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한도초과 (2)
“큭?”
고천수는 그대로 송하나에게 떠밀리며 뒤로 넘어졌다.
“무슨……!”
가벼웠다.
놀라서 발이 꼬이지 않았다면 넘어지지도 않았을 정도로.
적개심 또한 느끼지 못했던 고천수의 눈에 보인 건, 어이없게도 발랄한 표정의 송하나였다.
“놀랐어?”
그녀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놀랐겠지. 암, 그렇고말구.”
“뭐, 뭡니까.”
“쉿.”
그녀는 고천수의 어깨를 짓누르며 얼굴을 가까이 했다.
“긴장했나 보네? 숨이 좀 거친 거 보니.”
파악!
고천수는 온힘을 줘서 송하나를 밀어내고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뭐야, 너.”
송하나가 아니었다.
뭔가 다르다는 것을 바로 알아챈 고천수는 그녀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나?”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고천수를 보면서도 그녀는 태연하기만 했다.
“너랑 잘 아는 사이인데.”
“나랑?”
[울부짖는정신병자 님이 금지어를 해제했습니다.]
-아, 시발. 이제야 해제하네.
-말이 금지어지, 다 막아 놨어가지고.
-이거 하려고 아주 그냥.
고천수는 새로 뜬 알림 문구에 시선을 가져갔다.
“뭐…….”
시청자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울부짖는정신병자가 무언가를 노리고 금지어를 설정해 뒀다는 뉘앙스였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대체……. 읏?!”
그때였다.
한눈을 파는 사이 그녀가 달려와 고천수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와! 가까이서 보니까 더 정감 있다! 천수가 짓는 우스꽝스러운 표정!”
“너, 뭐야! 누군데 이러는 거야!”
“누구긴 누구야.”
그녀는 고천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누나잖아.”
“누나?”
“한도초과.”
쿵.
고천수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한도…… 뭐?”
-ㅋㅋㅋㅋㅋ 시발.
-표정은 볼 만하네.
-아니, 팬 미팅에 우리가 이렇게 놀아나야 함?
시청자들의 채팅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녀가 고천수의 얼굴을 붙잡아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했기 때문이었다.
“한도초과라구.”
한도초과.
최초로 고천수의 열혈 팬으로 등극한 시청자가 자신이라고, 그녀가 지금 말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고천수는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부정했다.
시청자가 직접 이곳에 등장하다니,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말이 안 되긴 왜 안 돼?”
그녀는 고천수를 살짝 밀어서 거리를 두며 말했다.
“내가 너랑 이렇게 만나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그러면서 그녀는 지금껏 자신이 저질렀던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우선 얼마 없는 내 재산을 상당 부분 너한테 쏟아 넣었고, 그다음은 매니저를 꽂아 넣었어.”
“꽂아 넣었다고……?”
“어차피 네가 나한테 추천받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네가 알림으로 생명 위독 경고를 받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
“그게 무슨…….”
“너도 스킬 해금이 필요했듯이, 나도 ‘팬 미팅’ 기능을 사용하려면 조건을 풀어야 했거든. 그리고 그 조건이 바로 네가 그 알림을 받는 거였어.”
팬 미팅이라는 단어에 고천수가 숨을 삼키는 사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플레이어인 너에게만 게임 기능이 주어진 게 아니야. 우리한테도 그런 게 있지.”
미션 시스템이 이미 있긴 했지만, 그녀는 그런 소극적인 참여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네 앞에 나타날 수 있는 기능.”
그러면서 그녀는 고천수의 손을 살며시 붙잡아 올렸다.
“팬 미팅.”
고천수가 생명 위독 경고를 받아 풀렸다는 그 기능으로, 그녀는 고천수의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잠깐.”
고천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억누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매니저님이 설정해 놨다던 금지어는…….”
“맞아.”
그녀는 발랄하게 답했다.
“네가 죽을 위기에 처하더라도 다른 시청자들이 미리 예방할 수 없게 해 뒀어.”
고천수는 레드 좀비에게 긁혀 상처가 난 것이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시청자들은 고천수가 어떻게 다쳤는지를 알아도 말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매니저 잘라.
-솔직히 매니저가 모략 꾸미는 거 에바임. 이렇게 하면 플레이어가 모르잖아.
-온리원은 뭐 하냐? 이거 뭐라고 안 함?
“응, 매니저 못 잘라.”
그녀는 고천수가 보고 있는 채팅방을 함께 엿보며 말했다.
“내 동의 없으면 천수 혼자서 못 해.”
그랬던 거였다.
매니저를 뽑을 당시 너와 나, 둘만 있으면 매니저를 바꿀 수 있다고 했던 내용은 달리 말하면 한 명의 반대로 교체를 무산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
고천수는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틀림없어.’
한도초과.
동일인이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가 진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형님.”
“잠깐.”
그녀는 고천수의 말에 눈썹을 살짝 움찔거렸다.
“누나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부르는 거야?”
고천수는 시청자의 성별은 딱히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유일한 시청자였던 온리원에게 형님이라고 불렀기에, 다른 시청자들도 똑같이 대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직접 성별을 언급했다고 해도, 직접 본체를 확인한 게 아닌 이상 당장은 다르게 대할 필요가 없었다.
“……전 시청자는 형님으로 부르는 게 편합니다. 그보다, 형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뭔데?”
그녀가 눈을 맞추자 고천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마 직접 사인 한 장 받자고 이렇게까지 하신 건 아니겠죠?”
팬 미팅이고 뭐고 고천수는 알지 못했던 시스템이었다.
별다른 이득을 볼 수도 없는 크루즈 선에서 그가 무리를 해도 한도초과가 말리지 않았던 이유도 뒤늦게 알았다.
‘설계에 제대로 말렸다는 거지. 열혈 팬이라 방심했고.’
리커버리에 대해서 미리 알고 있었을 한도초과가, 그에게 안전한 죽음과 소생의 과정을 선사해 주려고 좀비 선물세트나 그곳을 이용했던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한 가지, 그가 듣지 못한 내용이 있었다.
“혹시 지금 여기에 완전히 현현한 겁니까?”
이렇게 나온 그녀가 채팅창의 제약에서 완전히 풀려났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천수 대단하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말했다.
“벌써부터 날 분석하려고 하고 있잖아?”
“내용을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고천수.”
그녀는 고천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난 그렇게 오래 있지는 못해. 그런 얘기 나누기엔 시간이 짧아. 원래 팬 미팅이란 게 그렇잖아?”
-1시간.
-겨우 그 시간 보려고 이딴 짓을 벌인 거.
-진짜 대단하긴 하다니깐.
그녀가 채팅창을 가리켰다.
“이 채팅 보이지? 그래, 1시간뿐이야. 심지어 이 시간을 얻기 위해서 다른 열혈 팬들의 동의도 필요했지.”
“……열혈 팬은 더 없으니까 동의 과정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군요.”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긴 하지. 아, 참.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이 상태라고 해서 딱히 뭔가를 더 미리 알려 주거나 그럴 수도 없어. 그냥 채팅만 칠 때랑 비슷해.”
그러면서도 그녀는 고천수의 귓가로 손을 올렸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예 없지는 않지.”
덥석.
그녀의 손이 고천수의 양쪽 귀를 가렸다.
어찌나 강하게 밀착시켰던지 바깥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뭡니까.”
고천수가 다소 매서운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자니, 그녀가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아아.
어디선가 구슬픈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꽈악.
그러자 그녀는 더욱 힘주어 고천수의 귀를 막았다.
‘이건…….’
고천수는 그녀가 뭔가를 듣지 않게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형님.”
고천수가 불렀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마주 본 채로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눈빛만이 말 대신 서로를 오갔다.
스윽.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천천히 고천수에게서 손을 떼 주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뭐였습니까.”
“세이렌.”
그녀는 무서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았다.
“노랫소리가 일정 데시벨 이상으로 들리면, 정신이 뺏겨서 확 붙잡혀 가.”
“정신계 몬스터도 있는 겁니까?”
고천수는 탄식을 뱉었다.
“난이도가 상상 이상이네요. 형님은 괜찮은 겁니까?”
“응. 빌려 쓰고 있는 몸은 약하지만, 정신은 내 거니까.”
그녀는 쉽게 대답하고는 엔진 레버가 있는 곳으로 가 나침판을 보고 구명정을 기동시키더니, 다시 자리로 가 앉았다.
툭툭.
“옆에 좀 앉을래?”
“예?”
“팬 미팅이라고 팬 미팅.”
그녀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없는 얘기로만 시간을 보낼 순 없잖아?”
“…….”
고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뭐야.’
안개 낀 밤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파도에 헤매는 구명정 속.
고천수에게 이 세계는 분명히 멸망해 가는 중이었다.
‘뭐 하자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팬 미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편안한 시간을 요구하고 있었다.
“뭐 해. 시간은 금방 가.”
그녀의 닦달에 고천수는 할 수 없이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천수는 눈에 담긴 힘이 엄청나네. 내가 읽지 못하는 뭔가를 계속 생각하는 것 같아.”
그녀가 그런 고천수를 똑바로 마주하면서 오랫동안 시선을 맞췄다.
-어이구. 눈빛 교환이라도 하냐?
-이거 열혈 팬 바이럴 아님?
-꼴 보기 싫으면 너도 열혈 팬하라는 건가.
시청자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지켜만 볼 때하고는 다르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세계는 이런 느낌이구나.”
“……어디 뭐, 다른 세계에서라도 오셨습니까?”
“흐음.”
그녀는 고천수를 올려다보며 눈을 빛냈다.
“역시 천수답네.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아.”
고천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달라.’
일반적인 사람이라기엔 묘한 이질감이 있었다.
팬 미팅이 마냥 편한 시간이 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고천수는 이게 무엇 때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세계가 다르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 바라보는 시선이 달랐다.
이 팬 미팅은 한도초과, 그녀에게만 나른하고 즐거운 시간일 뿐.
‘한도초과, 이번엔 내가 확실히 당했다.’
종말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시청자가 이렇게 등장할 수 있는 게 달갑지만은 않았다.
한도초과가 열혈 팬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접촉을 원할 뿐이라면, 고천수의 생존에 특별히 득이 될 리는 없었다.
플레이어와 시청자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어야 했다.
시청자가 플레이어를 쥐어잡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소비하려는 순간, 모든 일의 균형이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나한테 우호적인 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번엔 좀 과했다.
플레이어를 위험한 설계에 빠뜨릴 수 있는 유일한 열혈 팬.
혹시라도 그 지위가 뒤틀려 불상사를 일으킬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그녀에 대해서 뭐라도 더 알아내야 했다.
고천수는 주먹을 꾹 쥐며 입을 열었다.
“형님.”
“응?”
“형님과 볼 수 있는 건 이번 한 번뿐입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곧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 한 번으로는 너무 아쉬워서?”
“네, 뭐.”
“거짓말.”
그녀는 고천수의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내 이용 가치라도 본 거 아냐?”
다른 시청자들과 특별히 다른 스포를 할 수는 없어도 옆에서 물리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몸은 나약해도 정신계로는 무적.
분명 이용 가치는 있을지 모르지만, 고천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과연 온리원이 선택한 플레이어야.”
하지만 그녀는 그런 그를 오해한 듯 말했다.
“시청자를 실제 동료로 삼고 싶은 거야?”
-ㅋㅋㅋㅋ 미친.
-선 넘네.
-그게 됨?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듯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근데 가능할까? 또 죽을 정도까지 가야 하는 거 말이야.”
그건 해금 조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천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해금 조건이면서 발동 조건인 거군.’
팬 미팅은 또 할 수 있는 듯했다.
리커버리 스킬이 1회 남은 만큼, 그녀가 그걸 또 이용하려고 들까 봐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라, 왜 웃어?”
“다시 나타나실 수 있는 조건이 그게 전부인가 해서 말입니다. 뭔가 간단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쉽진 않아 보여서.”
“아.”
한도초과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하나 더 있긴 해. 팬 미팅은 3일에 한 번씩만 되거든.”
“그랬군요.”
그 말을 듣고 고천수는 잠시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고천수.”
그러자 그녀는 그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너무 이런 얘기만 하면 재미없어.”
그녀는 팬 미팅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그녀의 경고에 고천수는 숨을 삼켰다.
‘알고는 있지만…….’
고천수에게 이 팬 미팅은 돌발 이벤트였다.
좀비가 됐던 경험은 자기 몸을 제어할 수 없는 컷신에 강제당한 느낌도 남겼다.
통제 불능.
플레이어지만 실제 종말에 생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고천수는 제어가 안 되는 환경은 경계해야만 했다.
“후.”
그래도, 한도초과는 열혈 팬이었다.
배신한 게 아니라 단순히 팬심으로 여기까지 온 그녀를, 적의로 대할 수는 없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괜한 긴장을 드러내 일을 그르치는 건 좋지 않았다. 일단은 그녀가 지극히 바랐던 팬 미팅에 잠깐이라도 어울려 줄 필요가 있었다.
기껏해야 몇 십 분.
남은 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제가 그럼 어떤 걸 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하지만 정작 그녀는 고천수에게 특별한 걸 요구하지 않았다.
“그냥 이 상태가 좋아.”
적막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한도초과는 그저 고천수와 함께 있는 공간을 즐기며 양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침음했다.
‘잠깐만.’
한도초과가 그나마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 않아 다행이던 그때, 고천수의 눈에 보인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