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무임승차는 환영받지 못한다 (4)
‘누구……?’
고천수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여자는 급하게 소리쳤다.
“이쪽으로! 얼른요!”
손짓을 따라 고천수 일행이 안쪽에 들어서자, 여자는 문을 닫고 얼른 잠가 버렸다.
쾅!
밖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쾅! 콰앙!
먹이를 놓친 레드 좀비들이 아직도 날뛰고 있는 것이었다.
“후.”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라고 해도 이 철문을 부수지는 못했다.
“괜찮을 거예요. 수압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문이니까요.”
한숨을 쉰 여자는 계속해서 쿵쾅거리는 문을 보며 아직 안심하기는 어렵겠다는 듯 위를 가리켰다.
“일단 위로 가요. 대화 나누기에 여기는 썩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더니 자신이 먼저 계단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잠깐, 당신 누구인데…….”
“일단 가죠, 기사님.”
의문부터 표하는 박창식을 말리며 고천수도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게다가 여자가 나타난 뒤 시청자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승무원 딱 적절할 때 만났네.
-이제 슬 다음 얘기가 진행되겠구먼.
-기대기대.
고천수는 채팅창에서 시선을 돌리며 위를 바라보았다.
계단은 끝이 바로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여기로 올라가면…….’
적어도 최상층에 가깝게는 올라갈 수 있을 듯했다.
-좀 높지 않음? 난 계단이 싫더라.
-그래봤자 몇 층 안 되는데 찡찡댈 거 없음.
여태까지의 길과 비교하면 고천수에게 이런 계단은 오히려 편했다.
걸음을 방해하는 요소는 딱히 없지 않은가.
고천수는 군말 없이 일행과 함께 여자를 따라갔다.
“후우.”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어떤 문 앞에 다다른 여자가 걸음을 멈춰 섰다.
“여기예요. 이쪽은 안전하니까 그렇게 도끼 좀 들지 마세요.”
그 말에도 고천수는 도끼를 치켜들고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요.”
이미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배였다.
여자가 이미 확인했던 장소라도 어떻게 변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음. 알겠어요.”
여자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문을 잡고 열어젖혔다.
끼익.
철문이 열리며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자, 없죠?”
먼저 나간 여자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그러자 흑구가 그녀 옆으로 가서는 주변을 뱅글뱅글 돌더니 한 번 왈! 하고 짖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인가.’
고천수는 조심스레 문 밖을 나와 고개를 돌렸다.
주변에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는 통로는 다 막아 뒀거든요.”
여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나오실래요? 문 좀 닫게.”
“아? 아, 알겠네.”
박창식은 그녀의 안내에 따라 고천수의 옆으로 왔다.
그녀는 곧장 문을 닫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늦었지만 환영할게요. 크루즈 선 나찰라 호에 탑승한 것을 환영합니다.”
상황이 이런 것치고는 꽤 침착한 태도에 고천수는 살짝 탄식을 흘렸다.
‘송하나?’
이제야 상의에 부착된 이름표에 시선이 갔다. 영어로 그냥 Song Ha Na라고 한국식으로 아주 정직하게 쓰여 있었다.
“이름표를 보니까 한국인인가 보네요.”
“아, 네. 외국인처럼 생겼나요?”
송하나는 고천수의 말을 듣고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고천수는 그 모습을 보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뇨, 그냥 우리나라 크루즈 선도 있나 했습니다.”
“우리나라 크루즈 선은 아니에요. 그냥 우리나라 국제 크루즈 선 유치 시범 사업에 지원받았는지 한국인 승무원을 많이 뽑아서 그래요.”
“그렇군요.”
신기하긴 했지만 지금 신경 쓰이는 부분은 아니었다.
영어로 너무 정직하게 이름표를 만들어 놨든 우리나라 크루즈 선이 아니든, 고천수에게 중요한 건 그녀의 의도였다.
“근데 저희는 왜 구했죠?”
승무원이니까 승객처럼 보이는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상대방이 도끼를 들고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보니까 그쪽은 혼자인 것 같은데.”
고천수가 의문을 표하자 송하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구했어요.”
“그냥?”
“상황 확인하러 내려갔던 건데 쫓기고 있길래요.”
요컨대 타이밍이 절묘해서 충동적으로 구했다는 얘기였다.
-좀 대책없긴 하네.
-근데 그게 얘 매력임.
-가이드 역할 같은 거 해줄 테니까 넘 의심하지 마.
고천수는 채팅방을 한 번 힐끗거린 뒤, 송하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구한 게 우리라서.”
“네, 맞아요. 근데 아니었어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해탈하기라도 한 걸까.
“어차피 이 배는 오래 가지 못할 거거든요.”
하지만 송하나는 고천수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내뱉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이죠?”
“얘기하자면 길어요. 설명이 필요하다면 일단 선교로 가시는 게 어때요?”
송하나는 팔을 접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참고로 선교는 배를 운용하는 장소예요. 지금 저희 대피실로 쓰고 있어요.”
“선교?”
고천수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거기에 아직 선장도 있습니까?”
“선장님이야 살아 계시죠. 항구 근처에 있을 때 상갑판에 올라서 손짓했던 것도 선장님인데요.”
그때 가만히 지켜보다가 들어갔던 게 선장이었단 말인가.
“그렇군요. 안내 좀 해 주시죠.”
고천수는 송하나를 재촉했다. 부두에 배를 대지도 않을 거면서 대체 왜 그랬는지 선장에게 이유를 물어야 했다.
“혹시 뭐, 원한 있으신 건 아니겠죠?”
살짝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송하나를 보며, 고천수는 도끼를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
선교.
송하나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승무원들이 깜짝 놀라며 시선을 보냈다.
“뭐, 뭐야, 너.”
“또 어디 다녀왔던 거야.”
“나가면 위험하다니까. 대체…….”
하지만 승무원들이 송하나를 질책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고천수 일행이 송하나의 뒤를 따라 등장했던 것이다.
“누, 누구?”
“누구야.”
승무원들이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러섰다.
고천수는 그런 그들을 슬쩍 훑어보았다.
‘다 우리나라 사람인가?’
숫자는 셋. 나이는 송하나와 비슷해 보였다.
함께 똘똘 뭉쳐서 살아남은 건지 전부 한국인인 듯했지만, 한 명이 복장이 좀 다르긴 했다.
-한 명은 승무원이 아닌가?
-작업복이네.
-기관사잖아, 딱 봐도.
고천수는 검은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남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확실히 접객용 유니폼이 아니었다.
눈여겨 둘 부분이었다.
“선장님!”
송하나는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앞쪽을 향해 손을 들고 외쳤다.
그러자 전면의 창을 내다보고 있던, 하얀 턱수염이 인상적인 중년의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그가 하얀 복장을 입고 있는 걸 보고 고천수는 살짝 탄식했다.
‘그래, 맞아.’
크루즈 선 갑판 위에 선 채 부두를 향해 손을 흔들었던 정체불명의 사람.
동일인물이라고 추측되는 그가 천천히 고천수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아, 러시안이시지만 걱정 마세요.”
물러설까 봐 노파심이 났는지 옆에서 송하나가 끼어들며 알릴 때였다.
“……생존자가 있었군요.”
선장은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직접 구해 드린 게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고천수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짓고 있자니 송하나가 설명했다.
“다섯 개 국어가 가능하신 분이거든요. 그중에 우리나라말도 포함되고요.”
“그렇군요. 잘됐네요.”
고천수는 선장에게 손을 내밀며 자신을 소개했다.
“고천수라고 합니다. 배에 탄 지 얼마 안 된 승객이죠.”
당돌한 그의 태도를 보며 선장이 의문스럽게 중얼거렸다.
“배에 탄 지 얼마 안 된……?”
“포항에서 탔으니까요.”
그 말에 선장이 눈을 크게 떴다.
“포항?!”
-ㅋㅋㅋㅋㅋ 무임승차 고백.
-왜 말함.
-돈 내라고 하는 거 아님? ㅋㅋㅋㅋ
하지만 다행히도 선장이 고천수에게 요금을 요구할 일은 없었다.
“그럴 수가! 거기서 올라탔단 말입니까?”
“예, 왜 그렇게 놀라시죠?”
표정이 바뀌며 흥분하는 선장을 보고 고천수는 태연하게 반문했다.
“크레인 기둥을 배 쪽으로 뻗은 건 아셨을 텐데요.”
“그, 그 부분은 확인했지만, 말 그대로 그 사실만 확인했을 뿐입니다. 설마 그걸로 탑승에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여기까지 오실 줄은…….”
그러니까 뭐가 됐든 생존하지는 못했을 거라 예상했던 것이었다.
“제가 좀 쉽게 안 죽어서요.”
고천수는 악수를 하지 못한 손을 회수하며 사과했다.
“일단 저도 무임승차를 한 건에 대해서는 죄송할 수밖에 없네요.”
“아…….”
“이걸로 서로 소개가 끝났다면 바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크루즈 선은 포항 부두에 정박하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사람을 놀리는 게 아니라면 그 위치에 댈 이유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고천수의 표정은 싸늘했다.
“장난치려고 배를 그렇게 대 놓은 겁니까?”
배가 어중간한 위치에 있어서 그쪽에 있던 사람들이 탑승하기가 힘들었다.
부두에 배를 대기가 위험했다는 점은 고천수도 알고 있었다.
아래층에 좀비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구명정을 띄워 주기도 어려웠을 터.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있었다.
“위험했으면 그냥 다 그만두고 떠났으면 될 텐데.”
크루즈 선이 있던 위치를 생각하면, 사실상 그림의 떡과 다를 바 없었다.
고천수가 기지를 발휘하지 못했다면 아무도 이 크루즈 선에 새로 탑승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크, 흐음.”
선장이 당황하며 주춤했다.
고천수는 그에게 답을 요구하듯 가만히 노려보았다.
“저, 고천수 씨?”
갑작스럽게 변한 기류에 당황한 것은 송하나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녀는 고천수의 어깨를 살짝 붙잡으며 말했다.
“화, 화나신 건 알겠는데요. 조금 진정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요. 진정합시다.”
다른 승무원들이 다가와 고천수와 선장 사이에 끼어들 듯 서며 말했다.
“배를 거기에 댔다간 다 죽을 판이었습니다.”
“크루즈 선은 그렇게 기동력이 좋지 않아요.”
“우리도 그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단 말입니다.”
억울함이 느껴지는 언사였다.
하지만 고천수는 선장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엑스트라는 빠져.’
한국말이 가능한, 이곳에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
이렇게까지 튀면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중요한 정보는 이 선장이 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 사과하겠습니다.”
끝내 고천수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한 선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이유?”
“그게…….”
선장은 눈을 살짝 돌렸다.
-눈치 보네.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거지~.
-ㅋㅋㅋㅋ 아, 심문 마렵네.
“하.”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예, 그래요. 구하고 싶었는데 배를 댈 용기는 없었다. 그 말이군요. 하긴 저랑 있던 군인들도 힘을 못 썼을 정도니까. 잘 알았습니다.”
“……으, 음.”
“일단 됐고, 물이나 한 잔 주시겠습니까?”
고천수는 주변에 있는 의자에 가 앉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올라오니까 목이 말라서.”
“아니, 당신! 배에 멋대로 올라탔으면서 선장님께 너무 무례한 거 아닙니까?”
“그래요!”
근처에 있던 승무원들이 고천수에게 불만을 토해냈다. 하지만 고천수는 그들의 태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눈썹만 치켜떴을 뿐이었다.
-천수 얼굴 봐. ㅋㅋㅋㅋ
-생선 대가리 카레 봤을 때 표정. ㅋㅋㅋ
“물 한 잔 달라는 게 그렇게 큰 무례입니까?”
아직 뭐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냥 선장이 혼자서 반응한 것뿐이었다.
“싫으면 말고요.”
고천수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승무원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상황을 정리하려고 나선 것은 역시 선장이었다.
“괘, 괜찮습니다. 이 분도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고생하셨을 테니까요. 물 한 잔 가져다 주시죠. 여기에 있는 거 말고, 밖에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하지만…….”
“부탁합니다.”
선장의 말에 승무원들은 쭈뼛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중 하나가 나가서 가져오겠습니다.”
“다 같이 다녀오세요.”
선장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처럼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요.”
“예? 하지만 냉장고까지는 안전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다 나가면 선장님 안전이…….”
“다녀오세요.”
물러섬은 없었다. 선장은 승무원들 내보내기로 결정을 내린 모습이었다.
이미 ‘군인’ 얘기를 할 때 선장과 눈빛을 나눈 고천수는 옆에 있는 박창식에게 말했다.
“기사님, 흑구랑 잠시 승무원 분들 호위 좀 맡아 주세요. 누구라도 안전하게.”
이제 무임승차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