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마스크를 써라 (2)
뒤이어 고천수가 합류한 일행은 가장 먼저 계단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천수가 송하나와 함께 올라왔던 바로 그 계단이었다.
“자, 제가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배영호가 앞장서서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방금 뭐임.
-문 열기 전에 살짝 천수 본 거 같은데.
-대놓고 봤음. 의식하는 듯.
‘의식?’
고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같이 살아서 돌아와야 판에 무슨 계단 내려가는 일에서부터 의식이란 말인가.
‘나야 좋지.’
보니까 스스로 나서서 위험한 일을 대신해 주게 생겼다.
그렇다면 고천수로서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천수가 좀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님?
-아아, 문은 이렇게 여는 것이다.
-문고리를 돌린다는 것은,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예.”
-ㅋㅋㅋㅋㅋ 좀 받아줭.
-상처.
상처고 뭐고 고천수는 지금 사실 굉장히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래층에는 아직 레드 좀비들이 있다고.’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었다.
이 계단을 다 타고 내려가 문을 열면, 몇 마리나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스윽.
자연스럽게 도끼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다.
“앗, 뭐, 뭡니까.”
“고천수 씨?”
그러자 승무원들이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너무 위협적으로 들지 말아 주세요.”
“괜히 쫄린다고요.”
“…….”
별 거에 다 쫄리는 인간들이었다.
고천수는 뒤늦게 어깨를 으쓱했다.
“계단 다 내려가면 괴물들과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요. 미리부터 준비하는 거죠.”
승무원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딴죽을 걸지는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닐 테니까.
서로에게 의심을 갖는 것보다 당장의 위협을 경계하는 게 우선이었다.
끼릭.
마침내 계단의 끝에 도착하자, 배영호가 밸브형 잠금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잠깐.”
고천수는 배영호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뭡니까.”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배영호를 보며 고천수는 입술 앞에 검지를 올렸다.
“쉬이잇.”
“뭐, 뭐…….”
“조용.”
그는 검지를 옮겨 배영호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으악! ㅋㅋㅋㅋㅋ
-아, 이 미친 새끼!
배영호도 경악하며 시청자와 같은 반응을 보이려는 찰나, 고천수는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
그러면서 그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배영호를 비롯한 일행들은 놀라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 망할.”
몇 초가 지난 뒤, 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요.”
두꺼운 철문이기는 하지만 딱히 방음 처리가 되어 있지는 않으니 밖의 소리가 들릴 거란 판단했던 그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이거 원래 안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까?”
천진하게 묻는 그를 보며 배영호가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지금 뭘…….”
“그놈들이 있나 확인한 겁니다.”
고천수는 배영호의 말을 잘라먹으며 대꾸했다.
“송하나 씨한테 못 들었습니까? 이쪽에 지금 괴물들이 몰려 있다고.”
레드 좀비가 근처에 있으면 문을 열자마자 한 대 얻어맞게 될 수도 있었다.
“살살 여세요. 살살.”
고천수는 배영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고 다시 뒤편으로 돌아갔다.
“뭔…….”
배영호는 여전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 채 그런 고천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ㅋㅋㅋㅋㅋ 아, 다들 표정 봐.
-뭐 하는 새끼지 싶은 듯.
-지적해 놓고 지는 맨 뒤로 감. 앜ㅋㅋㅋ
“조용히 하십쇼, 형님들.”
고천수의 입장에서는 그냥 본인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었다.
‘왜? 나 의식하고 있다면서?’
고천수는 자신에게 시선을 향하고 있는 배영호를 여유롭게 마주보았다.
‘선두에 설 거면 본인이 뭔 짓을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지.’
지금 이 배는 치기로 남과 경쟁을 펼칠 만한 놀이터가 아니었다.
문만 열어도 몬스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괜한 호승심에 시야가 가려지면 그보다 위험한 일이 없었다.
“크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배영호는 아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는 문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크읏!”
하지만 이미 그가 맡은 역할이 있었다.
결국 그는 밸브를 완전히 돌리고 문을 살짝 열었다.
끼익.
약간의 틈.
“하아.”
배영호가 긴장한 표정으로 그 틈 밖을 엿보며 문을 완전히 열어젖혔다.
“……후.”
문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배영호는 긴장을 털어내듯 한숨을 쉬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고천수도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뒤에서 관망만 했으면서. ㅋㅋㅋ
-다리에 힘 빡 준 거 보니까, 뭐 들어오면 바로 올라가려고 했네.
-와, 인성.
오해였다.
시청자들의 반응과는 다르게 고천수는 뭐가 들어오면 바로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슥.
배영호가 일행들을 향해 어색하게 손짓해 보였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앞장서는 배영호를 따라 모두가 천천히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아무것도 없네.’
흑구와 함께 뒤를 따라 걸으면서, 고천수는 주위를 둘러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어디로 간 거지?’
레드 좀비의 지능을 고려했을 때,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고천수는 계속해서 긴장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짝반짝.
잠시 마스크 탐색기를 열어 본 고천수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이 층에 있다고?’
화살표가 느리게 깜박거리며 어딘가를 가리키는 가운데, 그 아래에 떠 있는 문구가 ‘특급 방진 마스크 5개 이상. 이 층에 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설마…….’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화살표도 깜박임으로 반응하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화살표의 깜박이는 속도가 의미하는 것은…….
우뚝.
고천수가 멈춰 섰지만 일행들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계속 걸어갔다.
크아아아아.
그때였다.
어디선가 괴성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나타났나?!”
“어디에……!”
우왕좌왕하는 일행들을 보고 고천수는 서둘러 앞으로 달려가 입을 열었다.
“다들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난간 쪽으로 이동하세요!”
“예?”
“얼른!”
그렇게만 외치고 고천수는 혼자 난간으로 이동했다.
“뭘 하는…….”
일행들은 그런 고천수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크아아아아!
하지만 괴성이 한 번 더 들린 순간, 말이 없던 기관사가 먼저 고천수가 있는 난간으로 향함으로써 상황이 바뀌었다.
망설이던 나머지도 하나둘 고천수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런…….”
마지막까지 혼자 남아 쭈뼛거리던 배영호도 결국 고천수 쪽으로 달려와 물었다.
“뭐, 계획이라도 있는 겁니까?!”
“잘 들으세요.”
고천수는 굳은 표정으로 일행들에게 고했다.
“이건 오지선다입니다.”
일행들은 간격을 두고 난간 쪽에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고천수의 경험상 몬스터들이 잘 노리지 않는 흑구를 제외하고 인간만 따지면, 딱 다섯 명인 것이었다.
“괴물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누구 한 명을 골라 뛰어들겠죠.”
“그게 뭔…….”
“자.”
고천수는 브이자로 그린 손가락 두 개로 그의 눈을 가리킨 뒤, 연이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가리켰다.
잡소리 말고 상황을 주시하라는 의미였다.
“지금 달려올 놈들은 황소랑 비슷해요.”
흥분하면 일단 달려들고 본다.
그게 레드 좀비의 습성이었다.
“누구 한 명 골라서 처박으려고 할 테니까, 그때 피하라고요.”
이렇게까지 말해 줬는데 레드 좀비에게 처박혀서 죽으면 자연사였다.
고천수는 두 번 설명하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도 이미 그가 배영호에게 한 말을 다 엿들은 상태였다.
크아아!
나타났다.
레드 좀비 한 마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왁, 시발!”
승무원들이 놀라며 욕지거리를 내뱉은 탓에 레드 좀비가 확실하게 목표를 잡아 버렸다.
크아아아아!
저돌적인 몬스터에게 망설임이란 없었다.
그대로 달려오는 레드 좀비를 보고 고천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 있는 엑스트라 승무원 한 명의 팔을 꽉 붙잡았다.
“뭐, 뭐야!”
당연하게도 승무원은 당황하며 소리쳤다.
“놔, 놔!”
그사이 레드 좀비가 코앞까지 달려왔다.
“으아아아아!”
레드 좀비의 목표는 이 승무원.
고천수는 레드 좀비가 속도를 높이며 달려들자마자, 승무원을 세게 끌어당겼다.
콰장창!
곧장 이어지는 충돌음.
하지만 레드 좀비가 승무원의 몸을 박살낸 게 아니었다.
크아아아아…….
레드 좀비의 소리가 저 아래로 멀어졌다.
놀란 듯 몸을 움츠리고 있는 승무원을 놔두고, 고천수는 유리로 된 벽이 깨져 버린 난간 밖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있던 수층 높이의 수직 정원으로 떨어진 레드 좀비의 모습은, 이제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와, 겁나 세네.”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레드 좀비가 농성을 할 때부터 알았지만, 돌진력이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다들 봤죠?”
굳은 채로 서 있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고천수가 말했다.
“또 나타나면 방금처럼만 하면 돼요. 네.”
크아아!
크아아아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머지 두 마리 레드 좀비도 모습을 드러냈다.
일행들은 흠칫 놀라더니 급하게 다시 난간을 등지고 늘어섰다.
-ㅋㅋㅋㅋㅋㅋ 학습효과 보소.
-우리 천수 의심하던 그 사람들 맞나?
-응, 오지선다.
레드 좀비들은 괴성을 지르며 한꺼번에 이쪽으로 달려왔다.
크아아아!
크아아!
그리고 목표는…….
“왜! 왜!”
배영호였다.
“으아! 으아아아아!”
불행히도 배영호는 레드 좀비들의 이목을 더 확실히 끌어 버렸다.
두 마리의 레드 좀비는 배영호를 노리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쿠창!
일단 한 마리는 피해냈다.
먼저 달려든 레드 좀비 한 마리가 난간을 뚫고 아래로 추락했다.
“으아……!”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균형을 잃어버렸다.
연이어 달려든 레드 좀비에게는 몸을 내어줄 판이었다.
“어이구.”
옆에 서 있던 고천수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발로 차버렸다.
“크악!”
콰장창!
발에 떠밀린 배영호를 빗겨 간 레드 좀비가 이미 뚫려있던 난간 밖으로 고대로 추락했다.
-ㅋㅋㅋㅋㅋ 아, 미친 새끼.
-축구공마냥 까버리네, 시바. ㅋㅋㅋㅋ
바닥에 엎어져 있는 배영호를 보며 고천수는 태연하게 물었다.
“괜찮습니까?”
“콜록!”
바닥에 없어지며 먼지를 마신 배영호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놀란 표정으로 고천수를 돌아볼 뿐이었다.
“제가 안 찼으면 몸이 박살났을 겁니다.”
절대 차고 싶어서 찬 게 아니었다.
“알았으면 빨리 일어나세요. 그러고 있지 말고.”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천수는 마스크 탐색기로 다시 시선을 향하고 있었다.
“저는 찾을 게 좀 생겼는데, 같이 가실 분 있습니까?”
그 말에 일행들이 쉽게 대꾸하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뭘, 찾는다는 겁니까?”
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기관사가 고천수에게 물었다.
“마스크.”
그의 대답에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크?”
“우리가 아는 그 마스크 말입니까?”
“갑자기 왜 마스크를…….”
갑자기가 아니었다.
고천수는 자신의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손수건을 가리켰다.
“진짜 이걸로 될 것 같아서 묻는 겁니까?”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걸로 공기 중의 분진을 전부 막아낼 수는 없을 터였다.
“방금 전에 그놈들로 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늘어져 있다는 얘기, 다들 알고 있을 텐데요.”
레드 좀비도 겨우 피하면서, 고작해야 손수건을 얼굴에 매단 것으로 달려들면 터지는 놈을 막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방금 전에 바닥에 없어지면서 먼지도 그냥 처먹지 않았던가.
“그쪽들을 보니까 이 상태로는 안 될 것 같네요. 역시 좀 더 방비를 하고 가야겠습니다.”
마스크 탐색기에 나와 있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 층에 특급 방진 마스크가 있는 것이었다.
손수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왈!
멀뚱거리며 대답이 없는 다른 일행들과 다르게, 흑구만이 발랄한 느낌으로 한 번 짖어 보였다.
‘…….’
하지만 고천수는 그런 흑구를 보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미안하다, 흑구야.’
그로서는 흑구에게 미리 사과를 해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 세상은 인간 위주인 거라.’
고천수는 흑구보다 애정이 가지 않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