하고 있었다.
“아하하! 저 작은 배 좀 봐!”
“야~! 그거 타고 어디로 가려고! 부산에는 갈 수 있겠어?!”
“밤바다 여행 잘해 보라고!”
유람선에서 터져 나오는 명백한 조롱의 외침.
적막을 가르는 그 소리를 들으며 고천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크루즈 선보다 큰 거 타지도 않은 놈들이…….”
당장이라도 길을 막아 주고 싶었지만 이 작은 구명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길을 막으려고 했다간, 오히려 부딪혀 완파될 것이 뻔했다.
아니, 그 이전에 이 구명정은 유람선으로 앞으로 가 진로를 수월하게 방해할 만큼 충분한 속도를 낼 수도 없었다.
“아, 우리 천수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겠다.”
그 순간에도 한도초과는 고천수의 입장에 이입하며, 파도를 따라 날려 오는 바닷바람에 머리카락이나 휘날리고 있었다.
구구구구…….
울림이 점점 옅어져 갔다.
구명정을 비추고 있던 조명도 멀어졌다.
유람선은 구명정에 탄 사람을 구할 생각도 않고 그대로 곁을 지나쳐 저 혼자 갈 길로 가고 있었다.
-쟤네 그대로 보내는 거?
-아니, 대적할 수단도 없긴 한데…….
-아! ㅋㅋㅋㅋㅋ 나, 알았다! 시발!
불쾌함을 드러내는 채팅이 가득하던 채팅방은, 어느새 웃음 표시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뭡니까? 형님들, 뭔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보며 고천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같이 아는 게 인지상정일 텐데요?”
-그냥 보고 있어.
-한도초과가 너 안 나서게 하고 싶다잖아.
그 말에 고천수는 한도초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쿵.
그때, 기분 나쁜 울림이 들렸다.
쿠궁.
“천수야.”
그러자 빠르게 사다리에서 내려온 한도초과가 고천수에게 말했다.
“네가 이거면 만족할까?”
그러면서 그녀는 구명정의 측면 문을 열어 버렸다.
쿠구구구구.
주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구명정이 넘실거리는 큰 파도에 휘청거리면서 고천수도 균형을 잃고 소리쳤다.
“형님! 문 닫…….”
하지만 고천수는 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열린 문을 통해서, 멀어져 가는 유람선 곁에 무언가 나타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저건?!”
푸아악! 푸악!
바다 수표면을 뚫고 여러 개의 촉수가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왔다.
“강 건너 불구경. 아니, 바다 위 물 구경이라고 해야 하나.”
한도초과는 문 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천수야, 잘 봐 둬. 제왕급 몬스터 중 하나니까.”
콰아아아앙!
촉수 하나가 유람선의 측면을 때렸다.
그 충격으로 휘청거린 유람선의 갑판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아마도 이 작은 구명정을 비웃던 사람들일 것이었다.
쾅! 콰앙!
다른 촉수들도 연이어 유람선의 뱃머리를 붙잡아 끌어내렸다.
거리는 멀지만 엄청난 비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제왕급 몬스터…….”
고천수도 저 몬스터의 존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정보창.”
[상시 정보 : 한 지역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정보 1 : 바다에 수상한 안개가 깔렸습니다. 작은 배에는 작은 위협이, 큰 배에는 큰 위협이 따릅니다.]
[정보 2 : 플레이어가 1회 사망했습니다. 숨겨진 칭호, ‘죽음을 알지 못했던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금부터 이에 대한 보상으로 실시간 정보 알람 기능을 제공합니다.]
정보의 내용이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정보창의 아래에는 작은 종 모양의 아이콘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보 2의 내용에 이끌려 그 종 모양을 클릭했더니 다음과 같은 알림이 나타났다.
[실시간 정보 알람 기능이 설정되었습니다. 이제 정보가 갱신되면 실시간으로 플레이어에게 알람이 가게 됩니다.]
“후.”
말이 숨겨진 칭호지 거의 농담 수준이지 않은가.
-죽음을 알지 못했던 자. ㅋㅋㅋㅋㅋ
-죽알못. ㅋㅋㅋㅋㅋ
-이런 것도 있었냨ㅋㅋㅋ
고천수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꾸가가가각!
촉수들이 유람선을 구겨 버리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 퍼졌다.
더욱 소름이 끼쳤던 건, 이 구명정이 유람선 근처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멈춰야겠습니다.”
고천수가 엔진 레버가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하니 한도초과가 갑자기 길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가면 저 괴물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크라켄? 괜찮아.”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볍게 입에 올리며 한도초과가 말했다.
“네 정보창에도 떠 있잖아.”
한도초과는 아직 고천수가 닫지 않은 정보창을 가리켰다.
“작은 배에는 작은 위협이, 큰 배는 큰 위협이.”
“설마.”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세이렌이 작은 위협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거에 비하면.”
한도초과가 작은 어깨를 으쓱했다.
“여기 세이렌은 자기가 기어오를 수 없는 배는 굳이 건들지 않거든. 이런 낮은 배가 아니었으면 인어 같이 생긴 세이렌이 굳이 건들지도 않았을 거야. 못 올라오니까.”
“그래도 큰 위협은 아직 남았습니다.”
정보창에는 큰 배에는 큰 위협이라고 써져 있지만, 저쪽으로 가면 위험한 건 이 배도 매한가지였다.
“정보를 좀 더 신뢰하는 게 어때?”
한도초과는 고천수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다시 문가로 끌어다 앉혔다.
“크라켄은 이런 작은 배에 별 관심 없어. 자기랑 맞먹는 상대를 좋아하는 거니까.”
“…….”
“지금은 쉬어, 천수야.”
그녀는 고천수를 달래듯이 말했다.
“여태 고생해서 너 지금 눈에 다크서클도 엄청 나. 거울 안 봤지?”
고천수는 그녀의 말에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다크서클이 손에 만져질 리는 없었지만, 순간 누적되어 있던 피로가 느껴지기는 했다.
“눈 좀 붙일래?”
그녀는 고천수에게 아주 달콤한 제안을 건네 왔다.
“밤인데 계속 깨어 있으면 힘들잖아. 좀 자.”
“예? 하지만…….”
고천수는 말대꾸를 하려다가 그만뒀다.
‘그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긴 해.’
아직 여정은 많이 남았다. 벌써 지치면 곤란한 만큼, 어쩌면 지금이 황금 같은 휴식의 기회인지도 몰랐다.
‘뭐, 그래.’
열핼 팬이라는 명패를 가지고 허를 찌르고 들어온 그녀가 탐탁지는 않지만, 현재 그녀가 가지고 있는 호의만큼은 충분히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진짜, 자도 될지 모르겠군요.”
밖에서 무려 크라켄이 날뛰고 있는 상황에서, 고천수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의자 위에 몸을 살짝 눕혔다.
“그런 것치고는 바로 한숨 잘 모양새인데?”
한도초과의 말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글쎄요. 잘 수 있을지.”
“걱정 마. 내가 그 정도 의지는 될 거 아냐.”
한도초과는 여유로운 말투로 주절거렸다.
“그치?”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열혈 팬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듯했다.
‘거, 참.’
그녀의 확실한 호의 덕분에 지금은 잠시 쉴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가지면서도, 고천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뭐가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고천수는 잠깐만 방심하면 날아갈 듯한 정신을 겨우 붙잡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형님, 혹시 다음에 빙의하려고 해도 그 여자의 몸이 필요한 겁니까?”
“응? 그건 아냐.”
한도초과는 천진하게 답했다.
“네가 알아서 하면 돼. 일행으로 삼을지 아닐지는, 네가 정하는 거지.”
마치 선택권을 주는 모습이었다.
“그렇군요.”
고마운 일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고천수는 이내 의식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한도초과가 그의 눈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불편했지만, 그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속마음을 토로하는 일은 없었다.
둘의 대화는 어이없게도 그걸로 끝이었다.
***
“끄응…….”
얼마나 지났을까.
“아, 머리야.”
고천수는 지끈거리는 이마로 손을 올렸다가 멈칫했다.
‘없다.’
눈가에 얹혀져 있던 한도초과의 손이 없었다.
고천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위를 쳐다봤다.
“응?”
한도초과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깨어 있지 않았다.
옆에 앉아 이쪽에 상체를 기울인 채 쌕쌕거리며 자고 있는 그녀를 보고 고천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님.”
한 번 불러 보았지만 반응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천수가 몸을 뒤척이던 그때, 한도초과는 놀란 듯 눈을 살짝 떴다.
“으, 음……?”
한도초과는 멍한 표정으로 고천수를 내려다보았다.
고천수도 그런 한도초과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응? ……응?!”
다만 한도초과는 이내 고천수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을 내놓았다.
“우, 우아아악!”
쾅!
갑자기 이마에 주먹을 내리친 한도초과 때문에 고천수는 그대로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 씁.”
고천수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그녀는 어느새 멀찍이 떨어진 채로 소리쳤다.
“뭐, 뭔가요? 왜 저랑 그렇게 가까이……!”
“하.”
상체를 일으킨 고천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허탈함이 가득했다.
‘한도초과가 아니네.’
어느새 그녀가 사라져 있었다.
눈앞에 있는 건, 승무원 송하나였다.
“저, 고천수 씨. 설명을 좀…….”
“소란 떨 거 없습니다.”
고천수는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 둘 다 기절했던 모양이니까.”
“기, 기절이요?”
“네. 그쪽은 먼저 기절해서 기억까지 지워졌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신을 공격하는 웬 괴물들하고 싸웠거든요.”
-임기응변 봐라. ㅋㅋㅋ
-이 자식은 이런 게 왜 이렇게 자연스럽지?
고천수는 송하나를 보며 넓게 손짓했다.
“보세요. 주영훈 상병도 희생돼서 없잖아요. 물에 빠졌는데, 결국 찾지도 못했습니다.”
“아.”
그제야 분위기 파악을 했다는 듯 송하나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몰랐으면 됐어요.”
고천수는 잠시 채팅창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인지 한도초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의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뭐야, 이건 또.”
구명정이 멈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