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무임승차는 환영받지 못한다 (1)
“후우.”
크루즈 선 상부 1층.
안전하게 난간 안으로 올라선 고천수의 일행이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서 살아났다니 믿기지 않는군.”
박창식이 고개를 저으며 난간에 몸을 기댔다.
“개 같은 군인들 때문에 아주 작살이 날 뻔했는데 말이야.”
그의 말에 주영훈 상병이 몸을 움찔했다.
“아니아니, 자네 말고 말이야.”
박창식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 다른 군인들 있잖아. 민간인들을 죄다 미끼로 쓰더라니까.”
“미끼?”
차동진이 박창식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박창식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봤으면 다행으로 생각하쇼. 솔직히 봐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기사님, 그럼 기사님 말고는 아무도 산 사람이 없는 겁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박창식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지. 죄다 미끼로 썼다니깐.”
“다 미끼로 쓸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죠.”
“물론 일부는 살리려고 하는 것 같았어. 근데 위험해지니까 죄다 내던져 버린 거지.”
박창식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우연히 짐차 하나를 맡아서 산 거라니까. 혼자 운전 안 했으면 나도 어쨌을지 몰라. 진짜 망할 군인 놈들 같으니.”
“저, 기사님.”
고천수가 눈짓으로 주영훈 상병을 가리키자 박창식이 흠칫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 미안하네. 다 싸잡아서 욕하는 건 아니니까. 당연히 이쪽 군인은 다르지. 나도 다 봤으니까.”
박창식은 그러면서 작업대에 오르면서 봤던 사람을 언급했다.
“크레인에 군인 한 명 타 있던데. 공군이었지? 덕분에 여기까지 왔어.”
“진 소령님. 좋은 분이셨습니다.”
주영훈 상병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답했다.
둘을 지켜보던 차동진은 한숨을 살짝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그 친구는 우리를 살린 것에 보람을 느꼈을 겁니다. 계속 살아남길 바라기도 했겠죠.”
그러더니 차동진은 크루즈 선을 쭉 올려다보았다.
“아직 우리가 완전히 살아남았다고 보긴 힘들지 않겠습니까? 이 배, 정체불명인데.”
그 말대로였다.
고천수도 고개를 들어 크루즈 선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위험하다고 했지.’
이 크루즈 선도 정상적인 상태는 아닌 게 분명했다.
-그 손 흔들던 사람 몇 층에 있었지?-제일 꼭대기에 있었을걸.
-그럼 거기로 가보는 게 낫지 않나?
고천수도 그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현재 배 상태를 알려면 가 볼 곳이 있겠죠.”
고천수가 입을 열자 모두가 시선을 보내왔다.
그러자 그는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그곳은 배 앞 쪽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었다.
“저기가 어딘데?”
박창식이 의문을 표하자 차동진이 대신 대답했다.
“조타실이 있는 곳이겠죠.”
“조타실?”
“보통 저기에 위치하고 있으니까요.”
그 말대로였다. 고천수는 둘의 대화에 끼어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배가 움직이는 걸 보면 조타실이랑 기관실에 사람이 있는 거겠죠. 선장이 살아 있다면 이 배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알기 쉬울 겁니다.”
다만 조타실로 보이는 곳은 겉으로 보기엔 상부 10층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서 저 위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좀 불안하긴 허네.”
박창식이 침을 꼴깍 삼키며 중얼거렸다.
고천수도 거기에 공감하기는 했다. 수천 명이 타는 크루즈 선치고는 너무 조용했다.
이런 곳에서 움직여야 한다면 불안감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가죠, 여러분.”
어쨌거나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천수가 손짓하자 일행이 천천히 발을 뗐다.
‘일단 여기가 상부 1층…….’
갑판 위에 있는 층 중에서는 가장 아래에 있는 층이었다.
조타실이 있는 곳까지 올라가려면 꽤나 고생을 해야할 듯하긴 했다.
“와.”
하지만 그런 고생을 해야하는 것과는 별개로, 고천수는 1층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뭐야.”
마치 호텔 로비와 같은 공간.
고천수가 실제로 본 적이 있던 배의 내부와는 완전히 다른 인테리어가 나타났다.
-ㅋㅋㅋㅋㅋ 이런 거 첨 타보죠.
-죽이네.
-천수가 크루즈 선을 다 타보고…… 형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시청자들의 호들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주변은 화사했다. 고천수는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뱅글뱅글 돌다가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들었다.
“후. 만끽은 끝났습니다.”
고천수는 설렘 대신 긴장을 택했다.
“뭐라도 나오면 조져 버리겠습니다.”
-어휴. ㅋㅋㅋ
-도끼로 뚝배기 깨버리는 거 즐길 때부터 이런 변태인 줄은 알았지만…….
“형님, 도끼는 사랑입니다.”
총이 통하지 않을 상대에게도 이 도끼는 먹힌다.
쉽게 버릴 수 없던 아이템이었다.
“잠깐.”
그렇게 뱃머리 쪽으로 향하려는 고천수 앞으로 차동진이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보시죠.”
“뭐죠?”
물음표를 그리는 고천수를 보며, 차동진은 뒤를 가리키며 답했다.
“누군가 있었습니다.”
“예?”
고천수가 차동진이 가리킨 곳을 빠르게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만.”
“분명히 있었습니다.”
확신을 표하는 차동진을 보며 고천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있었든 지금 상관할 건 아닙니다.”
어차피 크루즈 선에 올라탈 때부터 누군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이까지 일일이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냥 승객이겠죠. 아니었다면 진즉에 우리한테 달려들었을 테니까.”
고천수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차동진이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린애였던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저는 여기서 살펴보고 가겠습니다.”
“아나, 저기요.”
고천수는 차동진을 마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은 같이 행동하는 게 좋아요. 어린애였는지 어린애처럼 보인 건지 어떻게 압니까?”
소리만 듣고 달려들지는 않은 걸 보면 적어도 사일런트 걸 같은 건 아니겠지만, 위협 요인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차동진 씨, 진 소령님이 살려 주신 목숨입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주세요.”
경고했지만 차동진은 망설이는 눈치였다.
‘제기랄.’
고천수는 차동진의 성향을 알아챘다.
‘겁나 이타적이다 이건가.’
진 소령이 거기에 올지 알 수 없었음에도 기다렸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정말 어쩔 수 없지 않은 이상은, 남을 돕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사람인 듯했다.
‘할 수 없지.’
이런 성격은 데리고 다녀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차라리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주는 게 나았다.
“좋습니다.”
고천수는 손짓하며 말했다.
“차동진 씨가 원하는 대로 하세요. 대신 어떻게 되든 책임은 안 집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차동진이 반색하며 답했다.
“꼭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될 테니까요. 고천수 씨 은혜도 잊지 않겠습니다.”
“아, 예…….”
“그럼.”
차동진은 뒤돌아 빠르게 걸어갔다.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주영훈 상병과 박창식이 시선을 보내왔다.
“나중에 또 볼 수 있겠죠.”
고천수가 어깨를 으쓱하려니 이번엔 주영훈 상병이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럼 저도…….”
“예?”
고천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차동진 씨 따라가겠다는 겁니까?”
“혼자 가면 위험할 테니까요.”
아주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진 소령님 친구 분이시니까, 제가 챙겨 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아, 참…….”
-부두에서 우왕좌왕하던 그 군인이 맞나?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고천수는 주영훈 상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떨리는 걸 보니 갑자기 겁이 사라진 건 아닌 듯하고, 다만 진 소령의 죽음에 부채 의식을 져 버린 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앗, 네!”
“가서 잘 챙겨 주세요.”
이번에도 고천수는 붙잡지 않았다. 주영훈 상병은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차동진이 향한 곳으로 사라졌다.
“괜찮나?”
박창식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도 될지…….”
“안 될 건 없죠.”
처음 오는 장소에서는 합이 잘 맞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다면 서로 다른 길을 개척해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운이 좋아야 하겠지만.
“기사님은 저랑 합 좀 맞춰 보시지 않았습니까?”
“합?”
“예. 이 친구랑 같이.”
고천수는 가만히 서 있는 흑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에 남은 셋은 함께 전투를 치러 봤던 경험이 있었다.
서로의 스타일을 한 번 알게 해 줬다는 점에서, 그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버스 한 번 태워 주세요, 기사님.”
고천수는 농담처럼 한 번 내뱉고는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
상부 2층.
계단을 올라와서 맞닥뜨린 공간은 마치 쇼핑몰과 같은 공간이었다.
“이야.”
말이 2층이지 위로 몇 층이나 뚫려서 연결된 복합 놀이 시설이었다.
“진짜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거 타고 다니는 건가.”
종말 같은 분위기에서나 이런 배에 타 보게 됐다니 고천수는 그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천수, 저기 좀 보게.”
박창식이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설치돼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저거 타면 바로 몇 층 올라가겠는데?”
“그렇네요. 얼른 가죠.”
고천수는 걸음을 옮기면서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다.
-근데 승객들 다 어디 감?
-안 탄 건가?
-스읍. ㅋㅋㅋㅋ 좋지 않은데.
그 말대로였다. 크루즈 선이라면 사람들이 제법 타 있을 만한데 눈에 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현재로서는 차동진이 봤다는 그 어린애가 전부였다.
‘겁나 불안해.’
승객들이 안 탄 배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분명 타 있던 배인 만큼 승무원 정도는 있어야 정상일 듯했다.
크아아아아.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근처에서 낯익은 존재가 하나 나타났다.
“이, 이봐! 저기!”
“네, 보고 있습니다.”
깜짝 놀라며 손가락을 뻗는 박창식을 보고 고천수는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컴온 베이비.”
크아아아아!
좀비가 바로 뛰어와 고천수를 노렸다.
[어그로 1 - 09:59]
콰직!
좀비의 이빨이 그에게 닿을 일은 없었다.
먼저 휘둘러진 도끼가 좀비의 머리를 수박처럼 쪼개 버렸다.
촤악.
좀비는 달려오던 관성 그대로 무릎을 꺾으며 엎어졌다.
-꿇어라.
-그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니까…….
콱!
고천수는 박힌 도끼를 빼내고 좀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와이안 셔츠…….’
승무원 복장은 아니었다.
“이거, 승객이 타 있던 것 같은데.”
박창식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 고천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네요. 승객이 타 있던 게 맞네요.”
배의 체급을 생각했을 때 탑승할 수 있는 인원은 2천 명 정도까지는 예상할 수 있었다.
“형님들, 다 타진 않았겠죠?”
-ㅋㅋㅋㅋㅋ
-전부 좀비됐을까봐 무섭냐.
-몇 천 마리 어그로 끌면 ㅗㅜㅑ.
좀비를 상대라면 어그로가 제격이기는 하지만 그게 무적은 아니었다.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모르는 놈들이 기습적으로 튀어나오면 어그로고 뭐고 그냥 위험했다.
“그냥 구명정 타고 갈까요, 형님들?”
-ㅋㅋㅋㅋㅋ 제주도까지?
-부산까지만 가려고 해도 작살날걸.
-해양 몬스터 하나 만나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하.”
바다에 거지 같은 몬스터들이 즐비하다면 확실히 구명정은 체급 때문에 위험했다.
크루즈 선은 적어도 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이 불운을 맞은 이후에 매우 강한 형태로 몸체를 갖도록 발전했다.
해양 몬스터들의 공격을 방어해야 한다면 그냥 여기에 타고 있는 게 나았다.
구명정은 빨라 봤자 이 크루즈 선보다 조금 빠를 뿐이었다. 그 속력으로는 어차피 뭐가 나타났을 때 어디로 도망갈 수도 없었다.
“기사님, 여기서 무기 하나 챙기시죠.”
박창식은 아직 무기가 없었다. 위로 올라가면 뭐랑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 무기는 챙겨야 했다.
“내가?”
“네, 보니까 잘 싸우실 것 같던데.”
중대장한테 총을 냅다 쏴 버리는 깡도 확인했겠다, 무기만 쥐여 주면 뭐라도 좀 해낼 듯싶었다.
“뭐, 알았어. 나도 마침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면서 박창식은 근처에 있는 옷 상점으로 들어갔다.
“뭐지. 옷은 왜…….”
고천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흑구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좋아.”
그는 흑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것도 하나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