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크루즈 선 (1)
-ㅋㅋㅋㅋㅋ 방법 없다.
-배 무조건 타야 함.
-난 한때 선장이 꿈이었지.
흔들림이 계속되는 땅을 겨우 견뎌내며 차가 미친 듯이 달려 나갔다.
“얼마까지 버틸 수 있지?”
진 소령의 물음에 운전병이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군 생활 끝나나.
-ㅋㅋㅋㅋㅋㅋ
“최대한 빨리 달려 주세요!”
고천수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빅 바디의 두상들은 멀어져 가고 있었다.
진원지를 벗어나자 차도 조금씩 균형을 찾아갔다.
삐그덕.
대신 뭔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불안감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아 씨, 뭘 멀쩡하게 타고 가지를 못하네.’
종말 게임 특징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겪어 보니 아주 성가시다는 점에서, 고천수는 정말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
“후우.”
빅 바디의 모습이 멀어지자 진 소령이 잠깐이나마 한숨을 돌렸다.
“죽다 살았군요.”
“그러게요.”
잠시 시간이 났다.
차에서 내리면 할 일이 많다는 점에서, 고천수는 이 시간을 그냥 비워 두지는 않기로 했다.
“소령님.”
“네.”
“제가 준이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말이죠.”
고천수는 박준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꺼내들었다.
“공군 높으신 분이 무슨 군단장님과 통화를 했었다고.”
“아.”
진 소령은 살짝 탄식하며 말했다.
“그 얘기 말이군요.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직접 연락하신 게 아닙니까?”
“네, 제가 아닙니다. 통신기지반에서 그쪽 대대장님이 우연히 연락을 받으셨습니다.”
“혹시 무슨 내용이었는지, 저도 알아도 됩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진 소령이 살짝 당황하며 반문했다.
“고천수 씨한테 알려 달라는 겁니까?”
“다 알려 달라곤 안 합니다.”
다만 군인들이 어떤 계획을 갖고 움직이고 있는지, 몇 부분만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정보전달을 부탁하려는 것뿐이었다.
“군단장님과 연락했다기에 물어보는 겁니다. 아직 군 체계가 살아 있다면 지금 이 사태에 대한 방비라도 있을까 해서.”
“그렇군요.”
진 소령은 잠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기밀이랄 것도 없습니다. 현재 체계대로 행동하기 어려우나, 각 군이 서로에게 협력하라는 원론적인 수준의 내용이었습니다.”
“흠, 그런가요.”
예상보다 별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이대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군단 병력은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거겠죠? 아직 많은 군인이 이 사태에 저항 중이라고 보면 되겠습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다들 심각한 피해를 받은 터라.”
그 정도는 고천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애초에 공군이 수송기만 띄웠다는 것부터가 전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지 않는가.
“물론, 희망적인 부분이 있긴 합니다.”
진 소령이 고천수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저희에게 연락 왔던 건, 수도군단이었습니다.”
“수도군단?”
놀라는 고천수를 보며 진 소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락이 닿은 것도 얼마 안 됐으니 그쪽도 아직 버티고 있다는 것이겠죠.”
수도군단.
고천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수도권도 완전히 함락되지는 않았다는 건가?’
근처 인구가 많아 이미 엄청나게 털렸을 거라 예상했건만, 연락을 취해 올 정도면 약간의 숨통은 트여 있는 걸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 대전역에서 위로 올라간 기차는 뭔가 목적이 있는 것?
-^^ 이제야 안 놈도 있네.
-헐.
예상보다 큰 정보였다.
고천수는 진 소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소령님. 군인들이 많이 살아 있다니 안심이 되네요.”
“아닙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저한테 이렇게 다 알려 주셔도 됩니까?”
고천수의 물음에 진 소령이 쓴웃음을 지었다.
“상부상조하는 사이에 이 정도 정보는 나눌 수 있겠죠. 그리고 연락해 온 것도 어차피 공군이 아니라서.”
“하하.”
재미있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고천수는 어색하게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죽기 직전 사람 같잖아.’
빅 바디가 쫓아온다는 시점에서 진 소령은 이미 뭔가를 내려놓은 것 같은 분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살기를 포기한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진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생사고락의 끝을 함께하는 전우에게 나누는 무언가와 비슷한 것이었다.
“도착……, 도착했습니다!”
그때, 운전병이 외치며 손을 가리킨 곳에 거대한 항구의 전경이 보이고 있었다.
***
“저게, 항구라고?”
무슨 공단처럼 느껴질 정도의 크기에, 고천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천수 이런 거 첨 보나?
-학교 다닐 때 공단 견학 같은 거라도 갈 텐디.
-설마 천수는 견학에는 매번 참가하지 못하는 외톨이였다든지…….
고천수가 다니던 학교에는 이런 곳으로의 견학이 없었다.
다른 학교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경한 장소에 오게 된 고천수는 탄식만 흘릴 뿐이었다.
‘이런 게 바로 뉴스에서만 보던 그건가.’
경제 성장률 어쩌고저쩌고할 때 항상 배경화면으로 보여 주는 대형 선박들의 요람.
엄청난 크기의 고정 크레인들과 컨테이너박스, 그리고 배들이 들어오는 거대한 부두들이 늘어서 있는 게 보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뭐지, 저건?”
어울리지 않는 배 한 척이 가장 가까운 근처에 떡하니 정박해 있었다.
“뭐야.”
-ㅋㅋㅋㅋ 천수 또 첨 보는 거 나옴.
-아니, 슈밤. 저게 왜 여기에???
-클리셰 등장.
고천수는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민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시야에 닿는 곳에 유일하게 보이는 그 배 한 척은, 그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소령님!”
뒤늦게 고천수가 부르자, 진 소령도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밀며 탄식하듯 답했다.
“네, 저도 확인했습니다……!”
모두가 확인한 그것.
근처에 정박해 있는 배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크루즈 선이었다.
‘대체 뭐야.’
고천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뭔가 있다면 큰 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예상외였다.
삐걱.
그사이 차가 한계에 다다랐다. 고천수는 탄식을 흘리면서도 일단 운전병에게 손짓했다.
“일단 내리죠.”
그렇게 차를 세우게 한 뒤, 고천수는 빠르게 흑구와 함께 빠르게 하차했다.
“흑구야.”
왈!
“너도 저게 보이냐?”
기특하게도 부름에 응답하는 흑구를, 고천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흑구는 고천수가 어떤 기분인지도 모른 채 환한 얼굴로 혀를 할짝이고 있었다.
“웃음이 나오냐, 저걸 보고?”
크루즈 선.
호화롭기 그지없는 배라, 고천수도 생전에 한번 타 봤으면 좋겠다고 희망한 배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포 생존 게임에서 크루즈 선이라 함은…….
“고천수 씨.”
진 소령이 다가와 고천수의 옆에서 탄식을 뱉었다.
“이거 큰일 났네요.”
그는 크루즈 선을 보고 고천수와는 생각을 하고 있던 듯했다.
“저 배 좀 보세요.”
“네, 보고 있습니다. 아주 위험해 보이는 배가 아닐 수 없…….”
“정박한 위치 말입니다.”
진 소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천수의 말을 잘랐다.
“부두와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 말에 고천수는 살짝 숨을 삼켰다.
‘어라, 그러고 보니…….’
크루즈 선의 음산함을 논할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크루즈 선은 부두에 제대로 정박해 있지 않았다. 부두도 아닌 엉뚱한 장소에, 그것도 콘크리트 바닥의 끝에서는 10m 이상은 떨어져 있었다.
“안에 누가 있지 않겠습니까?”
뒤늦게 다가온 운전병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천수는 선입견을 거두고 일단 크루즈 선을 찬찬히 다시 살펴보았다.
지금 걱정할 건 저 크루즈 선을 탈 수 있느냐, 그리고 크루즈 선이 과연 운항이 가능한 상태냐 하는 것이었다.
왈!
그때였다.
흑구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크루즈 선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왈! 왈왈!
“뭐야. 뭐라도 있…….”
고천수는 순간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크루즈 선 갑판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사람?”
선원처럼 하얀 복장을 한 그 누군가는, 마찬가지로 이제야 이쪽을 발견한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
그걸 본 운전병이 생일을 맞은 어린아이처럼 제자리에서 뛰었다.
“있습니다!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사람이 있다!”
진 소령도 곧장 반색했다.
“고천수 씨!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렇네요.”
하지만 고천수는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었다.
‘뭐 하는 거지?’
크루즈 선에 서 있는 사람은 계속 팔을 휘적거리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쎄한데.
-아, 이런 거 하지 마. 나 겁 많음.
-이제 와서 나 겁 많음. 이 지랄. ㅋㅋㅋㅋ
분위기가 이상한 건 틀림없었다.
고천수만 느낀 건 아닌지 운전병도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저 사람 손짓을 멈췄습니다.”
“그러게.”
뭔가 심상찮다는 표정으로 답한 진 소령이 고천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천수 씨, 좀 묘하긴 한데 어떻습니까.”
“……글쎄요.”
일단 저쪽에서 이쪽 부두에 배를 대 주지 않으면 어떤 상황인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
‘다른 방법은 없나?’
수상한 배에 타는 건 사절이었다. 웬만하면 고천수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었다.
쿵.
하지만 그런 고천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듯, 근처의 지면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설마 또……!”
운전병과 진 소령이 각각 놀란 듯 주춤거렸다.
그러더니 진 소령은 뭔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고천수에게 말했다.
“고천수 씨! 시간이 별로 없는 듯합니다! 제가 일단 제 지인을 찾아보겠습니다!”
“네?”
“만약에 없으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진 소령은 저 혼자서 달려 나갔다. 고천수는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 상황에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고천수는 곧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일단은…….’
진 소령은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저, 저희 이제 어떡하죠?”
갑자기 남겨진 것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운전병이 사색이 된 얼굴로 고천수를 바라보았다.
‘쯧.’
고천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운전병은 고작해야 고천수와 또래였다. 얼굴을 보니 그것도 20대 초반이라고밖에 안 보였다.
‘패닉이 왔다 이거지.’
몇 살 차이 정도겠지만 고천수는 운전병에게 조금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군대에 왔더니 이게 웬 난리겠는가.
-[한도초과] : 천수야, 뭐 해!
-곧 있으면 여기서도 빅 바디 나타날 삘임.
-쫓아오던 놈들도 도착할 거고.
“후.”
고천수는 잠시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한다…….”
방법은 둘뿐이었다.
1. 숨는다.
2. 크루즈 선을 탄다.
뭐가 됐든지 간에 깔끔하게 고천수가 원하는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수명이 짧아도 몇 시간은 숨어야 하잖아.’
게다가 여기서 숨어 있다가 나간다고 해서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바다로 떠나기는 해야 하는데, 일단 빅 바디가 나타나면 크루즈 선은 운항이 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바로 떠날 확률이 높았다.
숨어 있다가 다시 인곡항으로 가 봤자 기다리는 배가 있을지 알 수도 없고 말이다.
‘그럼 역시…….’
저 뭣 같은 크루즈 선에 탑승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었다.
“쒯.”
-ㅋㅋㅋㅋㅋ
-진짜 타기 싫나 보다. ㅋㅋㅋ
-뭐 어쩌겠나. 저거밖에 없는 것을.
시청자들이 말하는 걸 보니 탑승 가능한 배인 건 맞는 듯했다.
“하.”
방법이 없었다.
고천수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운전병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진 소령의 모습을 찾기 시작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싶었다.
‘안 온다면…….’
크루즈 선까지 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했다.
일단 눈에 보이는 건 주변에 서 있는 거대한 고정 크레인들이었다.
-천수 저것도 조종할 줄 알아?
-대체 얼마나 인터넷 망령이었으면 그런 것까지 배운 거임?
-ㅋㅋㅋㅋㅋㅋ
“몰라요, 형님들.”
인터넷 망령이라 영상으로 저런 크레인을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저 정도의 크레인을 직접 다루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뭐라도 해 봐야했다.
그렇게 고천수가 걸음을 옮길 때였다.
“천수 씨!”
빵빵!
거대한 크레인이 설치된 차량이 이쪽으로 경적을 울리며 다가왔다.
조수석 창문으로, 진 소령이 외치고 있었다.
“필요한 거 가져왔습니다!”